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드러나느냐, 잡히느냐2022.02.25.
“피오레 공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아무래도 피오레 공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 같으니.”
아스란의 말에 잠시 당황했던 아멜리아가 곧장 표정을 바로 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번 평화 회담에선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태양신의 축복을 프리메에게도 알릴 수 있도록, 부디 잘 부탁하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기에.”
순간, 아스란의 목소리가 낮아지면서 공기가 팽팽해졌다.
“프리메에선 이미 밀주 사건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굳이 우리가 나서서 더 알려줄 필요는 없지. 너무 깊이 알아선 곤란해. 이번 사건은 평화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아스란의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그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프리메와 솔라는 사이가 몹시 나빠. 이 평화 회담조차 서로를 떠보기 위한 거짓된 회담에 불과해. 그러니 굳이 서로 약점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잘 알겠습니다, 폐하.”
“좋아. 피오레 공에게도 태양신의 행운이 있기를 바라지.”
“황공하옵니다.”
응접실을 나선 아멜리아는 감추지 못할 숨을 길게 내쉬었고,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평화 회담은 정말로 양날의 검입니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실패하면 그만큼 파장이 엄청날 겁니다.”
거짓된 평화에 거짓된 회담일지라도, 프리메에게 조금이라도 위신이 깎이는 모습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파장이 큰 만큼, 성공하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죠.”
“부인…….”
“왜 이런 기회가 생긴 건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성공적으로 치러내겠어요.”
아멜리아는 루시아의 말을 되뇌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이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 대공 전하를 황제로 만들 수만 있다면. 설령 그게 함정이라고 할지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죄다 이용해주겠어.’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점차 위험한 소용돌이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응접실을 나서자, 잠시 뒤에서 숨어 있던 에리얼이 다가왔다.
“피오레 공작에게 이런 큰 회담을 맡겨도 되는 것입니까? 안 그래도 요즘 피오레 공은 사교계에서도 가장 이름이 많이 오르내리는데. 회담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면, 피오레 공작가의 명예는 더 올라갈 테고. 그리되면 클리오 대공에 대한 입지도 달라질 겁니다.”
“그렇다고 프리메의 청을 아무 명분 없이 거절하긴 힘들지. 지금 피오레 공작과 이클리트를 피오레로 보내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잖아? 아예 회담을 맡겨버려서, 발을 묶을 수밖에.”
“…….”
“나는 아주 평화로운 회담을 원해. 피오레 공이 성공시킨다면, 황제로서 또 한 번 치하해줘야지. 황제로서 상을 내리는 건 기분 좋은 일이야.”
아스란은 아주 짙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피오레 공도 점점 견뎌야 할 것이 많아지겠군. 사교계에서 끊임없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잖아? 계속 눈에 보이면 보일수록, 선의의 시선도 늘어나지만, 그만큼 악의의 시선도 늘어나기 마련이니까.”
사람이란 양날의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피오레 공이 그 명예의 무게를 잘 견뎌내서, 끝내 원하는 욕망을 손에 넣을지. 기대되는군.”
*** 이른 아침, 아스란이 직접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응접실로 불렀다는 소식에 에드조프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데 프리메 관련 정보는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프리메 제국의 국빈을 아멜리아가 맡는다고? 이제 겨우 공작 작위를 받은 이가 무슨!”
에드조프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폐하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하세요, 대공 전하.”
급히 자리를 비웠던 키르케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에드조프의 앞에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평화 회담이야. 제국과 제국 간의 가장 큰 사교 행사라고. 만에 하나 이게 그 자식에게 기회가 되어버리면…….”
회담을 무사히 성사시키면, 피오레 공작가의 명예와 함께 클리오 대공의 이름 또한 프리메 제국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 에드조프는 이클리트의 이름이 점점 드러나는 것이 화가 나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회담을 망쳐야 해. 당장 그 무기들을 이용해서…….”
섣불리 움직이는 에드조프를 보며 키르케가 단호한 어조로 만류했다.
“공방의 무기를 이용하는 건 아직 이릅니다, 대공 전하.”
“뭐? 감히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내 것이야. 내 뜻대로 움직여야 맞는 거야!”
에드조프가 사납게 외쳤으나, 키르케는 의연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의 무기고, 대공 전하의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처럼 밀주 사건에 시선이 쏠려 있을 때, 자칫 잘못 움직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들키기만 할 겁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두자고? 나는 한시도 이 황궁에서 그 괴물의 이름도, 숨소리조차 듣고 싶지 않아!”
“어차피 피오레 공에게 맡겨진 회담이니, 이 또한 저희에게 기회가 되도록 하면 되지요. 피오레 공에게 이번 회담은 성공하면 명예지만, 실패하면 나락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와 위험을 동시에 움켜쥐고 있는 거랍니다.”
키르케로서는 몹시 좋은 판이 열린 셈이었다. 평화 회담. 장로회와 신성회, 그리고 대부분의 귀족이 전부 태양의 제단으로 모이게 된다. 게다가 프리메의 국빈까지. 그 많은 눈이 있는 장소에서 키르케는 클리오 대공에게 숨겨진 가면을 벗겨낼 작정이다.
‘몹시 위험하지만, 그만큼 화려하게 축포를 터트릴 수 있겠지.’
클리오 대공이 정말로 반인반수라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아스란. 네놈은 끝이야. 지옥 같은 기분을 선사해주마. 네놈의 전부를 빼앗아주겠어!’
***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아멜리아는 아스란이 내린 저택으로 곧장 이동했다. 임시 저택이긴 해도, 프리메 제국의 황자가 머물 곳이기에, 저택은 무척이나 고급스럽고 우아했다.
“황도에 이런 저택이 있었네요?”
아멜리아가 생각보다 잘 관리된 저택을 보며 말하자, 카힐로가 뜻밖의 말을 전했다.
“클로에 황후 폐하의 별장이었습니다.”
“네?”
이클리트도 처음 안 사실이었기에,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엔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 종종 황궁 밖으로 몰래 나가셨던 적이 많아서. 폐하께서도 황후 폐하께서 밖에서 몰래 지낼 수 있도록, 이렇게 별장을 선물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쓰지 않고, 관리만 하고 있지만요.”
카힐로의 말에 아멜리아가 다시금 저택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누군가의 취향이 독특하게 묻어나는 것 같았다. 특히나 천장이 몹시 높았는데, 마치 중정처럼 유리로 되어 있어서 하늘 아래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황후 폐하께선 몹시 자유로운 성정이셨구나.’
아멜리아는 지난번에 만났던 클로에를 떠올리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지?”
이클리트가 의아한 듯 묻자, 카힐로가 살짝 당황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황도에서 살았을 때, 나름 이것저것 많은 정보를 주워듣곤 했습니다.”
“카힐로 경, 북부 사람이 아니었던 거예요?”
아멜리아가 처음 알았다는 듯 묻자, 카힐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원래는 남부에 살았습니다.”
더 사실대로 말하자면 카르티아 공작가에서 전 공작 각하를 모시며 살았다. 물론, 이 사실은 비밀이지만. 여기가 클로에 황후 폐하의 별장이라는 걸 아는 이유도.
‘종종 여기서 전 공작 각하께서 클로에 황후 폐하를 뵙곤 하셨지.’
물론 이 또한 비밀이었다.
“대공 전하, 가주님!”
그때, 마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달려왔다. 마미의 표정은 몹시 굳어져 있었다.
“마미,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당연히 무슨 일이 있죠! 무려 평화 회담이에요. 가주님이 처음으로 이끄는 공식 사교 무대라고요! 피오레의 가장 큰 명예가 달린 일인데. 시간이 이렇게 촉박하다니! 가주님. 지금부터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요. 케이트 님도 오늘 밤에 도착하실 거예요.”
그래,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마미와 더불어 피오레 공작가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면서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그만큼 국빈을 접대하는 일에 성공하면, 공작가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게 되니까. 특히나 아멜리아는 회담까지 준비해야 했기에. 회담 전까지, 프리메 황자의 환영회와 더불어 전야제와 후야제까지 도맡아서 진행해야 했다. 집무실에 들어온 아멜리아는 재빨리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지난 회담 자료들을 검토했다.
“그러니까, 태양의 제단에서 열린다는 말이지.”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평화를 기원하지만. 역시나 평범한 제국민과 루베르는 소외되었다. 아니, 태양의 제단 자체가 오직 선택받은 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평화를 비는 것조차 이렇게 차별하는 거야?’
아멜리아는 지난번 축복의 꽃처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노크와 함께 이클리트가 들어왔다.
“부인.”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책상에 어지럽게 놓인 자료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같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는 대공 전하의 일을 하셔야죠.”
지금부터 이클리트는 황궁에 숨어 있는 뱀 두 마리를 찾을 계획이었다. 어젯밤,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에게 조리실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준 것이다.
“에드조프의 곁에 여전히 유모는 있는 모양인데, 요즘 들어 황궁을 자주 비우는 모양입니다.”
“대공 전하께서는 그 유모가 수상하다는 거죠?”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다행히 이번에 제가 황궁에 계속 드나들 수 있는 명분이 생겼으니까.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어쩌면, 전야제에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잖아요. 에드조프 전속 시녀들의 총책임자라면서요.”
“사실 전야제도 마음에 걸려서요.”
이클리트가 미리 황궁을 살피려는 이유는 항상 큰 사교 무대가 있을 때마다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처음은 대회의였고, 그다음은 사냥 대회까지. 게다가 장마까지 이용했으니. 큰 사교 무대가 열리면, 거기에 숨어서 온갖 일을 벌일 수 있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럼 우리도 그 기회를 이용해야겠네요. 이번 사교 무대를 덫으로 이용하죠. 밀주의 배후를 찾지 못하면, 스스로 움직이게 해서 잡는 수밖에. 어쩌면 수많은 눈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배후를 드러나게 하면…….”
에드조프가 밀주의 배후와 한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낱낱이 공개될지도 모른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찌 되었든, 몹시 위험한 회담이 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부인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나예요.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나도 대공 전하를 지켜요. 그러니까 약속해줘요. 절대로 위험해지지 말아요. 당신의 힘을 함부로 꺼내서도 안 돼요.”
이처럼 큰 사교 무대에서 저들이 움직인다면, 분명 노리는 것은 대공 전하다. 회담에서 자칫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로 걷잡을 수 없어질 테니까. 아멜리아는 그의 손을 꼭 쥔 채, 몇 번이고 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대답을 재촉했다. 마치, 그에게서 맹약을 바라는 것처럼.
“내가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그래요. 그러니까 내 부탁 꼭 들어줘야 해요. 알겠죠?”
그녀는 애처로운 눈망울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녀의 눈동자 앞에서, 이클리트는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내게 그렇게 말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잖아요.”
“알고 그러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해서, 대공 전하. 아니 이클리트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이클리트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이지 그녀의 말은 거역할 수가 없다. 마치 절대적인 명령처럼 자신을 무력화시키니까. 만약. 자신이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또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아니.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았으면 한다. 영원히.
“알았어요. 나 자신을 잘 지켜볼게요.”
그때, 노크와 함께 카마리가 들어왔다.
“대공 전하, 가주님을 뵙습니다.”
“카마리 경, 무슨 일이에요?”
아멜리아가 묻자, 카마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반듯한 자세로 청했다.
“가주님, 현재 루베르 가주를 찾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지난번 왔던 라니가 루베르 가주에 대한 흔적을 찾은 것이 아닙니까?”
“아, 맞아요. 그걸 카마리 경이 어떻게…….”
“죄송합니다. 라니에게 물어서 알게 됐습니다. 저도 그 정보를 듣고 싶어서 동석해달라고 한 겁니다.”
이클리트는 카마리의 말에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현재 가주님께서는 회담과 국빈 접대 준비로 바쁘시니, 제가 루베르 가주를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카마리 경이요?”
“약재상을 다시 한번 조사해보겠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나야 카마리 경이 해주면 고맙긴 한데…… 하지만 혼자 움직여도 괜찮겠어요?”
“혼자 움직여도 괜찮지만, 가주님이 신경 쓰이실 테니, 이사나 경과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이사나…….’
이클리트는 이사나의 이름을 천천히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