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우려가 현실로2022.03.14.
황궁에서 저택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단 하나였다. 평소에는 이 길이 전혀 위협되지 않는 안전한 길이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잘 가던 마차가 갑자기 쿵 하고 멈추면서 고요한 적막을 깨부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세스가가 흠칫하며 곧장 아멜리아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아멜리아가 세스가의 앞으로 나선 채, 문을 노려보았다. 세스가는 아멜리아의 뒤에서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우려했던 일인데, 결국 일어난 일이겠죠.”
“응?”
순간, 마차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멜리아는 세스가를 향해 외쳤다.
“엎드리세요, 황자 전하!”
검은 로브를 입은 암살자가 곧장 세스가를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아멜리아가 쿠션으로 막고서 외쳤다.
“네놈들이 지금 감히 누굴 건드리는지 아는 것이냐!”
암살자를 방해가 되는 아멜리아를 노려보며 입꼬리를 쭉 찢었다.
“피오레 공작인가 보군. 클리오 대공은 도와주지 못할 거다. 저쪽도 꽤 바쁘니까.”
“대공 전하께서 도와줄 필요 없어.”
“천재 머스켓티어라고 듣긴 했지만, 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지? 황궁에선 무기 소지가 금지니까.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는 여전히 세스가 앞을 지키며, 여유가 묻어나는 어조로 짧게 속삭였다.
“하지만 여긴 밖인걸.”
“뭐?”
아멜리아는 다시 한번 암살자를 향해 쿠션을 집어 던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칼로 쿠션을 베어버렸다. 사방이 하얗게 일그러질 정도로 거위 털이 쏟아져 흩날렸다.
“장난은 이제 끝…….”
하지만 암살자는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총구. 아멜리아가 순식간에 드레스 춤에서 꺼낸 총으로 암살자를 겨냥한 채 온기 한 점 없는 시선으로 읊조렸다.
“장난은 여기서 끝났지.”
암살자는 아멜리아의 싸늘한 눈빛 아래 떨리는 숨을 삼켰다. 그저 클리오 대공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는…….’
“칼보다 총이 빠르다는 건 상식이겠지?”
마치, 암살자의 머릿속을 꿰뚫기라도 한 듯.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암살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어차피 안 될 거, 힘 빼지 마. 너희가 받은 명령만 생각해. 황자를 납치하는 게 목적이지, 피를 보는 건 아니잖아?”
“그걸…….”
암살자는 경직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나.’
“받은 돈만큼만 일해. 충성심 따위 없으면서, 있는 척하다가 괜히 아까운 목숨 축내지 말고.”
세스가는 아멜리아의 뒤에서 자신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것이 총 든 피오레 공작의 진짜 모습인가.’
뜻밖의 위압감에 온몸으로 오싹함이 짓눌렸다. 아무래도 프리메가 알고 있는 피오레 공작의 정보는 꽤 많이 잘못된 듯하다.
‘클리오 대공의 아내, 그게 다가 아니잖아.’
아멜리아가 암살자를 붙잡은 채, 마차 밖으로 나섰다. 이미 이 모든 일을 예상했었기에, 티어들이 암살자 전원을 쉽게 제압한 상황이었다. 이클리트는 조금 멀리서 약간의 피가 묻은 칼을 닦아내며,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행히 하나도 다치지 않은 모습에, 그제야 그는 안도하며 숨을 고르게 내쉴 수 있었다. 세스가는 너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렇게 될 줄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냉랭한 표정을 띠고 있던 아멜리아가 금방 눈매를 풀고서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확신하진 못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아니길 더 바라기도 했었고…….”
세스가는 아멜리아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설마, 회담을 망치려고?”
“어떻게든 방해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어설프게 행동했네.”
“황자 전하를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니까요. 황자 전하를 조금이라도 다치게 하거나, 납치해서 회담을 망치고 제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미리 파악한 건 이클리트였다. 그가 전야제 때 아멜리아와 같이 있지 않고, 카힐로와 은밀히 황궁을 살피던 도중. 장로회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던 것이다. 아마 겉으로 드러내진 못해도, 이번 회담에 제국민까지 끌어들여 귀족들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에 장로회는 엄청난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다. 지난번 축복의 꽃을 피오레 영지민에게 보여준 것도 큰 반발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혹시 몰라,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안아주는 척 몰래 준비한 그녀의 총을 채워준 것이었다. 사실 이클리트로서는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고 지켜주고 싶었지만.
‘마차는 나한테 맡겨요. 아마 저들도 생각이 있으면, 대공 전하의 발목부터 잡으려고 할 테니.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하지만…….’
‘괜찮아요. 절대로 죽이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총만 있으면 나도 쉽게 안 당해요.’
이클리트의 도움만 받을 수 없었기에 고집부린 결과, 다치지 않고 끝나서 다행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다음엔 세상이 두 쪽 나도 대공 전하께서 내 곁에 있으셨겠지.’
아멜리아는 멀리서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한 눈빛을 쏘고 있는 이클리트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주었다. 카마리는 제압한 암살자를 끌고 아멜리아에게 데려가, 무릎을 꿇렸다. 아멜리아는 다섯 명의 암살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산 채로 데려가야겠죠? 물론 장로회 짓이겠지만, 더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훗날 장로회의 약점으로 써먹을…….”
“흐윽!”
그 순간, 갑자기 암살자들이 신음을 내뱉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며 죄다 쓰러졌다. 카마리가 곧장 달려가서 살폈으나, 어둡게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작전이 성공했어도, 이렇게 됐을 모양입니다.”
아멜리아는 이 참혹한 광경에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헛숨을 내쉬었다.
“하. 정말이지 사람의 목숨을 너무 하찮게 여기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너무 쉽게 이용하고, 쉽게 버리고…….”
세스가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을 해하려고 했던 이들이라지만, 이들은 어차피 도구일 뿐. 이 도구를 휘두른 사람은 아마 멀쩡하게 웃고 있을 테니까. 뒤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달려온 이클리트와 이사나는 끔찍한 광경에 멈칫했다. 이사나는 죽은 시신을 살피다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 한 명이 부족합니다.”
이클리트는 이사나의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멜리아와 세스가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사나는 다른 티어들과 잠시 얘기하다가 확신하고 말했다.
“분명 저희가 멀리서 파악했을 때, 여섯 명이었습니다. 한 명이 빠져나간 듯합니다.”
티어들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이클리트는 곧장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위협이 된 자를 살려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쫓을 테니, 먼저 가십시오. 카마리 경, 남은 호위를 부탁한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붙잡았다.
“혼자서 간다고요? 이 야밤에?”
이클리트는 불안 섞인 그녀의 눈동자를 안도하는 시선으로 다독여주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혼자가 편해요.”
아멜리아는 하는 수 없이 잡고 있던 그를 놓아주었고, 이클리트는 곧장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스가 역시 살짝 걱정되는 어조로 말했다.
“정말 혼자 괜찮은 건가? 아무리 괴물 대공이라 불리는 사람이지만…….”
“괜찮을 겁니다. 지금은 황자 전하를 무사히 저택까지 모셔가는 게 중요합니다.”
세스가는 또다시 금방 표정을 바로 하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점점 더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그러곤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올렸다.
“그렇지. 일단은 당신과 내가 무사해서, 회담을 여는 게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날 좀 잘 지켜줘. 난 싸움은 못 해. 폭력 반대를 외치는 사람이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엉망이 된 마차를 수습하며, 다시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세스가는 티어들을 재정비하는 이사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는 너무 정신없어서 잘 못 봤는데, 이제 보니 굉장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저자도 티어인가? 아까 대공과 같이 있었던 걸 보면, 단장쯤 되는 건가?’
다시 출발 준비를 마친 아멜리아는 이사나와 카마리에게 당부 섞인 명을 내렸다.
“혹시 모르니, 경계 늦추지 말고 잘 부탁해요.”
“예, 가주님.”
바짝 경계하는 카마리와 달리 이사나는 일부러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티어들이 조금의 수상한 낌새도 놓치지 않고 지킬 겁니다.”
“고마워요, 이사나 경.”
그렇게 하나둘 마차가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아멜리아와 세스가를 태운 마차까지 출발하는 걸 보고서야, 고민에 빠진 듯 망설이고 있었다. 카마리는 그런 이사나에게 다가와서는 재촉했다.
“얼른 우리도 출발하죠.”
“흠. 그게, 가주님 표정이 계속 걸려서 말이죠.”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괴물 대공 전하라지만, 그래도 이 야밤에 혼자서 무슨 일 생기면, 우리 체면도 말이 아니잖아요?”
결국, 이사나는 장총을 챙겨 들고서 이클리트가 떠난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이사나 경!”
“칼렌에게 나머지 호위를 부탁한다고, 카마리 경이 좀 전해줘요.”
“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대공 전하도 우리가 호위해야 할 분입니다. 한 명은 따라가야죠.”
이사나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불안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카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십시오.”
“걱정 마요. 대공 전하와 함께 무사히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이사나가 사라지고, 카마리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 도망친 암살자 한 명을 추적하고자 아멜리아와 떨어진 이클리트는 그놈의 냄새라거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사방으로 바람을 일으켰고, 땅의 진동까지 느끼고자 집중했다.
‘녀석이 어디로 가고 있지?’
땅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분명 아주 사소한 진동이라도 느껴질 터. 이클리트가 눈을 감고서 이 공간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던 찰나. 그가 시뻘게진 눈을 뜨고서 고개를 들었다.
‘찾았다.’
하지만 이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 암살자라서 그런지 이동이 꽤 빨랐다. 이클리트는 하는 수 없이 주변을 살피면서 인기척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날개를 펼쳐서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마치 바람처럼, 이클리트가 순식간에 도망치는 암살자의 머리 위에 다다랐다. 암살자는 그들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생각한 채, 방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암살자의 걸음이 살짝 느려진 순간, 갑자기 바닥이 쿵 하고 울리면서 눈앞에 시커먼 존재가 암살자를 삼켰다.
“하아, 하아…… 누, 누구…… 윽!”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이클리트의 손이 암살자의 목덜미를 금방이라도 비틀어버릴 듯 움켜쥐었다.
“흐으윽!”
암살자는 허공에서 파들거리며 겨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엉망으로 일그러진 암살자의 얼굴을 느리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괴, 괴물…….”
이클리트는 이젠 식상할 정도의 반응이라 별말 없이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저 딱 기절만 시켜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큭! 우욱!”
갑자기 하얗게 질린 암살자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일순, 이클리트의 동공이 선득해지면서 암살자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대로 즉사해버린 모습.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 이미 온몸으로 독이 퍼진 듯했다.
“쓸모가 있을 줄 알았더니.”
이런 짓을 벌인 장로회는 그나마 어설픈 거다. 진짜는 평화 회담으로 가는 길목. 아마 포르티셰 공작과 에드조프가 움직일 거다. 고요하게 내리뜬 그의 눈동자가 죽은 암살자의 위를 오래 머물렀다.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나 또한 대놓고 죽여 버리면 되는데…….’
포르티셰 공작이 움직이면, 굉장히 치밀하게 움직일 거다. 피오레와 더불어 솔라의 군부를 지키는 포르티셰 공작가의 가주이니. 미리 파악할 수 있을까. 파악한다고 해도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그의 눈동자에 잠깐 불안이 깃들었으나, 단 하나만을 붙잡고서 단단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어떤 짓을 해서도 반드시.
‘아멜리아, 그녀는 손끝 하나도 못 건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