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비밀이 생긴다는 것2022.01.28.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이끌고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의 개인 집무실은 온화한 공기와 함께 눈 돌리는 곳보다 초록색이 가득했다.
“와! 정말 직접 식물을 키우셨네요!”
정말로 다채로운 식물들이 제법 큰 규모로 자라 있었다. 마치 집무실이 아니라 하나의 온실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클리트는 몹시 좋아하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그 역시 덩달아 웃었다.
“카힐로가 죽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에이, 카힐로 경이라면 더 열심히 키웠을걸요. 게다가 금방 죽을 수 있는 규모도 아닌걸요.”
아멜리아는 싱그러운 초록빛이 가득한 이 작은 정원을 둘러보다가, 독특한 향이 느껴지는 식물 앞에 멈췄다.
“이게 헤스틴 공이 말했던 그 담배인가요?”
이클리트는 자연스럽게 아멜리아의 뒤편으로 다가왔다.
“헤스틴 공이 다 가져간 줄 알았는데, 조금 남아 있었네요. 아니면 카힐로가 일부러 숨겨뒀을지도 모릅니다. 방금 전 보았듯이, 카힐로 경이 헤스틴 공을. 어려워합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웃음을 짓다가, 살짝 툴툴대는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무실에 들어온 여인이 내가 처음이 아닌 거네요.”
“네?”
뜻밖의 말에 이클리트가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조금 질투 나네요, 헤스틴 공이.”
아멜리아는 반쯤 농담으로, 반은 진심으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대공 전하께서 저의 처음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던 게, 조금 이해가 되네요.”
“아멜리아.”
“응?”
이클리트는 고개 돌린 그녀의 입술을 순식간에 머금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감고서, 조금 더 깊이 숨을 삼켰고, 움찔했던 아멜리아도 긴장을 풀고선 그의 목덜미를 감싼 채 입술을 열었다.
“대공, 전하…….”
열기에 얼룩진 목소리마저도 이클리트는 빨아들이며, 나직이 읊조렸다.
“여기서 키스하는 건, 그대가 처음입니다.”
“하아…….”
그의 간지러운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배회하며 온몸을 녹아내릴 듯, 끊임없이 자극했다.
“이렇게 깊이 키스하는 것도 처음이고.”
아멜리아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신음을 연신 삼키며, 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이토록 사랑하는 여인까지 전부.”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눅진하게 뒤엉켰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점점 더 탁하게 일렁였고, 목소리 역시 한껏 낮게 그녀의 심장을 두드렸다.
“네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건, 아멜리아. 당신뿐이야. 다른 여인 따위, 눈에 들어온 적 없었어. 전부 당신이 처음이야.”
계속해서 밀려드는 그의 아찔한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더는 참지 못한 채, 그의 어깨를 조금 더 세게 붙잡으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나도 이렇게 하는 건.”
“…….”
“대공 전하가 처음이에요.”
그녀가 먼저 그를 벽까지 몰아세우고서, 입술을 더 깊이 박은 채, 끈적한 숨을 뒤섞었다. 이클리트는 그녀에게서 쏟아내는 키스에 평소보다 심장이 더 날뛰면서, 반쯤 풀어진 시선으로 웃었다.
“이게 더, 떨리네요.”
점점 격해지는 호흡 끝에 온화한 공기는 점점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 아멜리아는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를 겨우 털어내고서, 이클리트가 내어준 차를 마셨다. 북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느긋하게 있을 수 없었기에. 곧장 남부, 솔라리스로 돌아갈 일정을 짜야 했다.
“헤스틴 공이 나서준다면 든든할 거예요. 포르티셰 공도 그때처럼 막무가내로 조사하진 못할 테고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헤스틴 공으로서는 부담되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녀 역시 어두운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죠. 결국 공식적으로 대공 전하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될 테니까요. 일단, 밀주의 시작이 북부가 아니라는 건 헤스틴 공이 밝혀줄 테지만, 황궁에 있는 뱀 두 마리는 우리가 찾아야 해요.”
“…….”
“공통적인 단서는 여인이라는 건데…….”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빤히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의문점이 불쑥 튀어나왔다.
“예전에 검은 독수리가 수왕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멈칫했다.
“듣다니요?”
“카르티아 공에게서요.”
“카르티아 공?”
이클리트의 어조에 경계가 섞이자, 아멜리아는 손을 저었다.
“카르티아 공작령의 대도서관을 가고 싶었거든요. 거기서 알게 됐죠. 게다가 카르티아 전 공작이 수왕을 마지막으로 봤다고 했어요. 아, 그러고 보니 수왕도 여인이었데요.”
말을 내뱉은 아멜리아는 뭔가 기분이 묘해졌다.
“근데 대공 전하. 홍안의 계승자가 수인이라고 하셨죠. 반인반수는 홍안을 가질 수 없다고요. 그런데 왜 대공 전하께서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은 독수리가 수왕이라고 해도, 저는 수왕과 관련이 없습니다. 제가 홍안인 이유는, 아마도 이런저런 실험 때문에 수인의 힘을 짙게 물려받은 듯합니다. 다른 반인반수와 달리 힘이 강한 것도 그런 이유고요.”
이클리트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냐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은 그저 그런 반인반수가 아닙니다. 고귀한 수인이에요. 수왕의 피를 이어받은······.’
‘아니. 말도 안 돼. 수왕과 관련 있을 리 없어.’
이클리트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지하실에 가두고 어떻게든 열쇠로 만들기 위해, 제힘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황제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는데, 어쩐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자신이 지하실에 있었을 때. 기억이 많이 왜곡되거나 삭제된 것 같았다.
‘갑자기 모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그렇고.’
혹시, 그 여인도 그 뱀의 일족과 관련 있는 걸까?
“대공 전하. 저기…….”
아멜리아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누군지는 아시나요?”
하지만 생각보다 이클리트는 덤덤하게 답했다.
“모릅니다. 태어나자마자 지하실에 갇혔으니까요. 아마 저를 낳은 수인은, 폐하께서 흔적이 남지 않도록 죽였을 겁니다.”
이클리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도, 어머니에 대한 감정도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어린 시절이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대답에 자꾸만 다른 생각이 위험스럽게 떠올랐다.
‘수왕이 여인이라고 했어. 설마…… 아니. 아니야. 아닐 거야.’
카르티아 공이 보여준 책에서 수왕은 정말로 자연 그대로의 지배자라고 봤다. 그런 수왕이 황제에게 잡혀서, 이렇게 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아멜리아는 뭔가가 찜찜했다.
‘수왕을 본 사람과 대공 전하가 비슷한지, 그것만 물어보면 딱 인데.’
하지만 마지막으로 봤다는 분은 돌아가셨으니. 그러고 보니, 대체 전 카르티아 공작은 왜 누군가 수왕에 관해서 묻거든, 알려달라는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 아멜리아는 이제 와 그 점이 묘하게 걸렸다.
‘솔라에서 수인을 묻는 자는 없다. 묻는다면, 수인과 엮여 있다는 뜻이지. 나도 세인트나 대공 전하 때문에 혹시나, 하고 너무 궁금했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전 카르티아 공작이 뭔가 알려주고자 했던 게 있었다는 걸까?
‘다시 카르티아 공을 만나봐야 하나…….’
하지만 일단 거기까진 너무 물증도 없이 선을 넘은 것 같아서. 아멜리아는 잠시 생각을 접어두었다.
“아직 폐하께서는 대공 전하께서 수인의 힘이 발휘된 사실을 모르시죠?”
“모릅니다. 그래서 북부로 버렸으니까.”
“그럼 절대 들키면 안 돼요. 알게 되면, 폐하께서 이제 와 대공 전하께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아멜리아는 간절한 어조로 말했지만, 이클리트는 조금 말을 돌렸다.
“하지만 부인을 구하려면 뭐든 할 겁니다. 내가 가진 이 힘에 처음으로 감사하기까지 하니까.”
“안 돼요. 그러다가 폐하께서 대공 전하를 데려가면 어떡해요. 나는 대공 전하를 보내고 싶지 않다고요.”
“부인…….”
이 상황에서, 절대로 내색하면 안 되지만. 이클리트는 살짝,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내 명령, 꼭 지켜줘요. 대공 전하를 위험하게 하거나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해요. 대공 전하는 내 거니까, 내 거 잘 지켜달라고요.”
결국, 이클리트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아멜리아의 손등에 짙게 입을 맞추었다.
“그대의 말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이클리트의 말에도 아멜리아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지금까지 황제의 태도를 보면, 이클리트의 힘을 알게 되는 순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설령 열쇠가 아니더라도 곁에 두고 이용할 것 같다고.’
문득, 아멜리아는 살짝 사색이 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근데 에드조프. 그는 대공 전하가 반인반수라는 사실을 아는 건가요?”
그 밀주를 마셔보라고 한 것부터 시작해서. 항상 이클리트를 보며 괴물이라는 소리를 했다. 짐승이라고. 저주받았다고. 내게 그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폐하께서 말씀하신 건가요?”
“아닐 겁니다. 저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밀주의 주인이 말해준 게 아닐까요? 에드조프의 뒤에 밀주의 주인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처음으로 에드조프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밀주의 주인이 여인이라…….”
아멜리아는 조금 단순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에드조프의 주변에 여인이 누가 있지?’
“메사리나? 황후 폐하?”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자, 이클리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모.”
“네?”
아멜리아가 고개를 든 순간,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어졌다.
“에드조프를 키워준 유모가 있습니다.”
유모라는 말을 입에 담은 순간, 이클리트는 세인트가 말한 유모라는 말이 떠올랐다.
‘황궁에. 뱀이 두 마리······ 두 마리 있어······.’
‘유모. 그 여자는, 유모······ 악!’
대체 유모가 무슨 뜻일까, 싶었는데. 어쩌면 그 여우가 아주 결정적인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에드조프의 유모.’
그때, 노크와 함께 이사나가 들어왔다. 이사나는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웠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클리트는 묘한 시선으로 이사나를 응시했고, 아멜리아는 그런 이사나를 다독였다.
“그건 괜찮은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어디 위험했던 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었고, 부주의였습니다. 안 그래도 가주님께 안 좋은 일도 있었는데…… 징계는 달게 받겠습니다.”
“루베르와는 얘기가 좋게 잘 끝났어요. 밀주에 대해서, 책임자가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이사나 경을 찾았던 거고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괜찮았으니까.”
“가주님!”
이번엔 마미가 아멜리아를 찾아서 들어왔다.
“남부 가는 일정 좀 확인해주시겠어요? 이거랑, 이거랑…….”
“아, 그건 카마리 경한테 부탁했는데. 같이 가서 확인해보자. 잠시 다녀올게요.”
아멜리아는 마미와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쩌다보니 이클리트와 이사나, 단둘만이 어색한 공기를 삼키고 있었다. 이사나는 이클리트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이만 가보…….”
“부인은 묻지 않았으나, 나는 묻지. 그 개인적인 일이 뭐였는지.”
이클리트의 날 선 물음에 이사나는 멈칫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처럼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가주를 지켜야 할 부단장이, 가주의 곁을 무단으로 비우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얼버무린 일. 아니면, 더 명확하게 말해볼까? 주인의 성격을 알고, 제대로 묻지 않을 거라 판단하며 그렇게 넘어가고자 하는 그 일이 뭔지. 대공인 나는 물어야겠는데.”
게다가 정확하게 이사나의 속내를 꿰뚫은 어조에 이사나는 굳어진 입매로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이클리트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사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어느 때도 자신감 넘치는 부단장의 모습이 아니군. 나한테 건방질 정도로 마주 보던 모습도 아니고.”
“……약해졌나 봅니다. 북부니까요. 남부 사람인 제가 머물기엔, 역시 혹독한 곳이네요.”
“그런 건가? 북부는 정말로 처음이다? 지난번, 뱃멀미도 안 하는 것 같던데.”
이사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서 말을 이었다.
“부단장으로서 그 정도 정신력은 있습니다.”
이클리트는 잠시 고개를 돌려서는 어떤 꽃에 시선을 두었다. 화병에 꽂힌 몹시 평범한 새하얀 꽃이었다. 이클리트는 움직이는 척, 일부러 그걸 떨어뜨렸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음에 이사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클리트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떨어뜨렸군. 루베르가 부인에게 가져온 선물이었는데.”
이사나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서 곧장 꽃을 주워 올렸다.
“영혼을 기리는 3일 동안, 내내 잘 피어 있어야 합니다.”
“…….”
“그래야 스켈레톤 플라워가 수호자의 꽃으로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클리트는 이사나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전혀 몰랐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사나가 재빨리 접견실을 나서고, 이클리트는 이사나가 주워놓은 새하얀 꽃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아멜리아가 다시 돌아왔다.
“어머, 이사나 경은 돌아갔나요?”
“네.”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뭔가, 평소랑 분위기가 달라 보였죠?”
“……달랐죠.”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제가 실수로 꽃을 떨어뜨렸습니다. 제대로 관리하려고, 집무실로 가져온 건데. 미안해요.”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에게 보이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꽃이 무슨 꽃인데,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세요?”
“루베르가 선물한 스켈레톤 플라워입니다.”
“네? 하지만 아이냑이 준 거랑 너무 다른데…….”
아멜리아는 이게 루베르가 준 꽃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클리트는 꽃에 물을 뿌렸다. 그러자 꽃잎이 완전히 투명해지면서, 처음 보았던 유리꽃으로 변했다.
“이 꽃의 특징입니다. 물이 묻어야, 꽃잎이 투명해지는 거죠.”
“와…… 신기하네요.”
이 꽃은 남부에선 자생하지 않기에, 오직 북부 사람들만 아는 꽃이다. 이클리트는 싸늘한 눈빛으로 꽃을 응시하며, 이사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눈치챘어. 그 자리에 없었으면서도, 이 꽃의 역할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사나 블란. 그는 북부에 온 적이 있다. 게다가.
‘루베르를 알고 있다. 루베르를, 피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