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미 운명이었다2022.01.21.
카힐로는 초조하게 두 사람을 기다렸다. 피오레의 가주님이 그분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혹여, 가주님이 그분을 조금이라도 멀리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언젠가, 걱정하고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길 바라지 않으니까.
‘수인의 애정은 각인과 같아. 조금만 변질하여도 집착이 되고 말지. 갖지 못하면 죽여서라도 가지려고 하는 그런 끔찍한 결말이 되길 바라지 않는데…….’
그때, 주변으로 인위적인 바람이 휘몰아쳤다. 카힐로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뭔가가 보였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안고서, 함께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저택 창문 쪽으로 사라졌고, 카힐로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이내 떨리는 숨을 삼켰다.
‘피오레 가주님은, 정말로 대단하시구나. 내가 괜한 걱정을 했었어.’
처음엔 생각지도 못한 여인 때문에. 그분이 위험해질까 봐, 한껏 날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분이 그 여인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너무 독하고, 위험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분만큼이나 피오레 가주 역시 강한 사람이었다.
‘대공 전하는 이제 내 남편이에요. 물론 서로 이용하는 관계지만, 그래도 같은 길을 가기로 했어요. 그러니 그 길에 끝이 올 때까지, 내가 지켜요.’
지난날, 불안해하던 자신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해주었던 말. 그녀는 정말로 그 말을 지킨 것이다.
‘이젠 대공 전하의 곁에 내가 아닌 가주님이 계시겠지.’
대공 전하에게 가주님 같은 완벽한 세상의 전부가 나타나서 다행이라고. 더는 그 텅 빈 소년을 보지 않아도 된다. 소년은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행복해졌으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수인의 애정이 위험할 만큼 맹목적이지만.
‘그만큼 하나뿐인 특별한 사랑이니까.’
카힐로는 진심으로 바랐다. 두 분이 행복하기를. 서로를 지키기 위해 죽는 그런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기를. 저렇게 사랑하고 있으니, 지킬 힘도 더 커졌을 테니까.
‘카힐로, 저 아일 지켜다오.’
처음, 이클리트를 카힐로에게 맡겼던 사람은 바로 카르티아 전 공작이었다. 카힐로는 사실 카르티아 공작령의 사람이었다. 전 공작 각하에 대한 충심으로 지금까지 이클리트의 곁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카르티아 전 공작이 이클리트를 어찌 아는지, 그건 지금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엔 의문이었던 카힐로도 이클리트를 지키면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말 그대로 가족처럼 곁에 있었으니까.
“공작 각하의 부탁도 저런 의미였을 테지요. 그러니, 부디 지켜봐 주세요.”
*** 아멜리아는 로사와 함께 있었다. 이클리트가 배려하여 데려온 마미도 함께였다. 마미는 이렇게 쓰러져버린 로사의 모습에 충격받았으나, 그녀 역시 눈물을 꾹 참고서 아멜리아와 함께 이런저런 추억 얘기를 열심히 속삭였다.
“가주님은 요리 솜씨는 영 아니었다니까요!”
“아니야. 그래도 로사 유모는 맛있게 먹어줬어.”
“당연히 로사 유모님은 가주님의 모든 걸 예뻐하셨으니까요.”
“다음엔 제대로 만들어볼 거야. 유모가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저도 도와드릴게요. 그 요리, 언젠가 대공 전하께도 드려야 할 테니까요.”
“흠흠흠!”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대공 전하는 완전 적극적…….”
“마미!”
“보셨어요, 유모님? 가주님 이런 모습 유모님도 처음 보시죠!”
마치 시간이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미와 아멜리아는 어렸을 때처럼 즐겁게 수다를 떨면서 로사의 곁에 머물렀다. *** 이클리트는 로사와 함께 지냈던 이 집을 로사가 좋아할 곳으로 개조했다. 하지만 로사가 저렇게 쓰러진 이후엔, 제대로 이곳에서 머문 적은 없었다. 계속 마음에 걸렸고, 계속 마음이 아팠으며, 계속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에서 이클리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사가 쓰러지기 전, 이클리트에게 남긴 편지를 겨우 꺼내 보았다.
“차마, 읽을 수가 없었지.”
마치 마지막 유언인 것 같아서. 도저히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없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펼쳤다. 읽어 내리는 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면서, 편지를 쥔 손이 나직이 떨렸다. 편지에는 로사가 이클리트에게 전하는 비밀이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제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뤄진 건가요? 대공 전하께선 아멜리아 아가씨를 만나셨나요?-
“그래, 만났어.”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대공 전하께 아멜리아 아가씨가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면, 예전에 한 약속을 지켜주세요. 대공 전하께서 아멜리아 아가씨를 살릴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주겠다는 그 약속이요.-
“그게 무슨 말이지?”
-아멜리아 아가씨의 심장이 그토록 약한 이유는, 아가씨께서 무한한 마나를 품고 있어서. 아가씨의 심장이 그 마나를 감당하지 못해, 마법을 쓰지 않아도 점점 수명이 깎여가고 있는 거랍니다.- 이클리트는 로사가 말하는 아멜리아의 심장에 얽힌 진실에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수인도 아닌데 마탄을 연발로 쏘고, 모든 속성 마법까지 다룰 정도로 엄청난 마나를 가지고 있다. 설령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대마법사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이다.
‘그래서 평범한 심장이 버티지 못했던 건가.’
-사실, 애초에 아가씨의 편지가 대공 전하께 간 것은 우연이 아니랍니다. 제가 만들어낸 우연이지요. 저는 대공 전하께서 아멜리아 아가씨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에게 끌린다면, 그건 분명 운명이니까.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니까요. 만약, 너무 무거운 운명으로 얽히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이보다 더한 운명으로 얽힌다고 해도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저는 아멜리아 아가씨를 살리고 싶었고, 대공 전하의 그 생명력 넘치는 힘이 언젠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이기심에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남깁니다.- 로사의 편지를 읽을수록, 이클리트는 그제야 그녀가 했던 묘한 말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힘이 언젠가 소중한 것을 지키는 데 필요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했던 것. 그녀가 자신에게 이 힘을 다스릴 방법을 가르쳤던 것까지.
‘전부, 아멜리아.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구나.’
하지만 의문인 건, 이 힘으로 그녀를 어떻게 지킨다는 걸까? 아멜리아를 살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로사는 그 힘을 나중에 찾아야 한다고 했었다. -대공 전하, 아가씨의 심장의 꽃을 부탁해요. 오직 대공 전하만이 아가씨의 꽃을 지킬 수 있으십니다.-
“심장의 꽃?”
로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신신당부했던 말도 이것과 비슷했다.
‘대공 전하는, 꼭. 만나주세요. 우리 아가씨를, 만나서. 우리 아가씨의 심장에 심어진 씨앗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대공 전하께서, 꼭. 도와주세요······.’
“심장의 꽃이라니. 설마 그 제비꽃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그냥 새긴 거잖아. 그저 비유인 건가?”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클리트는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심장에 있는 제비꽃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이 편지를 읽지 않고 찢으셨다면, 제 생각은 실패했을 테고. 아가씨는 지금 이 세상에 없으시겠죠. 하지만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대공 전하께 아가씨는 소중한 사람일 테니 부디. 아가씨를 도와주세요. 지켜주세요.- 로사의 편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정말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만을 걱정했군.”
이클리트는 편지를 소중히 품었다. 이제 그녀는 괜찮아졌다. 더는 아프지 않으니까. 일순, 그녀가 심장을 부여잡았던 순간을 떠올렸으나, 치료사도 그렇고 마법을 썼던 모습까지. 그녀는 분명 괜찮아졌다.
‘기적일까. 기적이겠지?’
심장이 버틸 수 있게 된 거겠지? 로사는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를 우연이 아닌 일부러 만들어낸 운명이라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작은 그렇다고 해도, 결국 이클리트에게 아멜리아는 유일한 단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녀가 자신을 괴물이 아닌, 그저 이클리트로서 지켜봐 준 순간까지 전부.
‘나는 그녀에게 각인된 거야.’
수인의 애정은 영원한 집착이라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영원히 지배당해도 괜찮으니까. 정말로 운명이라는 말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난 태어난 거야. 그게 내 운명이야.”
그녀가 꿈꾸는 세상으로 바꿔서, 그 속에서 함께 살다가. 마지막, 그녀보다 하루 늦게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그녀가 무서워하지 않게,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 주고 싶었으니까. 단 한 순간도 그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이클리트는 로사가 남긴 편지에 대고, 제 삶을 새긴 맹약을 읊조렸다.
“그러니 걱정 마, 로사. 영원히 변하지 않은 형태로, 언제나 그녀와 함께할 거야.”
그때,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카힐로가 들어왔다. 그의 음울한 표정에서 이클리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애써 의연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공 전하, 로사가…….”
“부인은?”
“곁에 있습니다.”
“이제 정말 로사가 편히 갈 수 있게 되었나 봐.”
이클리트는 로사의 편지를 다시 제자리에 넣어두고서, 조용히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
“유모님, 흐흐흑. 유모님!”
마미가 로사를 붙잡고서, 끝내 참고 있던 눈물을 오열로 쏟아냈다. 아멜리아는 끝까지 로사의 손을 놓지 않았다. 분명, 자신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는데. 더는 로사의 손끝에서 그런 기적을 바랄 수는 없었다. 너무 평온하게, 깊은 잠에 빠져버렸으니까. 로사의 기다림이 다 끝났다는 듯. 이제 정말 다 되었다는 것처럼.
‘유모…….’
그때, 로사의 손을 잡은 아멜리아의 손을 이클리트가 함께 잡아주었다. 아멜리아는 떨리는 눈동자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말없이 잡아주는 이 온기에, 아멜리아는 두려움이 점차 잦아들면서,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로사 유모는 행복했겠죠?”
이클리트는 애써 흔들림 없는 어조로 그녀를 다독였다.
“행복했을 겁니다. 그대를 보기 위해 기다렸고, 그대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으니. 이제 그 기다림을 다해서, 훨훨 날아간 겁니다. 부인이 그랬잖아요. 눈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그의 말에 아멜리아는 로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록 눈을 볼 수는 없었지만, 로사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아니, 어쩐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이제 그만. 유모가 기다리지 않게, 보내줘야겠죠.”
이클리트 역시 로사를 보면서, 속으로 읊조렸다.
‘그대의 편지는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이 설국의 눈꽃으로 다시 태어나.’
북부에서 설국의 눈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더없는 축복이었다. 이후, 소박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이는 살아생전 로사가 입에 달고 살았던 유언이었다.
‘대공 전하, 잘 들으세요. 저는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인사 속에 떠나고 싶어요. 마지막은 그렇게 해주세요. 아시겠죠?’
이클리트는 이 말 또한 기억해두었다가, 그녀를 위한 마지막을 채워주었다. 북부의 장례식은 저 드넓은 설국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남부 사람들이 보기엔, 차가운 대지로 보내주는 것을 가혹하다 생각할 수 있었지만, 북부에서 태어난 이들은 애초에 이 차가운 대지와 함께했기에. 마지막까지 이 대지에 잠들어, 자신의 육신이 다른 생명의 삶이 되고 체온이 된다면 축복받는 것이라 여겼다. 아멜리아는 허공을 향해 물의 마탄을 쏘아 올렸다. 지난번, 바다에서 쏘아 올린 마탄이 보석처럼 반짝이던 걸 떠올리면서. 역시나 잘게 쏟아지는 물방울이 보석처럼 흩날리며, 로사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떠나는 그 길, 어둡지 않게. 반짝이는 저 보석을 따라서 가 달라고.
‘사랑해, 유모. 아주 많이 사랑해. 나중에. 하늘에서 날 만나게 되면, 너무 혼내진 말아줘.’
아멜리아는 살며시 이클리트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직 로사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을 되뇌었다.
‘나도 유모처럼, 아무런 슬픔 없이 갈 수 있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행복하고, 사랑할 테니까.’
이클리트는 가만히 아멜리아의 손을 잡아주었고, 아멜리아도 그런 이클리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편지로 인해 만났던 우연은 인연으로 얽혀서 이렇게 운명이 되어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함께 떠나보냈다.
*** 장례를 치르고,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진짜 클리오 대공가에 당도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곁에 있어 주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생각보단 마음이 괜찮았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공 전하. 정말로 엄청 괴롭거나, 아프진 않으니까.”
“부인.”
“로사 유모의 마지막 표정이 제게 위안이 되었어요. 그래서 대공 전하께 너무 감사해요. 이렇게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아닙니다.”
“북부에선 죽으면 눈꽃으로 다시 태어난다면서요. 그것도 다행이에요. 로사 유모는 꽃을 좋아했으니까요.”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강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대로 정신 차려야죠. 북부에 온 이유는 이게 다가 아니잖아요?”
그때, 아멜리아의 말이 씨가 되듯, 마미가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가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북부에서 날 찾아올 사람이 누구야?”
“루베르에요. 그들이 가주님을 뵙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