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시간의 숲2022.03.04.
북부와 가까운 설국, 프리메. 솔라 제국이 태양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면, 프리메 제국은 설풍의 매서운 바람신의 가호를 받는 곳이었다. 두 제국은 문화 역시 판이한데, 솔라는 화려한 문명이 꽃피웠고, 프리메는 대자연을 지키는 것을 신념으로 내세워, 보존과 유지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세스가는 채집용 칼을 들고서, 시간의 숲 근처를 돌면서 생태계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황태자의 직계 혈육이었으나, 황위 서열과 먼 황자로 정치보단 환경에 더 관심이 많은 학자였다. 시간의 숲은 솔라 제국과 프리메 제국 국경 사이에 있는데, 사실 지리적으로 정확히 따지고 보면 프리메 제국에 좀 더 많은 면적이 걸쳐 있었다. 세스가는 수십 년 동안,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출입을 막고 잠들어 있는 시간의 숲을 바라보았다. 봉인된 이후, 이곳은 짙은 안개가 마치 보호막처럼 형성되어 이 숲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순수한 호기심으로 시간의 숲을 응시했다.
“들어가고 싶다. 정령들도 보고 싶고. 그들이 만든 대자연도 보고 싶고!”
두 제국은 시간의 숲을 먼저 열어서, 어떻게든 마법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만. 세스가는 그저 이 숲의 생태계가 궁금하여, 광기 어린 호기심을 마구 발산했다. 다른 사람이 그런 세스가의 모습을 본다면, 황자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자연에 미친 학자로만 보였으니까.
“황자 전하, 부디 체통을 지키세요.”
세스가의 조수이자, 전속 시녀인 마하가 혀를 차면서 세스가를 말리려고 할 때. 쿵-! 갑자기 땅이 울릴 만큼 일어난 지진에 세스가가 곧장 마하를 감싸면서 고개를 들었다. 마하는 세스가의 품에서 몸을 떨면서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설마 눈사태인가요?”
“눈사태가 아니야…….”
세스가의 동공이 두려움에 부풀어 오르면서, 곧장 시간의 숲 근처로 달려갔다. 시간의 숲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한순간 크게 들썩였다.
“멈춰있던 시간의 숲에서 지진이라니. 설마, 숲의 시간이 움직이고 있다는 건가?”
시간의 숲이 봉인됐다는 건, 단순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게 아니었다. 숲의 시간조차 완전히 멈춰버린 것. 저 안에서 사는 식물과 동물 등,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멈춰 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 숲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시간이 흘러야, 날씨 변화도 일어나고, 지진도 일어날 수 있는 거니까.”
마하는 세스가의 혼잣말에 파리해진 표정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방금 그 지진이 시간의 숲에서 일어났다고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럼 봉인이 해제된다는 걸까요?”
“모르지. 아니면 열쇠가 나타났다거나.”
“열쇠라니. 그럼 대체 어디서…….”
세스가는 시간의 숲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느리게 입술을 달싹였다.
“솔라 제국.”
“예?”
“솔라 제국에서 반인반수가 나타났다며.”
“그렇기는 하지만. 그건 우연 아닐까요?”
“모든 일을 우연으로 치부하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 숲이 봉인된 이후, 수인도 사라졌지만, 반인반수도 꼭꼭 숨어 있었어.”
“하지만 누군가 일부러 끄집어냈다고 하던데요.”
“수인만큼은 아니지만, 반인반수도 인간보다 강해. 그들을 누군가 일부러 끄집어낸 것 자체도 수상하다고. 그런 찰나에 시간의 숲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아주 연관이 없진 않겠지.”
말을 하면 할수록, 세스가의 안광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마하는 그 모습에 아찔한 숨을 삼켰다.
‘슬슬 눈이 돌아가시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닌데. 자칫 잘못하다간 제국 간의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데!’
생각을 정리한 세스가는 곧장 움직였다.
“직접 파악해야겠어.”
“예? 어딜요? 설마 솔라 제국에 직접 가시려고요?”
마하는 움직이기 시작한 세스가를 보며 펄쩍 뛰었다.
“당연하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황자 전하, 제발! 전하의 신분을 생각하세요. 타 제국 황자가 솔라에 몰래 잠입했다가 잡히면, 끝장이라고요! 솔라의 머스켓티어는 멀리서도 사람을 가뿐하게 죽인다던데! 황자 전하께서 죽으면 어떡해요! 호기심이 목숨보다 귀하진 않잖아요!”
마하는 이런 상태의 세스가를 말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막아봤다. 하지만 세스가는 천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연히 몰래 잠입하지 않지. 그러면 솔라에서 조사하고, 움직이기 어렵잖아.”
“그럼 대체…….”
“황자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극도로 대접받아야지. 국빈으로 갈 거야.”
“예?”
“아주 굿 타이밍이잖아. 평화 회담.”
세스가의 말에 마하는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졌다. 제국 간의 회담을, 자신의 호기심 충족에 사용하겠다는 건가!
“어차피 거짓 평화 회담이잖아. 겉만 번지르르한. 그리고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선점하지 않으면, 또다시 전쟁이야.”
전쟁이라는 말이 선득하게 그의 입술에 짓눌렸다. 마하는 절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 가셔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우리와 말이 통할 사람이 솔라에도 있는 것 같아.”
“예? 누구요? 황자 전하, 솔라에 아는 사람이 있으세요?”
“피오레의 새로운 공작.”
“네?”
“루베르를 옹호하고 있다며. 이방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솔라 제국에서, 그 정도로 크게 움직이는 걸 보면 나랑 말이 잘 통할 거야.”
생글거리던 세스가의 눈매가 어느새 차갑게 얼어붙으며,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 시간의 숲을 응시했다.
“이 지긋지긋한 신경전을 끝내고, 이 숲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해.”
*** 세스가의 한마디에 아멜리아는 환영회를 모두 취소하고 이클리트와 함께 접견실로 향했다. 그녀는 접견실 근처로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한 뒤, 케이트에게 혹시라도 황실에서 사람이 나오면 뒷일을 부탁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만큼, 세스가의 말에 아멜리아는 마음이 불안하게 동요했다.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마침내, 무서우리만큼 침묵이 서린 접견실에서 아멜리아와 이클리트, 세스가가 마주했다. 세스가는 이 침묵이 맘에 드는 듯 입꼬리를 짙게 올렸다.
“이야. 이제야 좀 대화할 분위기가 나네? 피오레 공도 눈치가 아주 빠른 것 같고.”
“대화할 분위기가 난다면, 본론부터 말해주시죠.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는 그 얘기.”
아멜리아는 목소리에 떨림을 최대한 붙잡고서 말을 이었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의 긴장을 단번에 눈치채고서, 말없이 그녀의 뒤를 지켜주었다. 사실, 이클리트도 속으로 적잖이 놀란 상태였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의 숲은 아스란 황제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난 단 하나의 이유였으니까.
“말 그대로 시간의 숲이 움직였어. 거기서 지진이 일어났거든. 지진이 일어났다는 건,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의미니까.”
“정말로 지진이 일어났다고요? 지금은요? 지금은 어떻죠?”
“다시 멈췄지. 불안정한 상태야. 하지만 한번 움직였다는 건, 이제 슬슬 균열이 시작됐다는 거 아니겠어? 내 생각엔 봉인을 풀 열쇠가 나타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멜리아는 열쇠라는 말에 불안이 터질 듯 부풀며 가슴을 짓눌렀다. 이클리트 역시 그답지 않게 마른 숨을 삼켰다.
“아무튼 좋은 상황은 아니야. 특히나 솔라에서 반인반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그런 타이밍에 시간의 숲이 변화하다니. 지금은 나 혼자 눈치챈 것 같지만, 까딱 잘못해서 두 제국이 알게 되면 전쟁이야.”
“전쟁이라니…….”
아멜리아는 끔찍한 상황에 절로 눈을 감았다. 전혀 지나친 우려가 아니었다. 프리메 황제는 몰라도, 아스란 황제는 시간의 숲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거다. 그 숲을 갖고자 오랜 시간 동안 끔찍한 짓도 서슴없이 하고 있는데…….
‘하지만 전쟁만은 안 돼. 두 제국이 무너지는 일이야.’
게다가 대공 전하마저 휘말리게 될 거다.
“이런 얘기를 피오레 공에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얘기를 하고자, 피오레 공을 접대 상대로 지목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숲의 변화를 그쪽 황실엔 알리지 않은 겁니까?”
이클리트는 애써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세스가는 제법 속내를 철저하게 감추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맞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내가 갑자기 평화 회담에 가겠다고 해서, 형님과 아바마마께선 꽤 놀라셨을 겁니다. 어쩌면 내가 정치에 관심 두는 줄 알고 헛된 기대를 하실지도 모르지요.”
“…….”
“하지만 뭐, 어쩌면 관련 있을 수도 있겠군요. 피오레 공, 그리고 이클리트 황자.”
세스가는 입술에 걸쳐 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서, 진지하게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주시했다.
“나는 시간의 숲 때문에 전쟁이 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절로 커졌다.
“현재 아바마마께선 오랜 병마 때문에 언제 돌아가실지 모릅니다. 그건, 지난날 시간의 숲 때문에 생긴 병 때문이죠. 아바마마께선 그 빌어먹을 시간의 숲 때문에 시간을 허비했고, 이젠 형님마저 그 숲 때문에 발목 잡히게 생겼습니다. 그건 솔라도 마찬가지겠지요.”
세스가의 말에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시간의 숲 때문에 루베르는 삶의 터전을 잃었고, 솔라에서 살아남고자 필사적이다. 대공 전하께서는 태어난 순간부터 고통당한 채, 지금도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과거의 흉터가 끈덕지게 그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저주지. 그 숲에 얽매여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그게 저주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저주라는 한마디가, 아멜리아의 머릿속으로 강하게 파고들면서 동요하게 만들었다.
“정령들이 뭐 때문에 그 숲을 봉인했는지, 그걸 또 잊는다면. 이번엔 정령들이 정말로 분노할 겁니다.”
‘소냐가 했던 말이야.’
정령이 시간의 숲을 봉인한 이유. 인간의 이기심. 타 종족을 배척하고, 상처 입히며 오직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기에 내린 경고. 그때는 경고로 끝났으나, 그 경고를 무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시간의 숲이 움직인다는 건, 정말로 열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거야. 첫 번째 경고가 끝나가고 있다는 건데. 그 경고를 무시하면, 아마 두 번은 없겠지.’
“내가 평화 회담을 핑계로 남들 눈을 피해, 피오레 공을 만난 건 나와 생각이 비슷할 것 같아서야. 루베르를 옹호한다고 들었거든. 우리도 우리지만, 솔라 제국은 이방인의 차별이 더욱 심한 곳이야. 그런 곳에서 루베르 편을 든다는 건, 차별을 없애보려는 거 아니야?”
“대공 전하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이용하려는 건인지도 모르죠.”
“이용하려는 것치고는 꽤 귀찮은 일을 많이 벌이던데. 사실 이클리트 황자를 황제로 만드는 거면, 루베르 가주만 설득하면 되는 거잖아.”
“…….”
“악순환을 끊어야 하지 않겠어?”
“결국 황자 전하께선 정말로 평화를 원하기에 여기 오셨다는 거네요.”
“시간의 숲을 정령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 아니, 애초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거긴 대자연의 영역이라고.”
아멜리아는 세스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황자의 진심이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은 정보를 얻은 셈이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 확인할 방법도 있고.
“그런 거라면 더더욱, 이번 평화 회담을 성공시켜야겠네요. 지금까지처럼 눈 가리고 아웅 하던 거짓 회담이 아닌, 진짜 평화 회담으로.”
“응?”
세스가는 사실 회담은 정말 이용만 할 생각이었고, 그녀에게선 반인반수에 대한 상세한 얘기와 루베르 장로와 닿을 수 있는 다리 역할을 원했다. 일단 현존하는 이들 중에 시간의 숲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는 루베르니까. 예전의 루베르라면 몰라도, 지금의 루베르는 자신도 연락이 닿지 않기에.
‘좀 도움을 받을까, 했더니.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네?’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인데, 선택된 이들만 모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멜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세스가의 입꼬리가 다시 치켜 올라가면서, 그녀를 묘하게 훑어 내렸다. 살짝 방향이 틀어지긴 했지만.
‘정보만 모으면 되니까.’
“역시. 피오레 공과는 말이 통할 줄 알았어.”
세스가가 다시금 아멜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려고 하자, 이클리트가 세스가의 손을 잡고서 다소 센 악수를 했다.
“말은 통하되, 마음은 통하지 마시길.”
“대, 대공 전하!”
세스가는 숨기지 않는 이클리트의 다소 격한 애정에 미소가 더욱더 깊어졌다. 북부의 괴물 대공. 자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치열하게 북부와 싸웠으니까. 우리 병사들이 치를 떨면서 괴물 대공을 피해 다녔지. 그런데 그 대공이 결혼해서, 부인에게 이토록 지극정성일 줄이야.’
하지만 대공비를 만나보니, 조금 이해되기도 했다. *** 세스가가 접견실을 나간 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스가 황자를 믿으십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그가 평화 회담을 성공시킨다면, 믿어볼 가치는 있죠. 시간의 숲이 움직인 건 사실 같고. 황제 폐하께서 아직 모른다는 건, 저쪽 황실에서도 아직 모른다는 의미예요.”
두 제국 모두 황실에 스파이를 심어두고 있으니, 이런 엄청난 정보가 새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세스가 황자 혼자 알고 있다는 거다. 아멜리아는 두 팔을 뻗어서는 이클리트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더는 당신이 폐하께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그 열쇠 때문에 태어난 게 아니니까.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고, 그저 이클리트일 뿐이니까.”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고서 가만히 마주 안아주었다. 언젠가,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체 그 시간의 숲의 열쇠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열쇠가 아닌지.’
다른 무엇보다, 그로 인해 그녀가 위험해진다면. 일순, 그의 안광으로 붉은빛이 감돌면서, 아멜리아에게 닿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일은 절대 없어.’
그녀를 위험하게 하는 것도. 자신들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있다면 모조리, 없애버리면 그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