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해와 달의 의미2022.02.04.
‘열쇠가 세상에 나타날 거야.’
소냐는 차마 아멜리아 앞에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을 되뇌었다.
‘열쇠의 재료가 충분해졌으니.’
하지만 속내는 숨기면서, 열쇠의 본질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
“시간의 숲의 열쇠. 평범한 열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저 사람들이 편의상, 봉인된 숲을 푸는 힘이기에 열쇠라고 부르지요.”
“역시, 소냐는 뭔가를 아는구나.”
“아니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들 중요한 걸 잊고 있어요. 정령들이 왜 시간의 숲을 봉인했는지.”
“특별한 수인이, 그 열쇠가 된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엄청 특별하진 않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평범한 수인이자, 인간일 수도 있지요.”
“그게, 무슨?”
“해와 달이 하나가 될 것이다.”
소냐의 기묘한 말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면 이미 카르티아 공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 해와 달이라고 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소냐는 아는 거야?”
“해는 인간이고, 달은 수인을 뜻합니다. 해는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달은 수인에게 영향을 주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의미에 아멜리아는 소냐의 말을 천천히 더듬었다.
“해가 인간이고, 달이 수인이라면. 하나가 된다는 건. 설마 반인반수?”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열쇠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건, 이클리트가 그 열쇠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해와 달에 가장 가까운 이들의 온전한 화합.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 아닐까요?”
“사랑이라니…….”
아멜리아는 점점 소냐의 말에 생각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소냐의 말도 여기서 멈춰버렸다.
“저도 더는 알지 못하네요. 더 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가주님.”
소냐는 다시 한번 아멜리아의 심장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가주님의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답니다. 그걸 기억하세요.”
“소냐…….”
소냐는 아멜리아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서, 홀연히 나타났던 처음처럼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메마른 숨을 삼키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네.’
제비꽃에 닿았던 그녀의 손가락에 이클리트의 얼음 목걸이가 걸려들었다.
‘아니, 이미 나도 알고 있었을지도. 그래서 자꾸만 조급해지는 거야.’
하루빨리 다섯 공작가의 심판을 통과해서 대공 전하를 황제로 세워야 하니까. 루베르와의 약조 또한 지켜야 하니까. 그전에 에드조프.
‘밀주의 주인과 함께 에드조프가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그 또한 밝혀내야 해.’
*** 아멜리아가 서둘러 광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람들 틈에, 이클리트는 보이지 않았다.
‘뭐지? 설마 먼저 돌아가신 건가?’
그때, 아멜리아를 발견한 마미가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왔다.
“가주님, 가주님!”
“아, 마미.”
“한참 찾았어요!”
“미안해. 잠깐 누굴 만나느라……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가주님을 계속 찾으셔서. 일단 둘러대려고, 먼저 대공가로 가셨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독주에 진 것 같아요.”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공 전하께서 독주에 진 것 같다고?”
“그게, 애매해요. 계속 가주님 이름을 부르시다가, 제가 가주님이 피곤해서 먼저 대공가로 돌아가셨다고 둘러대니까, 순식간에 가셨거든요.”
“그럼 얼른 나도 가야지!”
아멜리아는 그녀를 호위하는 티어들과 함께 서둘러 대공가에 당도했다. 대공가에는 카힐로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반겼다.
“가주님, 오셨군요.”
“대공 전하께서는?”
“오셔서 엄청 찾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제가 직접 광장으로 가려고 했는데…….”
“진짜 취하신 거야? 독주에 지셨어?”
“대공 전하께서 정말로 기분이 좋으셨나 봅니다.”
“응?”
“저렇게 헝클어진 모습, 남에게 보일 만큼. 남에게 약한 모습을 드러낼 만큼. 정말 기분 좋으셨나 봐요.”
카힐로의 말에 아멜리아는 뭔가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갑자기 나도 대공 전하가 엄청 보고 싶네.”
아멜리아가 서둘러 침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 이클리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계시지? 설마 다시 광장으로 가신 건 아니시겠지!”
그녀가 당황해하면서 걸음을 돌린 순간, 달빛이 스민 바닥에 천사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아멜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서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환한 보름달이 떠오른 창가에, 이클리트가 검은 날개를 펼친 채 서 있었다.
“대공 전하.”
그녀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미안해요! 많이 걱정했죠? 사실 거기서 소냐를 만나서…….”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이클리트가 그녀를 와락 안아주며 발그레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계속 찾았어요, 부인.”
그리움이 한껏 담긴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미안해요, 늦어버렸어.”
“아닙니다. 안 늦었어요. 내가 이렇게 찾았잖아.”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꼭 껴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우리 부인. 나의 아내. 나의, 아멜리아…… 내가 이렇게 찾았어.”
그의 목소리에 젖어 든 취기와 코끝으로 독주의 알싸한 향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상하게, 그 향마저도 달게 느껴졌다. 지난번, 대공 전하께서 자신에게서 참을 수 없는 향이 난다고 했는데. 그녀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을 수밖에.’
한참 동안 아멜리아를 안고 있던 이클리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웃었다. 그리고 몹시 자랑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응?”
“거기 있는 독주를 전부 마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진정한 남편이 되었습니다.”
아멜리아는 일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이게 이렇게 진지할 일이란 말인가!
“나는 언제나 대공 전하의 아내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요.”
“그래도 이겼으니까, 상을 줘요.”
아멜리아는 곧장 이클리트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췄다.
“제일 좋은 거 줬어요.”
“맞아. 아멜리아 당신이, 당신이 제일 좋아.”
한없이 허물어지는 그의 미소에 아멜리아는 자꾸만 온몸이 간질거리면서,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술 엄청 약하신 거 알죠? 그러니까 내 앞에서만 마셔요. 이런 모습, 내가 다 독차지하고 싶으니까.”
몇 번이고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이클리트가 강하게 붙잡고서 신비롭게 빛나는 눈을 마주했다.
“당신 앞에서만 이렇게 약해질 수 있어요.”
“…….”
“당신에게 사랑받는, 이 순간만큼만…….”
그가 그녀를 당겨서는 더 깊이 입술을 삼켰다. 끊임없이 파고드는 그의 집요한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그에게 온몸을 맡긴 채, 조금은 독한 그의 숨을 연거푸 삼켰다.
그녀는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소냐의 말을 몇 번이고 뽑아냈다.
‘대공 전하의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을 거야. 더없이 아름다운 세상으로 남길 수 있게 할 거야. 설령 내가 사라져도. 당신이 이제 내 세상이 되어야 하니까.’
이 사람과 자신이 오랫동안 이어질 방법. 이 사람을 절대로 외롭지 않게 지켜줄 방법. 순간,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낯선 단어를 떠올렸다.
‘……아이?’
*** 에리얼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음습한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 지하실은 한때 이클리트가 갇혀 있었던 그 미궁이었다. 그 미궁 속에 역시나 에리얼과 같은 로브를 쓴 이가 서 있었다. 처음, 에리얼이 어린 이클리트를 데려왔을 때 함께 있었던 사람. 에리얼이 로브를 쓴 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체자렛 백작님.”
그의 속삭임에 고개를 든 이는 바로 아젠 체자렛 백작이었다. 아젠은 조금 두려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왜 날 여기로 다시 데려온 거지? 왜 날 여기 가둬두고 있는 것이냐.”
에리얼은 아젠의 말에 냉소를 그렸다.
“가둬두다니요. 어감이 이상하네요, 백작님. 그저 다시 돌아오신 거죠.”
“돌아오다니…….”
“백작님의 일이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에리얼의 말에 아젠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냐. 이미 다 끝났잖아. 클리오 대공은 시간의 숲의 열쇠가 아니었다고. 그때 그렇게 밝혀져서, 모든 계획은 중단된 거잖아!”
“하지만 요즘 들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폐하께서 기대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났으니 그 힘이라는 것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아젠은 에리얼의 말에 숨을 멈췄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에리얼은 자신의 품에서 작은 술병을 꺼냈다.
“이번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반인반수를 찾아내는 밀주입니다. 이미 들어보셨지요?”
“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다니요. 백작님도 다 아시고, 급하게 폐하의 눈을 피해 다른 영지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까?”
“도망이라니!”
“처신 똑바로 하세요, 백작님. 폐하께서 봐주시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백작님은 이 일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이미 전부 한배를 탄 겁니다.”
에리얼의 섬뜩한 말에 아젠은 이를 꽉 깨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아스란의 그 끔찍한 계획에 가담했던 유일한 이는 바로 아젠이었다. 남에게 말한 적은 없었으나, 그는 마나에 관심이 많아서 한때 다양한 공부와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걸 아스란에게 들켜서, 은밀히 이 계획에 참여했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끔찍했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두 번 다시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밀주 사건과 더불어 반인반수가 수면 위로 오르자, 아젠은 황제께서 또다시 그때의 일을 진행할 것 같아서, 잠시 몸을 피하려다가 붙잡히고 만 것이다. 아젠은 제 손에 억지로 쥐어진 밀주를 응시했다. 에리얼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클리오 대공에게 정말로 반인반수로서의 힘이 없는지, 확인할 겁니다.”
“확인된다면?”
“당연히 다시 이곳에서 열쇠로 만들어야죠.”
“하지만 이제 그분은 피오레 공작가의 사람이지 않나.”
“그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어쩌면,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미망인이 되실 수도 있겠지요.”
“…….”
“하지만 공작 각하시니, 불행하진 않을 겁니다. 게다가 백작님의 딸이지 않습니까? 이 결혼을 엄청 반대하고, 지금도 딸의 얼굴도 보지 않고 있다고 하던데. 이참에 두 사람을 이혼시키면, 백작님께도 손해는 아니지요.”
에리얼이 자리를 떠나고, 아젠은 밀주를 꽉 움켜쥐고서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게. 그런 괴물 대공과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 후지아는 메사리나를 붙들고 오랜만에 바깥나들이에 나섰다.
“샬롯 부인 알지? 티파티에 초대받았단다. 이번에 살롱을 아주 멋스럽게 고쳤다는데. 얼마나 멋지게 고쳤는지 보고, 우리도 손보도록 하자. 체자렛 백작가의 살롱이 그것보다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니?”
하지만 메사리나는 후지아의 속 편한 얘기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현재, 아젠이 황궁에 가서는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지? 느낌이 좋지 않은데…….’
“샬롯 부인의 살롱에 새로운 마법 도구도 있겠지? 우리도 절대로 지면 안 돼. 하지만 요즘 마법 도구를 구하기 영 힘들단 말이지. 메사리나, 네가 아는 장인 없니? 메사리나. 메사리나!”
생각에 잠겨 있던 메사리나는 후지아의 신경질적인 어조에 고개를 들었다.
“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니?”
“어머니. 혹시, 아버지한테도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쿵-!
“뭐, 뭐야 이게 도대체!”
갑자기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급하게 멈춰버렸다. 메사리나는 짜증을 내는 후지아를 다독이고서 문을 열려고 했으나, 하녀가 먼저 급히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야?”
후지아의 앙칼진 목소리에 하녀가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이상한 맹인이 백작님을 만나겠다고 마차로 뛰어들어서…….”
“하?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당장 치워.”
“아주 막무가내예요. 클리오 대공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서.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와 이혼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하녀의 말에 후지아는 기가 막힌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백작가의 영애라니. 영애는 우리 메사리나밖에 없는데. 누가 또 영애라는 거야!”
“잠깐. 클리오 대공 전하의 비밀?”
메사리나는 그 한 마디에 멈칫했다.
“신경 꺼라. 그런 하찮은 것이 뭘 안다고!”
“어머니, 잠시만 여기 계세요.”
“뭐? 메사리나.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뭔가 기분이 묘해져서는 하녀와 함께 마차 밖으로 나가, 그 맹인을 만났다.
“네가 클리오 대공 전하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는 거지?”
메사리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맹인을 본 그녀가 흠칫했다. 그의 동공이 완전 하얗게 변해서는, 무척 기분 나쁜 얼굴을 띠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나는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 메사리나 체자렛이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뭘 알고 있는지나 말해.”
맹인은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라는 말에 화색이 되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제, 제가 체자렛 백작가에 엄청난 정보를 드리는 겁니다. 클리오 대공 전하, 그자는 괴물입니다.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만들다니?”
“제 눈을 이렇게…… 그냥 쳐다만 봤을 뿐인데, 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제가. 제가 마지막으로 봤거든요. 그 섬뜩한 눈을. 맞아요. 홍안. 저주받은 홍안이었습니다. 클리오 대공은, 수인이라고요!”
그는 이클리트가 지난날, 과수원 사건 때 갑자기 사라진 아멜리아를 찾고자 자신도 모르게 폭주하여 눈을 멀게 만든, 그 밀거래 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