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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나의 낙원에게 (109/199)

109화. 나의 낙원에게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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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멜리아는 이 경이로운 검은 독수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망설이지 않고 속삭였다.

16553732911212.jpg“이클리트.”

그 한 마디에 갑자기 검은 독수리가 높이 날아올랐다. 어찌나 날개가 거대하던지, 엄청난 바람이 아멜리아에게로 몰아쳤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서 고개를 들었다. 단 한 순간도 그 모습에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하면서 떨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 검은 독수리는 사라지고, 거대한 검은 날개를 단 존재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내려앉았다. 조금 길게 자란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내리는 눈보다 더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순백의 세상에 밤을 가져오는 존재.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천사를 보는 것 같았다. 분명 날개는 까만색인데, 너무 성스럽게 느껴져서. 정말로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 공간에 오롯이 둘만 남겨진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타들어 갈 듯한 숨을 겨우 삼켰다. 낯설지 않은 붉은 눈동자. 낯설지 않은 날개. 전부 다 그녀에겐 낯설지 않았다. 이미,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꿈에서도 보았고. 항상 그녀가 위험했던 순간에 지켜주었던 환상이니까. 마침내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표정을 겨우 살피며 입을 열었다.

16553732911215.jpg“아멜리아.”

익숙한 목소리가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히 분위기에 압도당해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초조하고 두려웠지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

16553732911215.jpg“이게 납니다. 진짜 내 모습이에요. 독수리를 이어받은 반인반수.”

처음엔 그녀를 마주하던 이클리트가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속삭였다.

16553732911215.jpg“갑자기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보기 무서우면, 잠시 눈 감아도 괜찮습니다. 다 이해하니까.”

하지만 오히려 눈 감은 것은 이클리트였다. 누군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 모습을 좋아해 주는 모습은.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보는 건 상관없었다. 무뎌질 정도로 익숙해서. 그런데 그게 아멜리아라면. 눈앞에 그녀가 조금이라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플 것 같아서. 심장이 자꾸만 저릿해져서, 이클리트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카힐로에게는 다시 사랑해달라고 말할 거라, 그리 호기롭게 말했지만.

16553732911215.jpg‘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당신의 눈에 나는 어떨까. 나는, 역시 괴물일까?’

그의 두려움이 끝내 눈에 보이는 떨림으로 번져가는 순간. 아멜리아는 그제야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클리트는 그녀가 좁히는 거리에 흠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그보다 더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는 그를 붙잡았다. 이클리트는 여전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16553732911212.jpg“안아도 돼요? 아니, 안고 싶어.”

16553732911215.jpg“아멜…….”

이클리트가 답하기도 전에 아멜리아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손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함께 안아주었다. 아멜리아는 조금씩 잦아드는 그의 떨림에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직, 그의 안에 차마 헤아릴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남아 있는 거다.

16553732911212.jpg‘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건가.’

얼마나 오래 쌓이고, 쌓여온 불안일지. 역시 이 정도로 안 된다면.

16553732911212.jpg‘더 많이. 많이 안아주면 돼.’

아멜리아는 한 손을 뻗어서는 그의 뺨을 감쌌다. 이클리트는 그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으나, 이내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길에 잠시 기대고는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16553732911212.jpg“대공 전하, 눈을 감지 마요. 나를 봐줘요. 나는 다 보고 싶어요.”

감고 있는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16553732911212.jpg“지금 내 마음을 전부 끄집어내서 대공 전하께 보여주고 싶은걸요. 말로는 다 못 하겠어. 그러니까, 눈은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열기가 섞인 그녀의 손길이 끊임없이 이클리트를 쓰다듬어 내렸다.

16553732911212.jpg“내가 대공 전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 눈을 봐줘요.”

결국,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이끌려 천천히 눈을 떴다. 순식간에 파고드는 환한 빛 아래에 그녀의 녹안이 선명하게 보였다.

16553732911212.jpg“내 눈에 두려움이 있나요?”

부드럽게 휘늘어진 그녀의 눈동자엔 온통 그의 모습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괴물이 아니었다. 평소 그녀가 바라보는 이클리트의 모습. 미움도 두려움도 없는, 사랑하는 이를 보는 모습이었다. 이클리트는 자꾸만 헝클어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16553732911215.jpg“이런 나라도, 괜찮습니까?”

16553732911212.jpg“당신밖에 없어요. 항상 날 지켜줬잖아요. 내가 어떻게 무서워해요. 이렇게 아름다운 나의 수호신을.”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의 눈가에 그조차 모르게 점점 커다란 눈물이 고였다.

16553732911215.jpg“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16553732911212.jpg“모르겠어요. 그냥 본능적으로? 아니. 운명적으로.”

아멜리아는 더욱 빤히 그를 들여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16553732911212.jpg“대공 전하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사랑하는 것밖에 못 하니까.”

끝내 고이던 눈물이 그의 서늘한 뺨을 타고서 뜨겁게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클리트는 너무 당황했지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 역시 그런 그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냥 안고서 다독였다.

16553732911212.jpg“울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요. 나는 대공 전하의 강한 모습만 원하는 게 아니에요.”

16553732911215.jpg“…….”

16553732911212.jpg“약한 모습도. 슬픈 모습도. 아픈 모습까지 전부 보고 싶어요. 나는 그렇거든요. 나는 이럴 때 가장 먼저 대공 전하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항상, 제일 먼저예요, 나한테.”

이클리트는 눈앞이 눈물로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아니. 이미 머릿속에 한가득 새겨져 있었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아멜리아의 모습은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16553732911212.jpg“나는 대공 전하의 전부를 알고 싶어요. 전부, 사랑하고 싶으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조금은 편안해진 숨을 내쉬며, 어느새 눈물이 마른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16553732911215.jpg“그럼, 이것도 봐줘요.”

이클리트는 망설이지 않고 옷을 벗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멜리아에게 등을 보였다. 아멜리아는 그의 등에 새겨진 끔찍한 상처에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16553732911212.jpg“이건, 왜…….”

몇 번이고 그와 밤을 보냈는데. 이런 상처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항상 잠자리할 때마다 등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자신이 등을 감싸려고 해도, 항상 다른 쪽으로 손을 대게 했었으니까. 아멜리아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의 상처를 더듬었다. 움푹 파인 흉터에 오히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16553732911212.jpg“어떡해…… 아파요?”

16553732911215.jpg“아프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얼마나 아팠을까. 대체 얼마나 사람을 모질게 때려야, 이런 흉터가 이렇게 눈에 띄게 새겨질 수 있는 걸까. 아멜리아의 손길이 굳어지는 걸 느끼며, 이클리트가 그녀를 붙잡았다.

16553732911215.jpg“정말 괜찮아요. 아프진 않아.”

16553732911212.jpg“괜찮은 게 아니죠. 대공 전하는 제 것인데. 대체 누가 이렇게 한 거예요?”

어느새 순수하게 분노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732911215.jpg“나는 폐하의 아들이고, 제국의 황자도 맞습니다. 그런 내가 반인 반수에요.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죠. 왜 그럴 것 같습니까?”

그가 어쩌면 검은 독수리일지도 모른다고. 수인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금씩 의심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16553732911215.jpg“애초에 나는 폐하에게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시간의 숲을 열 열쇠가 되어야 했으니까.”

16553732911212.jpg“시간의 숲을 열 열쇠?”

이클리트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아멜리아에게 자신의 모든 과거를 말해주었다. 아스란에게 학대당하고, 이용당하려다 결국 북부에 버려진 것까지 전부.

16553732911215.jpg“북부로 보내진 건, 나에겐 해방이었습니다. 죽고 싶었으나, 헤스틴 공이 구해줬고요. 이후 아멜리아, 당신의 편지로 인해 하루하루 살고 싶어졌고. 그런 나를 로사가 도와주었습니다.”

아멜리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었다. 시간의 숲을 열기 위한 열쇠라니. 황제가 그런 끔찍한 짓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황제가 어떻게든 루베르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 이해됐다.

16553732911212.jpg‘시간의 숲을 갖기 위해서라면, 정말 뭐든 하려고 했구나. 추악해질 때로 추악해질 수 있었구나.’

정말로 죽으려고 했고, 죽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숨을 삼키며 이클리트를 보았다.

16553732911212.jpg“이제 그런 생각 안 하죠? 죽고 싶지 않은 거죠?”

16553732911215.jpg“살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예전에 부인이 내게 말했죠.”

16553732911212.jpg‘제 남편의 오늘이 무채색이 아닌, 저토록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기만을 바랍니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해요.’

16553732911215.jpg“정말로 그 말 그대로입니다.”

16553732911212.jpg“…….”

16553732911215.jpg“내 안에 당신이 만들어준 너무나도 다양한 색의 감정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전부 당신에게 배운 감정으로,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어요.”

16553732911212.jpg“대공 전하…….”

16553732911215.jpg“로사, 헤스틴 공, 카힐로와 공작가 사람들까지. 다른 사람들도 많이 만나면서, 내 안에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에요. 내가 부하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도, 전부 당신 덕분입니다.”

아멜리아는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감정을 배웠다는 말에 안도했다. 살고 싶다는 말에도 위안이 얻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16553732911212.jpg‘이분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설령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솔라 제국의 황제로서. 누구보다 아픔을 잘 알고 계시니까. 다른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며, 잘 해내실 거야.’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믿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16553732911212.jpg“다행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에게서 더 많은 감정을 배우며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클리트는 정말로 모든 공포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처음부터 그랬다. 다들 자신을 괴물이라고 여기고, 무서워했을 때도.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아멜리아는 그저 눈으로 본 것을 믿으며 지금처럼 환하게 웃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16553732911212.jpg‘역시 맞았네! 그때 절 도와주셨던 그분!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눈을 보고, 예쁘다고 해주었다. 남들은 저주라고 하는 홍안을 보고서도.

16553732911212.jpg‘아가. 넌 저주받은 게 아니야. 신이 특별히 더 사랑한 거야. 사랑이 넘쳐서, 어여쁜 꽃을 여기에 심어준 거야. 그래서 네 눈동자에 예쁜 붉은 꽃이 피어 있어.’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특별하고, 예쁘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한결같은 그녀인데.

16553732911215.jpg‘내가 왜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더 많이 당신을 믿어야 했는데. 내 안에 두려움이 그걸 방해하고 있었어.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데…….’

평생의 내 편. 서로가 서로를 정말로 가진 것이기에. 결코 끊어지지 않을, 영원할 복종을 하고 있음을. 아멜리아는 조금 힐끔거리는 눈빛으로 이클리트의 날개를 바라보았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의 시선을 느끼곤,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732911215.jpg“내게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16553732911212.jpg“아, 그게. 만져 봐도 돼요?”

16553732911215.jpg“기꺼이.”

이클리트가 날개를 한껏 펼치자, 아멜리아는 눈을 반짝이면서 그의 날개를 조심스럽게 만져보았다.

16553732911212.jpg“와…… 엄청 부들거려요! 너무 예쁘다. 까만색인데, 엄청 빛이 나네요. 마치 은하수가 박힌 밤하늘 같아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예쁜 표현에 이클리트는 떨리는 미소를 그렸다.

16553732911212.jpg“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었네요. 지금도 매일 반하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반할 거예요.”

이클리트는 천천히 날개로 그녀를 감싸며 속삭였다.

16553732911215.jpg“계속, 사랑해줄 겁니까?”

16553732911212.jpg“더 많이 사랑할 거예요.”

16553732911215.jpg“아니.”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16553732911215.jpg“내가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더 이상의 떨림은 없었다. 아니, 떨린다면 서로를 향한 설렘이 배어 나와, 어쩌지 못할 떨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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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던 이클리트가 기대감이 가득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16553732911212.jpg“그럼 대공 전하, 날 수도 있어요? 당연히 날 수 있죠?”

이클리트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선 곧장 그대로 날아올랐다.

16553732911212.jpg“와!”

그는 조금은 풀어진 어조로 가볍게 속삭였다.

16553732911215.jpg“새가 더 멋있죠?”

16553732911212.jpg“당연하죠!”

진심으로 좋아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이클리트는 다시 한번 자신의 두려움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을 괴물이 아닌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라 말해주는 그녀 앞에. 이클리트는 다시금 입을 맞추며 맹약을 새겼다.

16553732911215.jpg‘마지막 그 순간까지, 당신에게 복종할 겁니다.’

끊임없이 행복과 환희만이 넘치는, 나의 낙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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