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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각자의 평화 (123/199)

123화. 각자의 평화2022.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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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저녁. 솔라리스 여름궁 대연회홀인 하늘의 방에서 평화 회담을 위한 전야제가 화려하게 열렸다. 지난번 대회의처럼 허락되지 않은 무기는 소지할 수 없었기에. 티어들은 전원 여름궁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궁 호위는 오직 황실 근위대의 몫이었다. 그 질서가 흐트러지면 큰 혼란이 초래할 수 있었다. 준비 기간이 짧았을 텐데도, 전야제의 규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표정을 바로 했다.

16553737165577.jpg‘솔라가 얼마나 프리메에게 지고 싶어 하지 않는지 단번에 알겠네. 지난번 대회의 무도회보다 더 심하잖아.’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시선이 가는 대로 함께 눈을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연회홀로 들어가는 거대한 파사드가 평소보다 더 눈부신 이유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카렌듈라가 끝도 없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세스가는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솔라 제국의 위엄에 진심으로 탄성을 자아냈다.

16553737165581.jpg“그 짧은 사이에 준비가 완벽하네.”

아멜리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웃었다.

16553737165577.jpg“다른 누구도 아닌 프리메 제국의 황자 전하께서 오시기에, 특별히 준비했을 겁니다.”

16553737165581.jpg“그런가. 하지만 겉만 화려한 평화가 뭐가 중요하겠어.”

세스가의 시큰둥한 말에 아멜리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53737165577.jpg“그렇죠. 오늘 자리에서 나눌 대화가 중요하죠.”

16553737165581.jpg“하지만 뭐, 이런 화려한 곳에서 화려하게 터트려야 기억에 콱 박히겠지.”

그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마침내 세스가가 먼저 대연회홀로 들어섰다. 세스가의 등장에 귀족 전원이 숨을 죽은 채,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 무수한 귀족들 너머로 아스란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세스가를 반겨주었다.

16553737165603.jpg“어서 오시오, 세스가 황자.”

16553737165581.jpg“솔라의 위대한 태양을 뵙사옵니다. 이리 환대해주셔서 황송하옵니다, 황제 폐하.”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함께 다섯 공작가가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그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아멜리아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16553737165612.jpg“그럼 전 잠시 뒤에 있겠습니다.”

16553737165577.jpg“알겠어요. 조심하세요.”

이클리트는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서, 재빨리 걸음을 뒤로 돌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카힐로와 함께 이 대연회홀에서 은밀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멜리아 혼자서 다섯 공작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니, 어쩐 일인지, 카르티아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알렉드라는 아멜리아를 무시했고, 오직 루시아만이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16553737195471.jpg“피오레 공! 같이 황궁에 있으면 얼굴 보기 쉬울 줄 알았는데, 더 어려워졌네요. 갑자기 이런 큰 회담을 맡게 되다니 말이에요.”

루시아가 세스가 황자를 향해 눈짓하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16553737165577.jpg“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16553737195471.jpg“갑자기 세스가 황자가 피오레 공을 꼭 집어서 지목하다니. 서로 친분이 있었던 거예요?”

16553737165577.jpg“없지만, 서로 뜻하는 바가 같더라고요.”

루시아는 뭔가 심상치 않은 아멜리아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16553737195471.jpg“흐음. 몹시 궁금하네, 이거.”

하지만 아멜리아는 의연하게 말을 아꼈다.

16553737165577.jpg“이번 회담은 진정한 평화 회담이 될 거라는 얘기랍니다.”

  아스란이 세스가와 나란히 서서는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향해 먼저 선언했다.

16553737165603.jpg“3년 만에 이렇게 다시 프리메와 솔라가 함께하는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되었소. 항상 어렵게 모이는 만큼, 진정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로 든든한 동반자로 함께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오.”

귀족들은 아스란의 말에 손뼉을 치며 공감했다. 이번엔 세스가가 그들 앞에 나섰다. 세스가는 우아한 몸짓으로 정중하게 귀족들에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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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가의 예상치 못한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사실 세스가가 대연회홀에 등장한 순간부터, 프리메와 솔라의 신경전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런 영문 모를 말이라니……. 아스란은 살짝 가라앉은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16553737165603.jpg“어찌 그러시오, 세스가 황자.”

16553737165581.jpg“폐하의 진심과는 다르게, 지금껏 평화 회담은 평화의 탈을 뒤집어쓴 채,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였습니다.”

16553737165581.jpg“하! 어찌 저런 말을…….”

16553737165581.jpg“저런 건방진!”

장로 격의 귀족들은 새파랗게 어린 황자가 감히 황제 앞에 평화 회담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는 꼴이 우습고, 건방졌다. 아스란은 겁 없이 당당한 세스가를 보며 안광에 선득한 흥미가 서렸다.

16553737165581.jpg“제가 이 자리에 직접 가고 싶다고 아바마마께 청했던 이유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회담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16553737165603.jpg“대체 어떤 회담을 원하시오?”

16553737165581.jpg“솔라 제국의 태양은 모두에게 비치는 것이고, 프리메 제국의 설풍 또한 모두에게 부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는 위에서 아래로 향해야 완벽하지요. 폐하께서 선언하신 대로 진정한 평화를 위해, 이번에 여는 회담은 아래까지 향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16553737165603.jpg“아래라…….”

16553737165581.jpg“이번 회담을 준비하는 피오레 공과 마음이 일치하여 몹시 기쁘게 생각합니다.”

세스가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아멜리아가 아스란과 세스가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아스란은 그런 아멜리아와 세스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가에 박힌 냉소로 그녀를 훑어 내렸다.

16553737165603.jpg‘이 두 사람이 지금 이 회담으로 뭘 하려는 거지?’

아멜리아는 날 선 표정을 억지로 감추고 있는 아스란 앞에 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53737165577.jpg“폐하께서 제게 이번 회담을 맡기시면서, 꼭 해내야 한다고 해주신 말씀이 있으셨지요.”

16553737165603.jpg‘이번 평화 회담에선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되새기고, 태양신의 축복을 프리메에게도 알릴 수 있도록, 부디 잘 부탁하지.’

  아멜리아는 아스란이 했던 당부를 이용하여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했다.

16553737165577.jpg“폐하의 말씀을 듣고, 저 또한 너무 감격하여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평화 회담이 되어야겠다고 말입니다. 하여, 이번 회담은 모든 제국민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아스란은 아멜리아의 말에 더욱 기묘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553737165603.jpg“태양의 제단을, 제국민들에게 열겠다?”

16553737165577.jpg“그러합니다.”

그 한마디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16553737252616.jpg“미, 미쳤군…….”

16553737165581.jpg“제정신이 아니야. 그 제단이 어떤 곳인데!”

알렉드라는 헛숨을 삼켰고, 뒤에서 지켜보던 신성회와 장로회의 표정 역시 경악에 잠겼다. 귀족들은 진심으로 경악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태양의 제단은 오직 선택받은 귀족들의 영역이었다. 솔라 제국의 건국 이래, 그 제단에 평범한 제국민들이 걸음 한 적은 없었다. 감히 쳐다보지 못할 권위와 위엄으로 귀족과 평민의 계급을 철저히 나뉘어서 통치하는 상징성인데. 그런데 그런 제단을 모두에게 개방하다니……. 이는 귀족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폭탄 발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6553737165577.jpg‘내가 원하는 건 지금부터야.’

16553737165577.jpg“또한, 곧 루베르 장로가 솔라리스에 당도할 것입니다.”

아스란과 신성회, 장로회는 알고 있었으나 다른 귀족들은 처음 듣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16553737165581.jpg“루베르 장로라니…….”

16553737165581.jpg“그들이 움직였다는 거야? 그것도 이 솔라리스로 온다고?”

16553737165581.jpg“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16553737165581.jpg“안 그래도 반인반수로 뒤숭숭한데. 루베르가 갑자기 움직이다니!”

그 서슬 퍼런 웅성거림을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깨뜨리며 말을 이었다.

16553737165577.jpg“평화 회담에 루베르 가주를 대신하여, 루베르 장로가 함께한다면. 진정으로 폐하께서 원하시는 평화를 기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멜리아의 진짜 목적은 루베르를 데뷔탕트처럼 음지가 아닌 양지로. 제대로 된 사교 무대로 데뷔시키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세계로 제대로 나서야, 루베르의 입지가 커질 테니까.

16553737165577.jpg‘제대로 된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겨야 목소리를 낼 수 있어.’

아까는 그저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이제 아주 살얼음판처럼 팽팽하게 흘렀다. 제단을 루베르에게 허락하다니. 결국, 참다못한 알렉드라가 아스란에게로 나섰다.

16553737252616.jpg“폐하! 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태양의 제단에 제국민을 들이는 것도 지나친데, 루베르 장로라니!”

하지만 아멜리아는 지지 않고 아스란에게 말했다.

16553737165577.jpg“루베르 가주 또한 다섯 공작가의 한 사람이니, 평화 회담에 참석할 자격이 있습니다.”

16553737252616.jpg“하지만 그놈은 루베르 가주가 아니다. 그저 야만인!”

16553737165577.jpg“폐하께서 루베르를 솔라 제국민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포르티셰 공은 폐하의 뜻을 거역하시는 겁니까?”

16553737252616.jpg‘이 시건방진 계집이 또다시 이런 폭풍을!’

알렉드라는 교묘한 말로 폐하를 방패 삼고 있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휘몰아쳤다. 그때, 세스가의 목소리가 가볍게 끼어들었다.

16553737165581.jpg“다들 평화를 기원하고자 여는 회담이니, 태양신과 바람신의 의미를 받들고자 하는데, 거절하는 사람은 없겠지. 암. 거절할 이유가 없지. 거절하는 건 태양신과 바람신의 의미를 퇴색하는 것이고, 폐하의 선언 또한 가볍게 여기는 것일 텐데.”

세스가의 시선이 정중하게 아스란을 향하자, 아스란은 입꼬리를 무서우리만큼 추어올렸다.

16553737165603.jpg“물론이오, 세스가 황자. 당연히 진정한 평화 회담을 위해서라면, 모두가 함께해야지.”

16553737252616.jpg“하지만 폐하!”

16553737165603.jpg“포르티셰 공, 더는 짐의 말을 가볍게 하지 말라.”

알렉드라는 이를 악물고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아스란의 시선이 아멜리아를 향했다.

16553737165603.jpg“역시 피오레 공에게 이번 회담을 맡기길 잘했군. 짐의 뜻을 이렇게 깊이 고민하고, 헤아려주다니 말이야.”

경고 서린 섬뜩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은 채, 더없이 단정한 어조로 끝을 맺었다.

16553737165577.jpg“폐하의 깊은 뜻에 그저 감탄하며, 그 의지를 이어가고자 했을 뿐입니다.”

16553737165603.jpg“기대되는군, 이번 평화 회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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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란이 돌아서고, 알렉드라와 신성회, 장로회까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루시아는 나중에 저택으로 따로 찾아갈 테니, 자세히 말해달라고 당부하고서 그녀 역시 홀을 빠져나갔다. 아멜리아는 이미 예상했던 바이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세스가는 감탄했다.

16553737165581.jpg“작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저 살 떨리는 위압감에 나름 밀리지 않네, 피오레 공. 난 포르티셰 공 때문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16553737165577.jpg“물러설 수 없으니까요. 저들보다 제가 더 간절하게 이번 평화 회담의 성공을 원해요.”

이미 방아쇠는 당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하는 과녁에 도달해야 했다.

16553737165581.jpg“나도 기대하고 있어. 특히, 루베르 장로를 만나는 것을.”

  *** 신성회 신관이 알렉드라에게 다가와 차마 그 자리에서 내뱉지 못한 울분을 토했다.

16553737165581.jpg“루베르가 성스러운 태양의 제단에 들어온다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관을 죽인 반인반수와 똑같은 놈들이란 말입니다!”

특히나 신성회는 지난날, 반인반수에 의해 무참하게 죽은 동료를 잊지 못했다.

16553737165581.jpg“지난날 축복의 꽃도 제멋대로 만들어서 우리의 권위를 떨어뜨렸는데. 피오레 공은 대체 뭘 하고자 하는 건지!”

알렉드라는 그 말에 화를 씹어 삼켰다.

16553737165581.jpg“세상 물정 모르는 계집이 회담 하나 맡고는 아무것도 모르고 설치는 겁니다.”

16553737165581.jpg“포르티셰 공작 각하.”

16553737165581.jpg“더는 근본 없이 휘젓게 둘 수 없습니다. 세상에 왜 규칙이 있고, 계급이 존재하는지. 멍청해서 모른다면, 다소 거친 방법을 써서라도 알아듣게 해야지요.”

알렉드라는 아스란의 행보가 다소 이상하긴 했지만.

16553737252616.jpg‘이대로 지켜보실 폐하가 아니시다. 절대!’

  *** 돌아선 아스란의 표정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입꼬리에 걸린 냉소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16553737165603.jpg‘저 계집이 사방으로 적을 만드는군. 장로회와 신성회가 태양의 제단이 더럽혀지는 꼴을 지켜볼 리가 없지.’

아스란은 세스가가 계속 거슬려서, 에리얼을 통해 프리메 제국의 첩자를 이용하여 정말로 이곳에 온 목적을 알아냈다. 정말로 같잖게도, 저 황자는 정말 평화주의자였던 것.

16553737165603.jpg‘세상에 힘없는 평화는 없어. 그것이야말로 거짓된 평화지. 진정한 평화는, 모두를 이기고 그 위에 서는 것.’

프리메와 솔라가 진정으로 화합하는 분위기는 용납할 수 없다. 시간의 숲의 열쇠를 차지해도, 그걸 자신이 독점하지 못한 채, 모두가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으니.

16553737165603.jpg‘태양에 가장 가까운 황제만의 힘이어야 해. 이 땅에 단 하나의 태양만이 존재하듯이.’

그렇기에 세스가와 아멜리아, 저 두 사람은 걸림돌이다.

16553737165603.jpg“이참에 이클리트의 약점을 한 번 흔들어볼까.”

또 다른 걸림돌을 치워내고, 덮어씌우기에 아주 딱이니까. 문득, 창가로 고개를 돌린 아스란의 시선에 로브를 쓰고 우르르 몰려가는 장로회의 모습이 보였다.

16553737165603.jpg‘저 멍청한 장로회가 무슨 짓을 하려나.’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16553737165603.jpg‘시선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시선을 감당하기 버거워질 거다, 피오레 공작.’

각자가 욕망하는 평화가 다르다. 그렇기에 과연 그날, 누구의 평화를 기원하게 될지.

16553737165603.jpg‘정말로 몹시 기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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