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황위를 향한 서막2022.02.11.
아스란이 황좌에 앉으면서, 회의는 시작되었다. 지난번 정기적인 대회의가 아닌 임시 회의로 안건은 밀주 사건의 배후였다. 현재 이 자리엔 밀주 사건의 책임자인 알렉드라와 에드조프가 있었고, 신성회와 장로회가 지난번처럼 거울로 된 벽에서 지켜보았다. 다섯 공작가중 역시나 루베르 가주는 참석하지 않았고, 카르티아 공작도 이번엔 불참했다. 아스란은 이번 회의를 요청한 루시아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자, 헤스틴 공. 이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면서 회의를 열어달라고 한 말에 책임을 지겠지?”
“물론이옵니다, 폐하.”
루시아는 조사차 가지고 있었던 밀주를 꺼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밀주의 시작이 북부라는 소문 때문에, 루베르와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곤경에 처하여, 제가 조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밀주의 시작은 북부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저를 인정하였듯, 제가 모르는 독은 거의 없습니다. 이 밀주에 섞여서 육식계 동물에게 광폭을 일으키고, 반인반수를 찾아내는 독은 뱀의 독입니다.”
루시아의 한마디에 에드조프의 눈빛이 짧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의연한 척하기 위해 한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것도 수인, 뱀의 일족의 독입니다. 하지만 그 뱀은 북부에서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 북부의 짓으로 꾸민 것이지요.”
알렉드라는 루시아의 말에 냉소를 지었다.
“수인, 뱀의 독이라니.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루시아는 자신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알렉드라의 말에 아까와는 달리 차갑게 맞받아쳤다.
“조사한 걸 넘겨드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아니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면 포르티셰 공은 북부의 짓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까?”
“뭐?”
“없으면서, 함부로 발언하십니까? 혹시. 북부의 짓으로 꾸미고 있는 누군가가 포르티셰 공입니까?”
“어디서 그런 모함을!”
“포르티셰 공이 먼저 모함한 것 같아서요. 나의 실력은 폐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제 말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루시아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아스란을 응시하자, 아스란은 엷은 미소를 띠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 헤스틴 공의 실력을 의심할 수 있을까. 만약, 정말 뱀의 독이라면. 그래. 북부에서는 살 수가 없지.”
알렉드라는 루시아를 인정하는 아스란의 발언에 한껏 입술을 깨물었다. 이 이상 나서게 되면, 황제 또한 믿지 못하게 되는 거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솔라에 사라졌던 수인과 더불어 반인반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 밀주에 쓰인 것도 수인의 것이니까요.”
루시아의 말에 아스란은 이클리트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알렉드라는 또다시 참지 못한 채, 아스란에게 나섰다. 알렉드라로서는 이번 기회를 허무하게 놓칠 수 없었다.
“폐하, 그렇다고 북부를 완전히 제외할 수 없습니다. 반인반수와 더불어 수인까지. 그 괴물들이 솔라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루베르와 연관 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루베르는 아닙니다, 폐하.”
그때, 루시아의 발언 순간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나섰다. 다른 건 몰라도 더는 루베르를 이번 일에 끌어들이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피오레 공은 또다시 루베르를 옹호하는 것인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이번에 북부에서 루베르의 장로를 만났습니다.”
아스란은 아멜리아의 말에 흥미롭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켜보던 장로들과 신성회도 웅성거렸다. 루베르의 장로 또한 가주처럼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호오. 피오레 공이 루베르와 그만큼 친해진 모양이군. 그들이 마음의 문을 이리 쉽게 열어준 걸 보니 말이야. 그래서. 루베르와 관련 없다는 근거는 뭐지?”
어쩐지 가시 돋친 아스란의 말에 아멜리아는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솔라 제국민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 반인반수를 제압할 장치를 루베르가 만들기로 했습니다.”
“제압할 장치?”
“루베르는 마법 도구를 만드는 장인입니다. 그들이 힘을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마법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시면, 그걸로 반인반수를 안전하게 제압하여, 제국민을 보호하고 이 밀주를 이용해 반인반수를 이용하는 그 배후도 밝혀낼 것입니다.”
아멜리아는 에드조프를 노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루베르는 솔라를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겁니다. 무턱대고 아무 증거 없이 그들을 모함할 수 없고, 반군으로 몰 수 없습니다. 그들을 솔라 제국민으로 인정하신 것은 폐하십니다. 그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아멜리아는 자꾸만 격하게 헝클어지는 감정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비록 황제를 믿지 못하고, 에드조프 역시 그 밀주의 배후와 한배를 타고 있으며 알렉드라는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루베르를 몰아낼 작정이지만.
‘거기에 휘둘리면 안 돼. 거짓은 거짓일 뿐이야. 반드시 진실을 찾아서, 제대로 그 죄를 밝혀내야 해.’
“반인반수 또한 이용당하는 것일 뿐.”
아멜리아는 알렉드라와 제대로 마주했다. 더는 지난번처럼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야만적인 자세로 그들을 감금하고, 고문하여 이번 일을 해결해선 안 될 것입니다.”
아멜리아의 말에 일순 홀 안의 공기가 무겁게 맴돌았다. 다른 것보다 루베르가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말이 상당한 충격을 준 듯했다. 이렇게 되면, 루베르도 클리오 대공을 지지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하, 하하하하!”
그때, 이 적막한 공기를 깨뜨리고서 아스란의 웃음소리가 기이하게 울렸다. 아멜리아는 그의 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큼 심장에 소름 돋게 박히고 있었다.
“예전부터 피오레 공은 많은 이들이 믿는군. 그대에게 끌리는 뭔가가 있는 건가?”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제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리고 제 눈에 루베르는 죄가 없습니다.”
알렉드라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초조해졌다. 루베르가 마법 도구를 만드는 장인이라니. 지금껏 그런 힘을 음흉하게 감추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 그 본성을 드러내겠다니.
‘그들이 솔라에서 날뛸 기회를 줄 수 없다.’
“폐하. 이제 와 루베르가 마법 도구 장인이라니. 계속 숨기던 걸 갑자기 이런 상황에 드러내는 것이 뭔가 이상합니다.”
알렉드라는 완강한 어조로 아스란에게 반대를 외쳤다.
“마법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돕게 되면 분명 환심을 사서, 방심하게 만든 다음, 그걸 프리메 제국에 몰래 넘길 수도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포르티셰 공, 그건 억측입니다. 루베르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겁니다.”
“그들을 대체 어찌 믿지?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이런 일이 발발하니 움직인다니. 난 절대 믿을 수 없다.”
“포르티셰 공은 위험한 발언을 삼가는 게 좋겠군.”
그때, 아스란이 아멜리아가 아닌 알렉드라의 말을 누르자, 모두가 멈칫했다.
“폐하?”
에드조프 또한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아스란을 응시했다.
‘뭐지. 갑자기 무슨 속셈이지?’
처음으로 이클리트의 눈빛에 의아함과 불길함이 스쳤다. 절대로 황제가 자신을 위해서 저런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피오레 공의 말처럼 루베르는 솔라의 제국민이자, 다섯 공작가 중 하나지. 우릴 위한 행동인데, 선의를 악의로만 받아들여도 곤란해.”
“그렇다면 폐하, 북부의 혐의를 벗겨주시겠습니까? 아니. 벗겨주실 것을 대공으로서 청합니다.”
마침내 이클리트가 직접 아스란 앞에 나섰다. 이클리트가 이런 자리에 참석한 것도 놀라운 일인데, 직접 대공으로서 발언까지 하니, 홀 안은 다시금 날카로운 시선으로 말들이 술렁였다. 에드조프는 아스란 앞에 서 있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솔라리스 황궁에서, 저 자식이 저렇게 멋대로 서 있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스란은 제 앞에서 당당하게 요청하는 이클리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클리오 대공은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으로서, 헤스틴 공과 루베르를 적절히 움직여 이번 일을 잘 조사했군. 그래. 결과적으로 보면, 북부의 혐의는 벗겨지는 셈이지.”
“하지만, 폐하!”
알렉드라는 자신도 모르게 건방지게 앞으로 나섰으나, 아스란이 차갑게 그를 막았다.
“포르티셰 공은 지난번 로얀 댐에서 붙잡은 반인반수에게서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북부에서 철저히 조사했고, 아무 혐의가 없다는 걸 먼저 밝혀냈으니. 이번 밀주 사건은 북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부에서 다시 조사해야겠군. 수인과 반인반수가 움직이면, 제국민들의 불안이 커질 테니까. 바스티얀 대공.”
아스란이 에드조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예, 폐하.”
에드조프는 굳어진 표정으로 이클리트의 옆에 섰다.
“포르티셰 공과 함께 끝까지 철저히 조사하도록.”
“물론이옵니다, 폐하.”
“그리고 클리오 대공.”
아스란의 시선이 다시금 이클리트에게 향했다. 아멜리아는 긴장된 시선으로 이클리트와 아스란, 두 사람을 응시했다.
‘폐하는 지금까지 남부에서의 일은 모두 에드조프에게 맡겼어. 대공 전하에겐 남부 일은커녕, 그 어떤 권한도 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대공 전하는 항상 황위 계승에서 밀렸던 거야. 그렇다면 지금은…….’
모두의 시선이 이클리트와 아스란을 향했다.
“클리오 대공 역시 진짜 범인을 잡아서, 북부가 더 완벽하게 혐의를 벗을 수 있도록 하라.”
“하아…….”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탄성을 내쉬었다. 이클리트와 에드조프 역시 동시에 온몸이 굳어졌다.
아니, 홀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멈췄다. 에드조프와 똑같은 임무를 이클리트에게 준 것은. 클리오 대공에게도 황제가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결국, 아스란이 이클리트와 에드조프를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맞붙게 만든 것. 솔라 제국의 황제는 핏줄이 아닌 오로지 황제의 자질과 능력뿐. 이번에 다섯 공작가와 더불어 모두에게 황제의 자질을 제대로 보여준다면, 심판에서 선택받아 황위에 오를 것이다. 서로서로를 물어뜯어, 살아남아야 하는 것. 마침내, 황위를 향한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아스란이 홀을 빠져나가고, 남겨진 이들은 아스란의 결정에 대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결정은 곧 전령을 통해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알렉드라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잠시 멍했으나, 눈에 더욱 힘을 주고서 에드조프에게 다가갔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바스티얀 대공 전하.”
에드조프는 알렉드라의 말에 사나운 표정을 띠었다.
“제가 긴장해야 한다, 이 말입니까?”
“클리오 대공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절대로 빈틈을 줘선 안 됩니다. 하찮은 벌레라도 거슬리면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알렉드라는 이클리트를 서슴없이 벌레 취급했다. 그만큼, 그는 절대로 이클리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에드조프는 알렉드라를 보며 애써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포르티셰 공이 나와 함께하는데, 두려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똑같을 겁니다.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내가, 유일한 황자이고 황위 계승자입니다.”
알렉드라는 에드조프의 각오 앞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티아 공에게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결국은 심판에서 누가 더 많이 다섯 공작가의 선택을 받느냐, 하는 싸움이니.”
알렉드라는 이클리트와 아멜리아, 루시아를 보며 읊조렸다.
“루베르 가주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피오레 저 계집이 아무리 루베르에 공을 들여도,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독이 든 성배에 지나지 않지요. 제가 그리 만들 테니까요.”
표수가 반반이 되는 경우, 장로회와 신성회도 가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황후의 태생인 바스티얀 대공을 차기 황제로 택할 것이다. 장로회와 신성회야말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니까.
‘오히려 잘된 일이야.’
알렉드라는 이참에 신성회와 장로회를 끌어들여, 루베르를 완전히 몰아내고 헤스틴 가문과 피오레 가문까지 그 권력을 약화시켜, 다섯 공작가 중 절대적인 권력으로 군림할 계획을 떠올렸다.
‘맞아. 이번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오직 포르티셰 공작가만이 솔라 제국의 완전무결한 공작가가 되는 것이다.’
에드조프는 알렉드라의 표정에서 위험한 속내를 읽었으나, 지금은 저자의 손을 잡고 있어야 했다.
‘폐하께서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달라지는 건 없어. 아니. 달라질 수가 없지.’
이클리트와 황위를 두고 팽팽해지는 것 자체가 모욕이었다. 저 괴물이 황제가 되다니.
‘네놈의 그 구역질 나는 냄새가 이 황궁에 더는 퍼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자신의 무기가 저 자식을 점점 더 괴물로 몰아세울 것이다. 에드조프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도, 아멜리아도. 네가 아닌 내 것이다. 내가,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