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킹메이커2022.02.14.
이클리트가 카힐로와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홀을 빠져나온 루시아와 아멜리아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루시아는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멜리아를 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저렇게 나올 줄은 몰랐네요.”
아멜리아는 루시아의 말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황위 계승자로서 팽팽해지는 건,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어요. 폐하께서는 계속 바스티얀 대공 전하를 밀어주고 계셨으니까.”
물론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아스란의 속내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다른 뭔가가 있어. 그건 절대 대공 전하께 좋은 건 아닐 거야.’
오히려 황제가 대공 전하께 흥미를 느끼는 것이 불안했다. 이로써, 자신과 대공 전하는 피오레로 돌아가지 못하고, 잠시 솔라리스에 머물게 되었으니까. 그건 결국, 황제의 눈앞에 묶인 것과 마찬가지다.
“설마. 대공 전하의 힘을 알아차린 건 아니겠죠.”
아멜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루시아에게 불안한 속내를 비치자, 루시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이미 루시아는 아멜리아가 이클리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 알았다. 북부에서 아멜리아가 따로 루시아에게 말했었다. 루시아는 이클리트가 스스로 반인반수라는 걸 밝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멜리아의 반응에 더 놀랐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했으니까.
‘대공 전하는 제게 그냥 대공 전하예요.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자신조차 처음엔 대공 전하를 괴물 취급했는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말간 눈동자와 진심 어린 말에 루시아는 확신하고, 선택을 굳혔다. 이 자리에 나서서, 대공 전하를 지지하겠다고. 그를 황제로 만들겠다고 말이다.
‘이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은, 대공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는 거니까.’
루시아는 언제나 두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이 솔라 제국도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자에게만 태양신의 축복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태양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제국으로 말이다.
‘그 사람이, 바라던 것이기도 했지.’
루시아는 순간 죽은 남편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속내가 있더라도, 우린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 해요.”
“헤스틴 공…….”
“내가 예전에 그랬죠? 강해져야 한다고. 당신이 흔들리면 안 돼요. 앞으로 대공 전하를 흔들려는 이들이 더 많을 테니까. 대공 전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에 더더욱. 이번 밀주 사건도 대공 전하를 겨냥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잖아요.”
“…….”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이번 일이 중요해요. 이번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면, 제국민의 민심을 얻게 될 거예요. 그 민심은 대공 전하를 받치는 힘이 될 테죠.”
루시아는 만약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루베르 가주를 찾지 못하게 돼서 심판의 선택이 신성회와 장로회로 넘어가게 되더라도. 제국민의 민심이 확고하면, 그 민심을 완전히 무시하진 못할 거예요.”
하지만 루시아의 말에 아멜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신성회와 장로회를 끌어들여선 절대로 안 돼.’
장로회는 몰라도, 신성회를 겪어본 아멜리아로서는 그들을 절대 믿지 않았다.
‘민심을 잃더라도,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에드조프를 택할 거야. 오직 선택받은 귀족만이 태양신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신념을 절대로 깨뜨리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렇기에, 카르티아 공은 그렇다고 쳐도 반드시 루베르 가주는 찾아야 했다. 찾아서, 황제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심판의 킹메이커는.
‘루베르 가주야.’
*** 루시아가 자리를 떠나고, 이클리트를 기다리는 아멜리아의 표정은 자꾸만 어둡게 가라앉았다.
‘헤스틴 공의 말처럼 내가 강해져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다른 건 다 괜찮지만.’
황제가 대공 전하를 데려갈까 봐. 빼앗아갈까 봐. 또다시 그를 상처입힐까 봐. 그게, 가장 무섭다.
“부인.”
그때, 아멜리아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자 뒤에서 파고드는 손길과 함께, 향기로운 제비꽃다발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게, 갑자기 뭐예요?”
이클리트는 여전히 그녀를 꼭 안은 채, 엷은 미소를 그리며 속삭였다.
“오늘 수고했으니까요. 이제 좀 웃으라고. 온종일, 너무 피곤해 보였습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위안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녀의 몸이 조금 경직된 것을 느끼곤,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대공 전하?”
그녀는 자신을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싶었지만, 이클리트는 고민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아멜리아의 눈빛을 단번에 읽었다.
“고작 꽃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네요.”
“네?”
이클리트가 그녀의 뺨을 감싸며, 눈을 마주했다.
“환하게 웃지 못하니까. 나 때문입니까?”
“아니에요! 그냥, 원래도 고민이었는데 더 고민이 커진 거예요.”
“무슨?”
아멜리아는 속내를 감추고, 화제를 돌렸다.
“루베르 가주요.”
아멜리아의 말에 이클리트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그 시선에 하는 수 없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게, 사실은…….”
루베르 가주가 어쩌면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이클리트의 표정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에요. 이래저래 우연이 겹쳐서 혹시나, 하는 거죠.”
“대회의가 끝나고 보내온 편지와 부인의 이름으로 루베르에게 보내진 약이라…… 만약 사실이라면 주변 사람이겠군요. 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주변 사람?”
“부인과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것들도 아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도통 감을 못 잡겠어요.”
게다가 한때는 루베르 왕족이었다면서. 대체 왜 감쪽같이 세상을 속이고, 숨어있는 걸까.
‘내 주변 사람. 내가 아는 사람. 정말 누구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함께 여러 사람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이 임시로 머물게 된 겨울궁에 당도하자, 기다렸다는 듯 카마리가 다가왔다.
“가주님, 대공 전하.”
“카마리 경? 무슨 일이에요?”
“라니가 찾아왔습니다.”
“라니가? 솔라리스에?”
아멜리아는 라니가 대체 왜 솔라리스에 있나, 했다가 순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맞아. 마법 도구 재료 때문에 솔라리스로 간다고 했었지. 거기서 약의 출처를 찾아본다고 했었어.’
설마, 뭔가를 찾은 건가?
“어디 있죠? 지금 바로 만나고 싶은데…….”
“접견실에 있습니다. 혹시, 괜찮으면 저도 같이 만나도 될까요?”
이클리트는 카마리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게 해요. 그럼.”
“감사합니다.”
아멜리아는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서, 이클리트와 함께 접견실로 향했다. 그러자 접견실에서 몹시 불편하게 앉아 있던 라니가 아멜리아를 보곤 안도하며 다가왔다.
“대공 전하, 가주님. 여기서 뵙게 되니 정말로 반갑네요.”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 라니.”
“아니에요. 오히려 북부에서 오시느라 가주님이 더 고생하셨죠. 북부에서 아이냑 장로를 만났다면서요?”
“어떻게 알았어?”
“저도 틈틈이 소식은 전해 듣고 있어요. 다들 놀라던데요? 아이냑 장로가 이렇게 직접 움직일 줄 몰랐다고요.”
“그만큼 루베르도 변화하고 있는 거지.”
“가주님의 도움이 컸죠. 아이냑 장로도 솔라리스로 오는 건가요?”
원래는 솔라리스로 함께 오려고 했으나, 그는 조금 더 늦게 당도할 듯했다.
“폐하께서도 이번에 루베르에게 거는 기대가 크시니까. 반드시 잘 될 거야.”
라니는 황제라는 말에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무튼 반갑기도 하고, 할 말도 많지만 본론부터 말할게요.”
아멜리아는 라니의 말에 긴장된 눈빛을 띠었다. 이클리트 역시 아멜리아에게서 대충 설명을 들었기에, 아멜리아와 같은 눈빛을 띠었다.
“약의 출처는 파악했어요.”
“정말?”
“네. 여기저기 약재상을 뒤져봤는데, 아주 대량으로 구매한 흔적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예상한 대로 본명으로 구입하진 않았어요.”
“그럼?”
“‘루비’라는 이름으로 샀다고 해요.”
아멜리아는 뜻밖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루비?”
이클리트는 라니의 말을 듣자마자 짧게 읊조렸다.
“루비는 붉은 보석을 말하나, 다른 말로 루베우스, 붉다는 의미. 루베르를 뜻합니다.”
아멜리아는 그의 말에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비…….”
그럼 정말로 루베르의 가주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구나.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카마리는 루비라는 말을 되뇌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 라니에게서 루비라는 단서는 얻었으나, 인상착의에 대해선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약재상도 얼굴은 보지 못했고, 그저 물건만 급하게 주문하고 받아 갔다고 했다. 체격조차 로브로 감췄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고.
‘이 정도면 정말 정체를 꼭꼭 숨기고 있는 거네.’
현재 아멜리아는 겨울궁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어쩐 일인지, 조금 분주한 표정으로 잠시 자리를 비웠고, 카마리도 급한 일이 있다며 라니를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솔라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사건투성이네. 그것도 당장 해결하지 못할 것만.”
게다가, 아멜리아는 아주 개인적인 고민 또한 겹쳐 있었다. 침실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마미가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가주님! 오늘 정말 고생하셨어요.”
“고마워, 마미. 마미도 고생했어. 북부에서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일을 시켰네.”
“전 괜찮아요. 아, 식사는 곧 준비될 테고. 목욕물을 받아뒀어요. 그런데 아까 황궁 시녀가 침실을 두 개 준비할지, 물어보던데요.”
“응?”
“저도 단번에 하나면 되지 않을까, 했지만. 두 분 다 북부에서 돌아오시자마자 피곤한 일이 많으셨잖아요. 그래서 오늘 하루는 따로 침실을 마련해도 되지 않을까, 해서. 일단 보류했거든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침실을 따로 준비할까요?”
만약, 예전이었다면 이클리트를 배려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대공 전하와 함께 쓸게.”
마미는 아멜리아가 직접 저런 대답을 할 줄 몰랐기에, 살짝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침실을 하나로, 다시 제대로 준비할게요.”
“부탁해.”
마미가 돌아서자, 아멜리아는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올랐다. 이건 설레는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닌 다른 의미로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 아멜리아의 개인적인 고민. 불현듯 떠올랐으나, 점점 욕심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었다.
‘대공 전하께선 앞으로 점점 황위에 가까워지실 거야.’
모든 일이 잘 풀려서, 그가 차기 황제로 결정되면. 그래서 황제가 되었을 땐. 아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남은 수명은.
‘제발. 적어도 대공 전하의 계승식 모습만큼은 보고 싶어. 그때까지는 곁에 있고 싶은데…….’
욕심이 아니길 바라지만,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죽기 전, 그분에게 남길 수 있는 것. 그때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 바로.
“그분과 나의 아이…….”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아직은 너무 낯설었지만, 아멜리아는 절로 떨리는 미소를 그렸다. 막연히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세인트를 안고 있던 이클리트를 보면서.
‘그러다 나중에 아이는 어떻게 안으려고 그러세요? 아빠가 되어줘야 하는데.’
그 당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잠깐 스쳤던 생각. 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아내가 되면서 조금 더 간절해졌다.
“그분의 아이를 가진다면, 몹시 좋을 것 같아.”
어쩌면, 아이를 낳는 그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남은 생을 전부 걸어도 좋을 만큼.
‘보고 싶어. 당신과 나의 아이가.’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그 아이가, 우릴 영원히 함께하게 해줄 테니까. 그분에게도 아이가 그런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아멜리아는 오늘 밤, 그와 함께 밤을 보내면서 제대로 물어볼 생각이었다.
‘나와 당신의 아이를, 원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