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진짜와 가짜2022.03.11.
폭탄 발언 이후, 여전히 전야제는 어수선했으나, 전야제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세스가와 아멜리아는 태연하게 전야제를 즐기고 있었다. 세스가는 한고비 넘겼다는 표정으로 홀 안에서 연주되는 곡을 들으며, 아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실까요? 이번 전야제의 주인공이 된 기념으로.”
아멜리아는 세스가의 말에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황자 전하. 이미 선약이 있어서요.”
“응?”
그 순간, 아멜리아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나타난 이클리트의 모습에 세스가는 피식 웃었다.
“미안합니다, 세스가 황자. 부인이 춤이 서툴러서, 남편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오호, 천하의 피오레 공도 서툰 것이 있군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손을 마주 잡고서 부끄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황자 전하의 발을 몹시 많이 밟을 것 같답니다.”
“그럼 클리오 대공의 발은 밟지 않고?”
“저는 밟아도 상관없고, 밟혀도 상관없어서 말입니다. 게다가 부인의 실수를 감춰줄 수 있도록, 오직 부인만 지켜보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점차 두 사람만의 시선을 교환했고, 세스가는 그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손사래를 쳤다.
“아아. 그런 거라면, 난 자신 없습니다. 난 아프면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것 같거든. 아픈 건 딱 질색이고. 이래 봬도 내 몸을 너무 소중히 아껴서. 피오레 공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스가는 너무 다정한 두 사람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며 걸음을 돌렸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안듯이, 걸음을 옮겨서는 홀 중앙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춤을 추는 척, 밀담을 속삭였다. 물론 그 밀담도 썩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나요?”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한 듯합니다. 떠나기 전,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이클리트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쉽게 우릴 보내지 않겠죠.”
그는 주위의 시선과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귀족들이 아멜리아를 보는 시선에 어딘가 모르게 가시가 느껴졌으니까. 자신이 없는 사이, 그녀가 이곳에서 얼마나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자 노력했을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좀 더 바짝 그녀를 끌어당겼다.
“대공 전하?”
서로의 숨이 뒤섞일 듯, 위태로운 거리 앞에 이클리트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다독이는 어조로 읊조렸다.
“고생했어요.”
아멜리아는 쉼처럼 느껴지는 그 짧은 한마디에 눈가가 시큰거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솔직히, 지금 이 밤이 너무 길고 고단했다.
“이제 시작인걸요.”
이클리트는 그녀의 등 뒤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다.
“이 뒤는 내게 맡겨요. 말했잖아요? 서로가 지켜줘야 한다고.”
아멜리아는 부드럽게 웃었고, 그 웃음이 그에게도 나직이 전해졌다.
“이렇게 한 번 기댈 수 있게 해주고.”
그녀는 손을 뻗어 이클리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을 마주했다.
“이렇게 얼굴도 보게 해주고.”
춤곡이 빨라지고, 이클리트와 아멜리아의 움직임도 덩달아 빨라지며, 허리를 감싼 서로의 몸을 더욱 바짝 밀착시켰다. 아멜리아는 은근슬쩍 그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나한테 엄청 힘이 돼요.”
음악이 잦아들고, 멀어지는 것이 영 아쉬웠다.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내가 이렇게.’
‘춤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조금 더 이 시간을 오래, 오래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 아멜리아에 관한 관심이 좋든, 나쁘든 많아졌고. 그녀 또한 사교계도 소홀할 수 없었기에, 이클리트가 잠시 어떤 준비를 위해 멀어진 사이, 아멜리아는 다른 귀족들과 대면하면서 홀 안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건 세스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히려 황자인 그의 주변으론 귀족들이 더 넘쳐났다. 아멜리아는 전야제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살짝 뒤로 걸음을 내디디고서, 구석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댔다.
“하아. 역시 이런 무도회는 지쳐.”
잠시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던 아멜리아는 다시 정신을 챙겼다.
‘그래도 지친 기색을 보일 수는 없지.’
여기저기서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오늘 밤은 더더욱 경계를 늦춰선 안 되니까. 그녀가 겨우 기둥에서 몸을 떼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을 헛디디고 휘청거리자 누군가 그녀를 대뜸 잡아주었다.
“조심해.”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아멜리아가 재빨리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태연한 시선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도 오신 줄 몰랐네요.”
“이 황궁에, 내가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오히려 황궁을 어지럽힌 건 그쪽이지.”
“…….”
“이클리트 때문에 계속 악수를 던지는군.”
“악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지극히 당연한 걸 하려는 거죠.”
“세상은 절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 귀족이면 귀족답게 굴면서 그들 편에 있어, 아멜리아. 너만 점점 더 위험해지고, 위태로워질 거야.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고.”
그녀를 훑어 내리는 그의 시선이 점차 길어지자, 아멜리아는 그조차 치가 떨린다는 듯 그를 밀어냈다.
“내가 전에도 말했죠? 감히 날 걱정하지 말라고.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킬 거고, 설령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당신은 아니에요. 나의 남편이 곁에 있어 주니까.”
아멜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에드조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야말로 조심해요. 굉장한 악수를 숨기고 있는 것 같으니까.”
에드조프는 아멜리아의 말에 한층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내가 뭘 숨긴다는 거지?”
“그건 당신이 알 텐데.”
“대체 내가 뭘…….”
에드조프가 다시 한번 아멜리아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찰나, 그녀의 곁으로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클리트가 다가왔다. 에드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곤, 그를 노려보았다.
“이클리트.”
하지만 이클리트는 단정한 표정으로 에드조프를 대했다.
“잠시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부인과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이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에드조프의 눈빛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뭐?”
“예전부터 체자렛 백작가와 교류하셨으니, 그저 인사를 나눈 거 아니십니까.”
이클리트의 푸른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에드조프를 마주했다. 에드조프는 그 눈빛에 점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이 거리에서 한 발자국도 아멜리아에게 다가갈 수 없는데. 이클리트는 당연하게 그녀의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전과 전혀 다른 여유로움.
‘무슨 짓을 해도 내 여자다, 이건가. 웃기는 소리!’
에드조프는 달라진 이클리트의 태도에 더욱 분노하며 입을 열려는 순간.
“키르케 유모는 잘 계십니까?”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에드조프의 경직된 입술이 버석하게 호흡을 잃고 말았다.
“네놈이 키르케를 어떻게…….”
급변한 에드조프의 모습을 아멜리아조차 눈치챌 수 있었다.
‘눈동자가, 떨리고 있어.’
이클리트는 에드조프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은 채, 덤덤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역시 황궁에서 살았는데, 형님의 유모를 모르겠습니까?”
“네놈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저 유모의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그렇게 정색하실 일입니까?”
“황궁에 관해서 신경 쓰지 마!”
“안 쓸 수는 없지요. 저 또한 지금 황궁에 있고,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은근히 묻어나는 황위에 대한 욕망에 에드조프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주제도 모르고 어딜 감히. 이 나라가 너 같은 괴물을 받아줄 것 같으냐.”
“그래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나라를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천천히, 그러다가 통째로.”
이클리트는 에드조프에게 성큼 다가와선 떨쳐내지 못할 만큼, 느릿하게 죄어오는 시선으로 읊조렸다.
“이미 이렇게 형님 바로 눈앞에 있는 것도 달라진 거니까.”
에드조프는 엉망으로 튀는 자기감정에 일순 말문이 막혔고, 이클리트는 태연하게 뒤로 물러나선 가볍게 고개 숙였다.
“그럼 형님, 전야제를 좀 더 편히 즐기시지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팔짱을 끼고서 에드조프에게서 돌아섰다. 에드조프는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은 비명을 꽉 삼키고서 그대로 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텅 빈 복도에 세워져 있는 철갑 기사의 칼을 빼내고서 마구 휘두르며 악을 삼켰다.
“이클리트, 저 괴물 새끼가 감히!”
엉망으로 헝클어진 에드조프의 잇새 사이로 이클리트의 이름이 무참히 짓밟혔다. 이클리트가 이 황실에 있을수록. 정말로 제 눈앞에 태연하게 서 있을수록. 떨쳐내지 못할 두려움이 부풀며 그를 뒤흔들었다. 아무리 괴물 새끼라고 외쳐도, 밝히고 싶은데, 밝힐 게 없다는 진실에. 밝힐 수 없다는 그 진실 하나에.
‘저 새끼가 인간이라는 게 드러나면 안 되니까. 그건 오히려 역효과니까.’
에드조프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불안하게 뛰는 심장 앞에 속삭였다.
“키르케를 왜 묻는 거지. 저 자식이 내 유모를 안다고? 아니야. 저 자식은 항상 그 지하실에 갇혀 있었어. 그럼 왜 묻는 거야. 뭔가를 눈치챈 건가? 아니지. 그럴 리 없지. 그럴 리 없다고!”
아무리 아닌 척해도, 이클리트가 자꾸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워내는 것 같았다. 이 황궁에서의 자리도. 아멜리아, 그녀의 옆자리까지. 그때, 복도 끝에서 키르케가 발소리도 없이 그의 앞으로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에드조프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거칠고 불안한 숨을 내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새끼가 너에 관해서 묻더군.”
“그런가요?”
“알게 되면 끝이야. 내가, 괴물이라고 알려지면 끝이라고!”
처음으로 에드조프가 자신이 반인반수임을 인정하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조차 괴물이라 원망하고, 부정할 만큼. 그는 반인반수를 끔찍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클리트가 황궁에 머물면 머물수록, 그의 이성이 깨져가는 게 보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 쳐도, 이클리트를 볼 때마다 에드조프는 강제로 진실을 사살당해야 했다. 가짜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항상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는데. 이러다간 정말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거라는 사실이, 그를 온전치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키르케는 그런 에드조프를 천천히 안아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공 전하는 황제가 될 거고, 저쪽은 진짜 괴물이 되어 추락할 테니.”
“뭐?”
“어차피 먼저 밝혀지는 쪽이, 제물이 되면 되니까.”
*** 이클리트와 함께 돌아선 아멜리아는 에드조프의 그 찰나의 빈틈을 계속 되뇌며, 입을 열었다.
“분명 유모에게 뭔가가 있긴 있나 보네요. 에드조프가 저렇게 금세 표정을 무너뜨리는 건 드무니까.”
만약, 유모가 밀주 사건의 배후라면.
‘유모가 그 뱀의 수인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황실 사람이 수인으로 숨어 있는 거지? 그것도 황자의 유모로? 황제가 열쇠를 만들려고 다른 방법까지 동원한 건가.’
사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몰래 수인을 들여서 자신의 피를 잇게도 만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뱀이 두 마리라면. 다른 한 마리는 어디 있는 거지?’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걸 보며 걸음을 멈췄다.
“남편을 두고 너무 다른 남자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응?”
“게다가 에드조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고.”
이클리트는 맞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신경 안 쓰고 싶어도, 쓰이네요.”
아멜리아는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그의 손을 살짝 당겼다.
“나도 곤란하네요.”
그러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런 모습이 자꾸 귀여워 보여서.”
이클리트는 곧장 그녀의 목덜미를 물듯, 입술을 눌렀다. 아멜리아는 그의 까칠한 숨결에 몸을 떨며 그를 붙잡았다.
“아, 안 돼요. 남들에게 보이면!”
“보이지 않게 했어. 겨우 참고 있는데, 참을 생각도 못 하게 하지 말아요.”
솔직하게 쏟아지는 목소리에 아멜리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모른다. 그만 참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도 준비됐어요.”
그때, 그의 손길이 그녀의 드레스 춤을 쓱 밀어 올렸다. 그녀는 허벅지에 닿는 싸늘한 감촉과 귓가에 울리는 딸칵이는 소리에 눈동자가 멎었다. 아멜리아는 말없이 이클리트를 보았고,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보며 속삭였다.
“전야제가 끝날 시간입니다.”
“……이제, 돌아가야겠네요.”
*** 밤이 깊어졌다. 돌아갈 준비를 마친 세스가는 뭔가 비어 있는 듯한 호위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올 때보다 티어들이 안 보이네?”
아멜리아는 세스가와 함께 마차를 탈 준비를 하며 말했다.
“티어들은 원래 보이지 않는 존재랍니다. 각자 있어야 할 곳에 있을 거예요. 보고 싶어도, 오늘 밤은 서로 안 보는 게 좋죠.”
“하긴. 저격수니까. 근데 피오레 공은 나와 한 마차를 타는 건가? 클리오 대공은 말을 타는 것 같은데. 내가 부부 사이를 방해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그럼 돌아가실까요?”
“아아. 고된 하루였어. 앞으로 더 고되겠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되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전야제의 막이 내렸는데, 어째 이제부터 시작인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