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복수와 분노2022.02.28.
이클리트는 묘한 눈빛으로 카마리를 응시했다. 애초에 카마리는 라니에게서 정보를 듣고자, 아멜리아에게 함께 만나고 싶다고 말한 것 같다. 그 말은 즉.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건가. 뭐가 걸려서 직접 움직이고 있는 거지?’
이사나……. 사실 이클리트는 이후 이사나가 계속 신경 쓰였다. 분명 루베르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숨기고 있다는 점이. 사람이 뭔가를 숨긴다는 건 썩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사나와 움직인다면, 그래. 일단 카마리한테 맡겨볼까.’
*** 아멜리아의 허락을 받은 카마리는 이사나 앞에 무서운 표정으로 서서는, 이사나가 거절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카마리 경이랑 내가 루베르 가주를 찾아야 한다는 거죠?”
“일단은 가주를 찾는 것보다는 그 흔적의 신빙성을 확인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겁니다.”
“하지만 나까지 거기 투입되면 이번 회담의 호위가…….”
“칼렌 경이 하면 되지 않습니까?”
카마리는 머뭇거리는 이사나를 향해 딱 부러지는 어조로 말을 몰아붙였다.
“왜 그러는 겁니까? 이번 일에서 빠지고 싶은 겁니까?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에요. 좋아요. 같이 하도록 하죠. 카마리 경 혼자서는 위험할 것도 같고.”
“걱정, 감사합니다. 그럼 이거 입으십시오.”
카마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로브를 건넸다. 이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검은 로브를 받았다.
“이걸 입고 움직인다고요?”
“혹시 누가 지켜볼지도 모르는데, 정체를 드러내고 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티어들은 보통 그러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죠. 그런데 카마리 경, 준비성이 철저하네요.”
“꼭 찾고 싶거든요.”
카마리는 어쩐지 싸늘한 눈빛으로 이사나를 응시하며 말을 맺었다.
“루베르 가주, 나도 꼭 찾아서 보고 싶습니다.”
이사나는 그런 카마리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마리와 이사나는 같은 로브를 입고서는, 라니가 알려준 약재상을 찾았다. 약재상은 갑자기 시커먼 로브를 입은 이들이 들어오자 당황하며 흠칫했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카마리는 그 모습에 태연했고, 이사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래. 대낮에 이런 복장으로 다니는 게 더 눈에 띄지.’
“여기서 대량의 약을 구매했다는 정보를 누군가에게 말씀하셨죠?”
약재상은 대량의 약을 되뇌다가 단번에 그때 그 일임을 알고는 더더욱 경계했다.
“아, 그렇게는 한데. 대체 무슨 문제 있습니까? 왜 자꾸 그 일로 누가 날 찾아오는 건지. 이번엔 더 수상한 복장으로…….”
약재상은 카마리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자, 카마리는 덤덤한 어조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제 있는 건 아니고, 약을 대량으로 구매한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 나는 진짜 모른다니까. 얼굴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 루비라는 이름밖에 들은 적이 없어. 아, 저 사람.”
그 순간, 약재상이 이사나를 가리켰고, 이사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내가 뭐 어쨌을까?”
“체격은 저 사람이랑 비슷해요. 아니. 똑같네. 댁들이랑 같은 이런 로브를 입고 있었으니까. 맞아. 완전 똑같아.”
카마리는 이사나를 빤히 보면서 읊조렸다.
“저 사람이랑 체격이 완전 똑같다는 거죠?”
이사나는 카마리와 약재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도 단서가 될 수 있긴 한데, 그렇지만 내 체격은 너무 흔한데. 아닌가?”
카마리는 이사나의 말을 무시한 채, 약재상에게 감사를 표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진짜 찾아오지 마요. 난 그냥 주문받은 대로 약을 준비해서, 팔았던 죄밖에 없어.”
“죄 없으십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그럼.”
카마리가 쉽게 돌아서자, 이사나는 더욱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아니, 조사는 이게 끝이에요? 아니면 나는 눈치 못 챈 뭔가를 카마리 경은 눈치챈 거야?”
“듣고 싶은 건 다 들었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뭘?”
걸음을 옮기던 카마리가 우뚝 멈춰 서서는 이사나를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일부러 이사나 경한테 그 로브를 입힌 겁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사나의 눈빛이 멈췄다.
“그게, 무슨…….”
“약재상이 이런 로브를 입어서 체격조차 모른다고 하기에, 혹시 비슷한 걸 입으면 뭐라도 떠올리지 않을까, 해서요. 뭐, 정확한 건 못 찾았지만 그래도 체격은 확보했네요.”
카마리는 이사나를 빤히 보며 짧게 읊조렸다.
“내가 아닌 이사나 경과 아주 똑같은 체격.”
그녀는 이사나에게 성큼 다가와서는 손을 뻗어 그를 더듬었다.
“키는 제법 크고.”
“자, 잠깐 카마리 경?”
“살집은 별로 없는, 적당히 몸집이 있는 남성.”
“…….”
“아무리 평균 체격이라도, 티끌만 한 것도 찾긴 찾아야 하니까.”
“그건, 그러네요.”
카마리는 당황해하는 이사나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장 결정적인 건 역시 이름인데. 루비…… 대공 전하의 말에 의하면 루베우스, 루베르를 뜻하나 원래 뜻은 붉은 보석이라고 합니다. 루베르 가주는 참 낭만적인 이름을 붙여서 약을 샀네요.”
“낭만적인가?”
일순, 냉랭하게 번지는 이사나의 말에 카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루비라는 보석은 ‘피죤 블러드’라고 불리죠. 신에게 바친 제물이었던 새의 죽음에서 쏟아진 피의 결정체에요.”
“…….”
“신의 제물이라며, 영광스럽게 생각하라고 바쳐진 제물이지만. 글쎄요. 그 새의 의사는 묻지도 않았을걸요? 멋대로 제물이 되어선 허망하게 죽어버린 거죠. 그 보석은, 그 새의 복수와 분노가 담겨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보다 보면 묘하게 홀리죠. 아주 위험하게.”
“당신 눈동자처럼?”
카마리의 말에 이사나가 고개를 들었다. 카마리는 그의 숨겨진 속내까지 꿰뚫을 것처럼, 그의 눈동자를 아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이사나의 눈빛이 잘게 떨리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하하! 카마리 경의 눈엔 내 눈동자가 위험해 보이나 봐요. 걱정 마요.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 눈동자 색은 붉은색도 아니고.”
“위험하게 보진 않습니다.”
“…….”
‘위태롭게 보지.’
하지만 카마리는 차마 뒷말을 삼킨 채, 그녀답지 않게 말을 돌렸다.
“루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합니다.”
“뭐, 딱 그 정도만 알아요. 보석 좋아하는 남자도 있겠지만, 난 별로 관심 없어요.”
“그래서 잘, 모른다고요?”
“그렇죠.”
이사나는 그저 싱긋 웃고는 먼저 등을 보였다.
“자, 그럼. 약재상 쪽은 알아볼 만큼 알아본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죠.”
카마리는 떨리는 시선으로 멀어지는 이사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루비에 대해서. 그래서 모른다고. 아니, 당신은 알아야 하잖아. 왜냐면, 당신이…….”
칼렌이 얼핏 흘린 말이 있었다. 그날, 아멜리아가 아이냑과 만나고 있었을 때. 이사나가 가주에게 말도 안 하고 장소를 이탈했으니, 아무리 단장이라고 해도 블러드 아이리스 차원에서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칼렌은 그때 몹시 속상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안 해도 될 말을 후배에게 한 것이다.
‘요즘 단장님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곧 괜찮아지실 거야. 그러니까, 지금 단장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
‘부단장님은 단장님을 엄청 존경하시는 듯합니다.’
‘존경하지. 아니, 존경할 수밖에 없지. 예전에 단장님이 필드에 계셨을 때, 코드명이 루비였어.’
‘루비요? 보석 말입니까? 의외로 낭만…….’
‘낭만적인 게 아니라, 무서운 거야. 피죤 블러드. 분노와 복수를 담아서 최후까지 적을 사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지금은 단장님이 저렇게 허허 웃고 다니셔도, 필드에선 진짜. 진짜 무서웠어.’
우연히 듣게 된 이사나의 코드명. 카마리는 루비라는 이름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루비라는 이름을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듣게 될 줄 몰랐다. 라니가 아멜리아를 찾아왔을 때. 급한 일이 있었던 마미가 카마리에게 정중하게 부탁했었다.
‘미안합니다, 카마리 기사님. 이분을 응접실까지 부탁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카마리는 라니를 알았고, 라니 또한 카마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라니는 카마리에게 지난번 일을 떠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때, 아이들을 치료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치료해준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도 얼마나 큰 도움이었는데요.’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아, 가주님이 부탁하신 게 있어서요.’
‘부탁?’
‘가주님이 루베르 가주를 찾고 있거든요. 근데 그 루베르 가주가 가주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루베르 가주가? 대체 어째서 말입니까?’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진짜 만나면 한 방 먹여주고 싶은데. 왜 숨어서 도와주고 난리인지. 그러면 우리가 고마워할 줄 아나. 루비는 뭐야, 루비는.’
‘……루비라니?’
루비라는 이름으로 대량의 약을 구매해서 도와줬다는 라니의 말에 카마리는 단번에 이사나를 떠올렸다. 그래서 이사나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평균적인 체격이라고 해도 자신도 옆에 있었는데 약재상이 딱 짚어서 이사나를 가리킨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루비. 당신이 루비면서. 대체 왜 모른 척하는 거지…….”
이사나, 당신 누구야? 당신이 루베르와 관련되면 표정부터 달라지는 게, 루베르 가주와 관련 있는 거야? *** 며칠 후,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고서 저택 앞에 섰다. 며칠 전에 도착했던 케이트와 더불어 다른 피오레 공작가 사람들의 표정엔 긴장이 서려 있었다. 마침내 오늘, 프리메 제국의 제 2황자가 여기 도착하는 것이다. 아멜리아는 프리메 제국의 황자가 궁금했고, 이클리트는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녀의 곁에 있었다.
‘아무런 접점도 없는데, 그녀에게 접대를 부탁했으니. 절대 방심할 수 없지.’
마침내, 멀리서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리면서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마차들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와. 저게 프리메 제국의 황실 마차구나.”
마미의 감탄과 함께 웅장한 장관이 펼쳐졌다. 주변에 있던 솔라 제국민들도 우르르 몰려나와서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행렬을 지켜보았다. 케이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마미에게 짧게 말했다.
“마미, 집중하도록 해라. 절대로 실수하면 안 돼.”
“예, 케이트 님.”
마침내 제 2황자를 태운 마차가 아멜리아 앞에 멈춰 섰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고,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호.’
아멜리아의 눈앞으로 일순 붉은빛이 하늘거렸다. 단정하게 묶은 붉은색 머리카락. 그 아래 제법 날카롭게 뻗은 눈꼬리와는 달리 단정하게 그려진 입매. 사전 정보를 통해 학자라고 들었는데, 조금 날카로운 인상이긴 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몹시 차분하고 기품이 느껴졌다. 북부와 가까운 프리메 제국은 제국 전체가 눈이 뒤덮인 설국이지만, 입고 있는 옷은 북부처럼 털옷은 아니었다. 그는 우아한 걸음으로 이클리트에게 다가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환대해줘서 고맙습니다, 클리오 대공.”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세스가 황자.”
“아닙니다. 오는 내내 설레서, 전혀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설렜다고?’
세스가의 시선이 마침내 아멜리아를 향했다. 아멜리아는 최대한 단정한 미소를 띠며, 세스가를 반겼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황자 전하. 회담 마지막까지 황자 전하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스가는 천천히 아멜리아의 손목을 붙잡고서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나야말로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갑군, 피오레 공.”
“회담 전야제는 내일이지만, 그전에 저택에서 따로 환영 파티를 열려고 하는데…….”
“아, 그런 건 필요 없어.”
단칼에 거절하는 세스가의 말에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네?”
“그런 쓸데없는 걸 하자고, 피오레 공에게 내 접대를 맡긴 게 아니야. 나는 피오레 공과 조용히 대화하고 싶었으니까.”
기묘한 말에 이클리트와 아멜리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세스가는 여전히 아멜리아의 손목을 잡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피오레 공도 그런 거창한 것 없이, 나랑 조금이라도 빨리 대화하고 싶을 텐데.”
순간, 세스가가 잡고 있던 아멜리아의 손목을 당겨서는 귓가에 속삭였다.
“솔라 제국에 반인반수가 나타난 이유. 아마 시간의 숲이 움직인 것과 관련 있을걸?”
아멜리아는 세스가의 한마디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니?’
이클리트는 너무 가까운 두 사람 사이로 사납게 끼어들었고, 세스가는 곧장 아멜리아의 손을 놓아주고서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환영회 같은 건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갈까? 내 목적은 평화 회담 따위도 아니고, 피오레 공.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