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금기의 일족2022.01.24.
“루베르라고? 그들이 여기로 왔다고?”
마미의 말에 아멜리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곁에 있던 이클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먼저 루베르에서 벗어나 움직이다니…….’
안 그래도 루베르에 전령을 보내야 하나, 했었다. 전령을 보내도, 그들이 쉽게 응답해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북부에 온 이후, 단 한 번도 그들이 이곳에 온 적은 없었으니.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소식을 듣고 움직인 건가.’
그녀는 정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걸까.
“대공 전하, 같이 가요. 어서 루베르를 맞이해야죠.”
“물론입니다.”
마미는 다급하게 움직이는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를 붙들었다.
“그전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자리입니다. 예복을 갖춰 입으셔야 합니다.”
“아, 맞아. 부탁할게, 마미.”
그렇게 마미의 손길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의복을 제대로 정비하고서, 접견실로 향했다. *** 아멜리아는 진짜 루베르를 만날 생각에 긴장했지만, 표정을 바로잡았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의 곁에 묵묵히 있어 주었다. 마침내, 아멜리아가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포르티셰 공작령에서 루베르를 만난 것처럼, 또 다른 충격이 그녀의 시야로 파고들었다. 접견실에는 세 명의 루베르가 있었다. 그들은 처음 이클리트를 만났을 때와 유사한 털옷에 역시나 얼굴에 기이한 문양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포르티셰 공작령에서 만난 루베르와 분위기가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소냐와 비슷한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한 젊은 남자가 아멜리아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손목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피오레 공작 각하, 클리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아이냑이라고 합니다.”
“이리 만나러 와주어서 고맙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 먼 길을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겁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게다가 소중한 이와 작별까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저희도 인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이냑이 뒤로 눈길을 보내자, 한 여인이 유리처럼 투명한 꽃을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이건…….”
“스켈레톤 플라워입니다. 루베르에선 죽은 영혼이 떠나는 길이 3일 동안 열리는데, 그 길을 밝혀주는 수호자의 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그 말에 엷은 미소를 띠며, 꽃을 받았다.
“고맙다.”
이클리트는 아이냑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이리 직접 대공가를 찾은 이유가 있을 테지.”
아이냑은 이클리트의 말에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희는 피오레 공작 각하에게 힘을 실어드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쉽게…….”
“자세한 얘기는 이미 소냐에게 들었습니다.”
아멜리아는 너무 그리운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소냐는 역시 북부에 있는 것인가?”
“원래는 직접 오시려고 했는데, 저희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잘 지내고 있다면, 그걸로 족해.”
“저희는 피오레 공작령에 있는 다른 루베르에게서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희에겐 어쩌면 마지막이자 절실한 기회일 테니까요.”
“…….”
“저희가 좀 더 자유롭게 솔라에서 살아갈 기회. 그런데, 루베르가 이번 반인반수 사건에 범인으로 오해받고 있다고 들었으니, 저희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냑은 목소리에 강한 힘을 주었다.
“예전처럼 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이냑의 말에 되물었다.
“방법이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그대들이 반군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고.”
아멜리아는 반군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하지만 아이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께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저 도와준다는 말만으로도 든든하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영광입니다.”
아이냑의 목소리는 다부졌고, 지금껏 만난 루베르보다 힘이 느껴졌다. 이클리트는 아이냑의 자세와 골격을 살피며 확신했다.
‘전사로군.’
이들이 아멜리아와 가까이하는 것이 정말로 도움이 될지, 아니면 화가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아멜리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대화 속에 가장 궁금한 걸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그대들은 루베르의 가주가 누군지 아는 것인가?”
아이냑은 다른 이들과 시선을 교환하면서, 살짝 굳어진 표정을 지었다.
“물어보실 줄 알았습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께선 루베르의 가주가 필요하실 테니. 하지만 저희도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정체는 알고 있지요.”
“정체를 안다고?”
“그분은 멸망한 루베르의 마지막 왕족입니다.”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눈빛이 굳어졌다.
“게다가 수인에 대한 원한도 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수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결국 외면당해서 루베르가 멸망했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루베르의 마지막 왕족이, 루베르 가주였다니…….”
이클리트는 다른 것보다 수인에 대한 원한이 깊다는 말을 묘하게 되뇌었다.
“물론 저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루베르까지 질려서, 완전히 떠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아멜리아는 생각에 빠졌다.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제 주위를 맴돌면서 루베르를 돕는 게, 어쩌면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찾아야 해.’
“그리고 공작 각하께 부탁드립니다. 정확히 남부에서의 밀주 상황이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아이냑의 부탁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길 지키는 티어들 중에 이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밀주 사건의 책임자가 있는데. 이사나 경이…….”
이클리트는 카마리를 향해 물었다.
“이사나 경은 어디 있지?”
카마리도 굳어진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사라졌다고?”
카마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래도 그녀가 계속 이사나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루베르가 대공가에 당도했다는 소식 이후에 사라졌다. 이클리트는 그가 사라졌다는 말에 묘한 눈빛을 띠며, 제 앞에 있는 루베르를 잠시 바라보았다. *** 사라졌다는 이사나가 인적 드문 곳에 몸을 숨긴 채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답지 않게 안색은 좋지 않았고,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어쩐지, 제 얼굴을 쥔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설마하니 루베르가 직접 여길 올 줄이야.’
특히, 아이냑 그자. 그는 장로다. 루베르는 나이로 장로를 택하지 않는다. 얼마나 현명하고, 루베르에 헌신하는지에 따라서 장로를 결정하니까. 그만큼 순수 혈통의 루베르라는 뜻이다. 루베르의 가주가 부재인 이상, 루베르를 이끄는 것은 장로였다. 그렇기에 장로가 직접 움직이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지금의 아멜리아에게 많은 것을 걸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루베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건가? 그건 내겐 썩 좋은 일은 아니군.’
이사나는 공허한 시선으로 또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을 응시했다. 북부. 지독히도 차가운 이 땅. 살이 에이고, 그의 감정마저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었다.
‘빨리, 떠나고 싶어.’
***
“남부로는 언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아이냑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애매한 답을 내렸다.
“남부의 상황이 급박하여 그리 오래 머물 수는 없지만,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에 금방 떠나진 못할 거다.”
적어도 밀주가 북부와 관련 없다는 증거를 찾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포르티셰 공작과 에드조프가 끊임없이 루베르를 건드릴 테니까.
“떠나시게 되면, 미리 전령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마법 도구 장인을 보내겠습니다. 밀주로 인해 반인반수가 날뛴다면, 이들이 만드는 도구가 도움이 될 겁니다.”
“마법 도구 장인이라니. 게다가 도구?”
아이냑이 실질적으로 아멜리아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은 바로 이 마법 도구였다.
“반인반수의 힘을 억누를 수 있는 우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아멜리아는 순간, 이상하게 꿈에서 봤던 우리가 떠올랐다. 우리에 갇혀 있던 검은 새. 마치 악마 같았던 그 공허했던 모습.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이클리트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건 대공 전하가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기분이 찝찝했다.
“우리라면, 그들을 진짜 짐승 취급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의지도 아닌데, 사람을 죽이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일단 잡아서 제압해야, 다시 되돌릴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이냑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지난번, 세인트와 그 늑대들처럼 댐을 붕괴하면서,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으니까.
“반인반수에 대한 것은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수인에 관한 책이 저희에게 남아 있으니까요.”
자신들보다는 루베르가 반인반수에 대해서는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이냑은 아멜리아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서 말을 이었다.
“본디 수인은 순수합니다. 결코 함부로 살생하지 않거든요. 반인반수도 마찬가지지요. 그렇기에 그들을 이용하고자, 정신을 지배하고 기억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다만, 수인만큼이나 정신력이 강할 텐데. 그런 이들을 그렇게까지 지배하는 밀주라니…….”
“어쩌면, 그들인가? 하지만 그 일족은 없어졌잖아?”
다른 루베르의 말에, 이클리트가 입을 열었다.
“그 일족이라니?”
아이냑이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노크와 함께 카힐로가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이클리트는 카힐로의 표정이 몹시 복잡 미묘한 것을 보곤, 누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왔지!”
카힐로의 뒤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루시아의 모습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추운 북부에서, 그녀는 여전히 몸매가 두드러지는 얇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헤스틴 공!”
“어머, 아멜리아!”
루시아는 아주 격하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멜리아라고 불러도 되나? 안 되나? 어머, 그러고 보니 낯설게 보는 눈이 있었네? 그럼 예를 지켜야지. 그렇죠, 피오레 공?”
아멜리아는 여전히 유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헤스틴 공. 편하게 대해요. 다시 봐서 너무 좋네요.”
“북부에서 보니 더! 더! 좋네요. 여전히 예쁘시고. 물론 가장 예쁘진 않지만.”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루시아의 모습에 카힐로는 혀를 찼고, 루베르는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역시나, 이클리트만이 이 분위기에서 가장 무덤덤한 태도로 루시아를 보았다.
“밀주 성분은 알아냈습니까?”
루시아는 인사말도 없이 곧장 결론부터 꺼내는 이클리트를 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튼, 우리 대공 전하. 언제봐도 재미없고 무심하다니까?”
“루시아.”
힘주어 부르는 이름에 루시아는 툴툴거리며 아이냑에게 다가갔다. 아이냑은 루시아의 강렬한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어쩌다 보니 살짝 엿듣게 됐는데, 그 일족이라는 게 혹시 뱀인가?”
뱀이라는 말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아이냑은 루시아의 말에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수인, 뱀의 일족입니다.”
“그걸 어떻게 안 겁니까?”
이클리트의 말에 루시아가 찡긋 웃었다.
“밀주 성분을 알아보려고 정말 여러 가지로 찾아봤죠. 정말 더럽게 안 나오는 거 있죠? 내가 모르는 독이라니. 너무 짜증 나서, 고대책까지 파헤치고. 어둠의 경로로 수인의 책도 들춰봤어요. 그리고 결국! 내 눈을 피해갈 수 없었죠.”
아멜리아는 루시아의 말에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뱀의 독인가요?”
“빙고! 맞아요. 뱀이에요. 수인, 뱀의 독이었어요.”
아이냑은 루시아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사라졌는데…….”
“사라졌다?”
이클리트가 아이냑을 보자, 아이냑이 말을 이었다.
“예. 뱀의 일족은 수인 중에서도 금기를 많이 저질러서, 그 일족 자체가 많이 사라졌었습니다. 살생을 끊임없이 일으켰거든요. 듣기론 자매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자매라는 말에 이클리트는 눈을 크게 떴다.
‘자매. 그럼 정말 여인이 맞구나.’
밀주 주인의 흔적으로 공통으로 계속 나오는 게 여인이었으니까. 아멜리아 역시 이클리트와 같은 생각을 했다.
‘뱀 두 마리라면, 역시 자매를 뜻하는 건가? 금기를 범하고 수인에게도 버려졌다면. 지금 이 같은 짓을 하는 건 복수일까?’
아스란 황제는 시간의 숲을 열 열쇠를 가지기 위해 수인을 이용했다. 어쩌면 아스란 황제와 밀주의 주인인 그 뱀이 연관 있을지도 모른다.
“뱀이라면 북부와는 전혀 관련 없어요. 이토록 혹독한 추위에 뱀은 살지 못하는 거 알죠? 이건 누가 봐도 북부의 짓인 것처럼 수를 쓴 거예요.”
어느새 루시아의 목소리가 한껏 가라앉았다.
“대공 전하를 노리는 거죠. 루베르와 함께.”
아멜리아는 에드조프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조프까지 얽혀 있으니, 당연한 결과야.’
“제가 직접 남부에 가서 폐하께 말씀드리겠어요. 폐하께선 독에 관해 날 엄청 신뢰하니까. 포르티셰 공과도 내가 싸우는 게 나을 테고.”
루시아가 아멜리아를 보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헤스틴 공.”
“간만에 정의 구현하는 거죠. 그럼 떠날 때, 말해주세요.”
루시아는 몸을 돌려서는 카힐로를 꼭 붙들었다.
“카힐로 경도 갈 거지?”
카힐로는 루시아를 떼어놓으려고 몸부림치며 완강하게 말했다.
“저는 북부를 지켜야 합니다, 헤스틴 공작 각하.”
“이것도 북부를 지키는 일이지! 그리고 날 지켜. 이건 명령이야.”
루시아와 카힐로가 투닥거리며 사라지고, 아이냑도 다시 한번 전령을 달라는 말과 함께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접견실에 단둘이 남게 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똑같은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결판을 내야 할 곳은, 솔라리스 황궁이 될 것 같네요.”
“지난번에 부인이 말했죠. 다음에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때는, 좀 더 완벽해질 거라고.”
“맞아요. 이번엔 진짜 확실하게 해치워야죠. 내가 지키고 싶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아멜리아는 결연한 눈빛으로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내 남편을 지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