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서로 다른 시간의 간극 (119/199)

119화. 서로 다른 시간의 간극2022.02.21.

1655373598714.jpg“아이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는 온몸이 경직되면서,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16553735987144.jpg“……싫으신 건가요?”

겁에 질린 목소리에 이클리트는 이제야 당황하며 아멜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1655373598714.jpg“싫은 게 아니라, 정말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 제 삶에서 떠올릴 수 없는 존재예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의 눈동자에 담긴 혼돈이 보였다. 정말이지 아이는 그에게 너무 낯선 존재였던 거다. 이클리트는 자꾸만 헛도는 손끝에 힘을 준 채, 아멜리아에게 최대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655373598714.jpg“아이에 대해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물론 좋아요. 당신이 닮은 아이. 하지만 내가. 내가 아직 준비되질 않아서, 무섭습니다.”

혼돈이 걷히고 드러난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 앞에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도 시뻘건 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의 모습에 무거운 숨을 삼켰다.

1655373598714.jpg“내 존재 때문에. 그 아이도 상처받을까 봐, 그것이 겁나요.”

16553735987144.jpg“대공 전하…….”

1655373598714.jpg“조금만 이해해주면…….”

16553735987144.jpg“미안해요.”

아멜리아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서, 그대로 이클리트를 꽉 안아주었다.

16553735987144.jpg“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생각이 짧았던 건 저예요.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어요.”

한순간, 정말로 그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람의 상처를 깊이 헤아리지 못했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마주 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598714.jpg“아닙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기뻐하고, 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좀 더 강해질 때까지…….”

이클리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서, 그녀를 눈동자에 깊이 담았다.

1655373598714.jpg“우리에겐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계속 함께할 테니까.”

계속 함께한다는 말이, 아멜리아의 심장을 서걱이게 했다. 끝내,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그의 품으로 얼굴을 깊이 묻었다. 거짓투성이의 이 얼굴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16553735987144.jpg‘그래. 난 기다릴 시간이 없어서, 이 사람을 몰아붙였던 거야. 내게 시간이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분의 곁에서 천천히 기다릴 수 없는 거구나.’

오늘만 보면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느끼는 시간과 자신이 느끼는 시간의 간극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멈춰 있던 그는 이제야 겨우 앞을 보면서, 더 많은 시간을 말하는데. 그런 그에게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6553735987144.jpg‘대공 전하와 나는 점점, 멀어질 테니까.’

이클리트는 미안함과 동시에 묘한 설렘을 품고서 아멜리아를 꼭 안았다.

1655373598714.jpg‘아이라니.’

그저 되뇌는 것조차 낯설다. 예전에 아주 잠깐 스치듯 떠올린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가당치도 않다고 여겼다. 이 핏줄을 물려줄 수 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1655373598714.jpg‘아이라…….’

그녀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아이를 말했다. 자신이 반인반수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하게 사랑하는 이와 아이를 갖고 싶어서. 그녀는 자신을 헤아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주는 그 마음이 고맙고, 벅찼다.

1655373598714.jpg‘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두려움이 더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이클리트는 달빛에 비치는 자신의 날개를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반인반수와 인간의 아이는 수인의 피가 더 옅어진다. 완전히 인간이 되거나, 아니면 반인반수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완전한 인간이 되면, 반인반수와 달리 달 없는 밤의 지배도 받지 않았다. 아멜리아를 닮은 인간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자신을 닮은 반인반수라면. 그 아이에게 세상이 아프지 않고, 다정하기만 하다고 알려주며 걸어가게 할 자신이 아직은 없었다.

1655373598714.jpg‘적어도 내가 황제가 되고, 그녀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면. 그 속에서 아이는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녀는 이렇게 또 다른 꿈을 자신에게 만들어준다. 그 꿈으로 하루하루 또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준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멜리아가 무섭도록 그에게 안겨들었다. 이클리트는 그제야 그녀의 몸이 나직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1655373598714.jpg“아멜리아?”

그가 잠시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자, 아멜리아가 그런 그를 더욱 꽉 붙잡고서 읊조렸다.

16553735987144.jpg“안아주세요.”

1655373598714.jpg“아멜리아…….”

16553735987144.jpg“그냥 안아줘요. 대공 전하에게 밤새 안겨 있고 싶어.”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그를 쓰러뜨리고서, 그대로 그를 덮치듯 입술을 핥으며 삼켰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그녀의 욕망 앞에 이클리트는 당연하다는 듯, 지고 말았다.

1655373598714.jpg“아직 이 버릇은 그대로네요.”

이클리트는 그녀를 올려다보았고, 그녀 역시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조금은 탁해진 그녀의 녹안에 무슨 감정이 담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클리트는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한 가지 소망을 읊조렸다.

1655373598714.jpg“조금씩, 생각해보겠습니다.”

16553735987144.jpg“…….”

1655373598714.jpg“하루하루, 매일. 그래서 지금은 눈동자는 꼭,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

이클리트의 손길이 은밀하게 그녀를 당기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73598714.jpg“그 눈을 볼 때마다, 그대도 같이 생각하고 싶으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속삭임에 치미는 울컥임을 누르며 그에게 더 바짝 다가섰다.

16553735987144.jpg“……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보다 뜨거워진 호흡만이 두 사람의 입술 사이를 채웠다. 하나로 포개진 그림자가 끊임없이 들썩였고, 어느새 침대에선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아찔하게 번졌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양손을 부여잡고서, 그의 모든 순간을 철저히 제 몸에 새겼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전부 녹아들고 싶었다.

16553736047231.jpg

  *** 깊은 밤, 아스란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에리얼이 아스란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고, 아스란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16553736047235.jpg“아젠 백작은 잘 잡아뒀나?”

1655373604724.jpg“예. 잘 계십니다.”

에리얼의 대답에 아스란은 냉소를 그렸다.

16553736047235.jpg“어리석긴.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말이야.”

아스란은 자신이 필요한 이들을 하나하나 황궁에 묶어두고 있었다. 이클리트에게 기회를 주는 척, 자연스럽게 솔라리스에 묶어두고 밀주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16553736047235.jpg“에드조프도 이 정도로 자극했으니, 어느 정도 각성하겠지. 이클리트에게 자꾸 빈틈을 보이다니. 멍청한 것.”

겉으로 보기엔 황제가 클리오 대공에게도 황위 계승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저 철저히 이용하는 것일 뿐.

16553736047235.jpg‘반인반수, 그런 괴물이 솔라 제국의 황제라니. 그놈은 그저 열쇠가 되는 것이 제국을 위한 최선이야.’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1655373604724.jpg“폐하, 폐하!”

갑자기 시종장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아스란은 기분 나쁜 분위기에 잔을 내려놓았다.

16553736047235.jpg“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에리얼 역시 의아하게 시종장을 응시한 순간, 시종장이 굳어진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1655373604724.jpg“프리메 제국과 연결된 마법 통신구가 발동했습니다.”

아스란은 그 한 마디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16553736047235.jpg“뭐?”

갑자기 프리메 제국에서 연락을 취하다니…….

1655373604724.jpg“평화 회담의 날짜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시종장의 말에 아스란과 에리얼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16553736047235.jpg“그런가. 벌써 그렇게 됐나.”

3년에 한 번씩, 솔라 제국과 프리메 제국은 보여주기식으로 평화 회담을 개최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언젠가 시간의 숲의 봉인이 풀렸을 때. 세상에 다시 마법이 자유롭게 풀리면, 전쟁 없이 평화롭게 마법을 공유하며 공존하자는 의미의 회담이었다. 물론, 두 제국 모두 겉과 속은 달랐다. 어떻게든 시간의 숲을 차지하여 마법을 완전히 독점할 생각만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서로를 경계하기 위해선 거짓된 평화도 필요했다. 회담일은 서로가 번갈아 가면서 아무 때나 그 시기를 결정했는데, 이번엔 프리메 제국의 차례였다. 날짜를 결정하는 것 또한 온갖 신경전이 오가곤 했다.

1655373604724.jpg“이번 회담 장소는 저희 차례입니다.”

에리얼의 말에 아스란은 안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16553736047235.jpg“귀찮게 됐군. 하필이면 가장 바쁠 때. 이번엔 누가 오는 거지? 황태자가 오나?”

시종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604724.jpg“제 2황자 전하께서 파견을 오신다고 했습니다.”

16553736047235.jpg“제 2황자?”

에리얼이 한마디를 덧붙여주었다.

1655373604724.jpg“세스가 아샤 프리메 황자입니다. 황태자의 유일한 직계 동생입니다.”

16553736047235.jpg“들어본 적 없다는 건, 황위 서열에선 밀린다는 거군.”

1655373604724.jpg“사교계에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듣자 하니, 황위와 상관없이 학자의 길을 걷는다고 들었습니다.”

16553736047235.jpg“그럼 큰 신경 쓸 필요 없지. 문제는 왜 갑자기 회담에 그런 황자가 오는 거지?”

1655373604724.jpg“아마 황태자가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겁니다. 현재 프리메 제국 황제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16553736047235.jpg“그런데도 회담을 여는 걸 보면, 프리메 안팎으로 황제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려는 것이군.”

1655373604724.jpg“그런 의도가 있을 겁니다.”

16553736047235.jpg“아무튼 우리로서는 귀찮아.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심히 맘에 안 드는군.”

1655373604724.jpg“그런데, 폐하.”

시종장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1655373604724.jpg“세스가 황자가 한 가지 청을 해왔습니다.”

16553736047235.jpg“청이라니?”

1655373604724.jpg“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피오레 공작가에서 지내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아스란과 에리얼이 눈을 크게 떴다.

16553736047235.jpg“피오레 공작가에서 지낸다고?”

1655373604724.jpg“예.”

16553736047235.jpg“피오레 공작가와 아는 사이인가?”

에리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5373604724.jpg“그건 아닐 겁니다. 전혀 교류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아스란은 뭔가 불길한 느낌에 말을 되뇌었다.

16553736047235.jpg“피오레 공작가에 그 여인이 들어온 이후, 정말이지 거슬리지 않는 날이 없군.”

이클리트의 유일한 약점이기에 아직은 잘 지켜봐야 했지만, 아스란은 점점 아멜리아가 신경 쓰이고 불길했다. *** 이른 아침,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여름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부름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전혀 말해주지 않았기에, 아멜리아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16553735987144.jpg‘회의 이후 따로 부를 일은 없을 것 같았는데. 대체 뭐지?’

응접실로 들어서자, 아스란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16553736047235.jpg“클리오 대공, 피오레 공, 이렇게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군.”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아스란 앞에 예를 갖추었다.

16553736162813.jpg“폐하를 뵙습니다.”

아멜리아의 단정한 목소리 끝에 아스란은 자리를 내어주었다.

16553736047235.jpg“자, 앉지. 차라도 한 잔 들겠나?”

1655373598714.jpg“괜찮습니다, 폐하.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아멜리아 대신 이클리트가 정중하게 거절하며, 본론부터 꺼낼 수 있도록 했다. 아스란은 그 모습에 냉소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16553736047235.jpg“곧 솔라리스에서 프리메 제국과의 평화 회담이 열리는데, 프리메 제국에서 요청이 와서 말이지.”

아멜리아는 뜻밖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16553735987144.jpg‘평화 회담?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16553736047235.jpg“프리메 제 2황자인 세스가 황자가 솔라리스에서 머무는 동안 피오레 공의 접대를 받고 싶어 해서 말이야.”

16553735987144.jpg“……네?”

아멜리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고, 이클리트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게 가라앉았다. 아스란은 두 사람의 태도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16553736047235.jpg“원래 피오레 공작가에서 지내길 원했지만, 그대들도 여러 가지 문제로 황도에 있어야 하니까. 따로 황궁 밖에 저택을 마련하도록 하지. 이렇게 된 거, 피오레 공이 세스가 황자의 접대와 평화 회담 준비를 같이 도와줬으면 해.”

제국간의 회담을 전적으로 맡아서 하는 것은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특히나 공작 작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아멜리아로서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문제는.

16553735987144.jpg‘대체 왜 나지? 세스가 황자가 누군데. 누군데 날 지목했다는 거야?’

1655373619153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