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우린, 제물이었다 (1)2022.03.25.
하늘이 노을에 푹 잠기듯 물들었다. 아니, 노을이 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하늘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 얼어붙은 땅에 눈이 죄다 녹아내릴 만큼, 엄청난 화염 때문에 하늘이 저렇게 피처럼 시뻘겋게 칠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하늘은 고요한 편이었다. 문제는 비명이 난무하는 설원이었다.
“도망쳐!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악!”
영주가 마을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있었다. 사방으로 폭음이 쏟아지고, 어디서 공격당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야 했기에, 마을 사람들은 평생 살았던 고향이 불타는 것을 눈물로 바라보며 서둘러 피난길에 나섰다. 대국인 솔라가 공국인 루베르를 침략했다. 전쟁이 할퀴기 시작한 대지는 온통 피와 절규로 얼룩진 채, 나락으로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루베르는 솔라를 막아낼 전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정령을 신으로 모시면서, 소국치고는 꽤 많은 고대 마법사를 배출했던 루베르였으나, 시간의 숲이 봉인되고. 정령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면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니. 그들의 전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물론 마법 도구 장인들이 루베르에 많았지만, 이런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기에 무기로 쓸 만한 마법 도구가 있지 않았다. 결국, 솔라에 엄청난 군사력 앞에 루베르는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스승님, 도망치십시오!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시는데! 이러다가 스승님이 돌아가십니다!”
“그렇다고 루베르를 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 검이라도 들고 싸워야지!”
고대 마법사와 그의 제자가 어설프게 검을 잡고, 솔라 병사들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포르티셰 공작가 기사들의 세이버에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스승님!”
“흐윽!”
“스승님!!!”
기사들의 세이버는 가차 없이 고대 마법사들의 힘없는 검을 베어내며, 목숨을 빼앗았다. 또한 피오레 공작가의 티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탄을 쏘아대니, 사방을 찢어대는 총성 앞에 그들은 비참한 희생양이 되어 새하얀 눈을 피로 적셨다.
“하아…… 하아. 말도 안 돼…… 여긴, 지옥이야…….”
세이버에 심장이 꿰뚫린 스승을 붙잡고서, 제자는 허망한 시선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불씨를 품은 눈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치 마지막 진혼곡을 연주하듯 바람이 음울하게 불었다. 제자는 덧없는 기도를 올렸다.
“정령들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도와주소서, 제발…….”
하지만 기도는 듣는 이 없이, 또 한 번의 총성과 함께 제자 또한 스승의 몸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정령들이 떠나고, 남겨진 루베르는 이렇게 비참하게 짓밟히며 무너지고 있었다. 대국 앞에 공국은 이처럼 보잘것없이 초라하고 약했다. *** 왕궁에선 루베르 장로들이 루베르 국왕 앞에 무릎을 꿇고서 결의를 보였다.
“국왕 전하, 이대로 가다간 왕도가 뚫릴 것입니다. 아니, 왕도가 뚫리기 전에 루베르의 절반이 불타거나, 없어질 겁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솔라 제국의 황제가 대체 어떤 협상을 내놓은 것입니까!”
루베르 국왕은 장로들의 피 끓는 안달에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전쟁 이후, 솔라 황제는 단 하나의 협상을 내놓았다. 루베르를 속국으로 만드는 것. 이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항복하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받아들이면, 루베르는 끝장이다. 더는 지금의 루베르로 지킬 수가 없음이야.’
그렇다고 전쟁을 계속 이어갈 수도 없었기에, 루베르 국왕의 근심은 커지고 있었다. *** 국왕 회의를 몰래 들여다본 왕세자, 루에는 어린 루비엔의 손을 잡고서 걸음을 돌렸다. 루비엔은 너무 어리기에 왕도 밖의 상황을 잘 몰랐으나, 루에는 이대로 가다간 루베르가 멸망하게 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형님. 형님!”
“루비.”
불안에 빠져 있던 루에를 루비엔이 깨우며 말했다.
“형님, 우리가 솔라에 지는 거야?”
루에는 한껏 헝클어진 루비엔의 분홍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쓰다듬어주고서, 의아함이 가득한 선홍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린 루비엔은 이 상황이 그저 이기고, 지는 전쟁 게임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말해주기엔 너무 두렵고 무서운 일이기에, 루에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잘 모르겠어.”
“지면 어떡해. 이겨야지! 게임에선 무조건 이기는 게 좋은 거라고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어.”
루에는 철없는 소리를 하는 루비엔이 마냥 안쓰러웠다.
“하지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지는 걸 택해야 할 때도 있어.”
“왜?”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죽는다고?”
“그들이 살아 있어 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완전히 지는 건 아니야.”
“형님…….”
루에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으로 조금 격하게 입을 열었다.
“루베르는 지지 않아. 정령들의 화가 풀리고, 다시 돌아오면. 분명 우릴 다시 지켜주실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루비엔이지만, 루에의 슬픈 눈동자를 보면서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지는 것도 필요하다지만, 그래도 이기면 기분 좋게 다 지킬 수 있는 거 아닌가?
“형님, 그럼 수인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응?”
“수인은 우릴 도와줄 거야. 우리도 수인을 지켜주잖아.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사이라고 했잖아.”
지난날, 수인들이 저주받은 홍안의 계승자라며 핍박당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루베르가 손을 내밀고서, 그들의 수호자가 되었다. 수인은 루베르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며, 함께 어울렸고. 수왕과 루베르 국왕은 어려운 일도 함께하자며 맹약을 새겼다. 비록, 수인은 불필요한 살생을 결코 하지 않는 종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간절한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루에는 루비엔의 말에 떨리는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수왕 폐하께서는…….”
루비엔의 생각대로, 루베르 국왕은 일단 수왕에게 도움을 청해보기로 하곤, 급하게 전령 보냈다. 하지만 수인들도 정령 때문에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아서, 루베르와 오가던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러나 루베르 국왕은 희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수왕에게 전력을 보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하고 있었다.
*** 루비엔은 형님과 아바마마에게 칭찬을 듣고 싶어서,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수인들이 사는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루비엔에겐 승마를 가르쳐준, 말의 일족인 페르소라는 이름을 가진 오랜 친구가 있었다. 분명 페르소에게 연락을 취하면, 수왕 폐하께 목소리가 전해질 거라고 루비엔은 믿었다. 그런데, 어쩐지 숲의 분위기기 심상치 않았다. 항상 시끄러울 정도로 들리던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숲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오싹한 적막감이 맴돌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잠시 멈췄던 눈이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페르소? 페르소 여기 없어?”
루비엔은 두려움을 꾹 참고서 페르소의 이름을 외쳤다. 항상 어디서든 이름만 불러도 페르소가 곧장 달려와 줬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페르소의 발굽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페르소? 페르소!”
그제야 루비엔의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 이름을 외치자 땅이 쿵쿵 울리면서 새하얀 말이 루비엔의 눈앞에 나타났다. 루비엔은 물기 섞인 눈망울로 환하게 웃으면서 페르소에게 달려갔다.
“페르소! 어떻게 된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그런데 어쩐지 다가오는 루비엔을 페르소가 피하면서 짧게 입을 열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겁니다.”
“뭐?”
“전 이제 이곳을 떠나요. 모든 수인도 그럴 겁니다.”
루비엔은 페르소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떠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가 네 고향이잖아.”
“미안해요, 왕자 전하. 우린 더 만나면 안 돼요. 당신들만 지금 상황에서 더 곤란해질 거예요.”
루비엔은 거짓말이 아닌 듯,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페르소의 모습에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하지만 너희가 떠나면 어떡해? 우린 너희를 지켜줬잖아. 우리가 수호자였잖아. 아바마마가 곤란하셔. 형님도 그렇고. 이대로 가다간 지고 만다는데, 다들 슬픈 표정이야. 때론 지는 것도 필요하다지만, 그래도 이겨야 기쁜 거잖아. 응? 우릴 도와줘. 페르소, 제발!”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페르소는 마지막으로 루비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이내 순식간에 뒤돌아서서 달려가 버렸다.
“안 돼…… 페르소! 페르소!”
루비엔은 페르소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말의 일족의 속도를 한낱 어린 인간이 쫓아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홀로 남겨진 루비엔은 불안감에 커져 버린 눈동자로 사방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설풍이 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이 텅 빈 것 같은 숲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이곳에 살던 수인들이 모두 떠나버린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수왕께서는 도와주실 거야. 그래.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어. 우린 서로 돕고 사는 친구라고. 그러니까…….”
하지만 그가 수인을 본 것은 지금, 떠나는 페르소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수인들이 전부 감쪽같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렸다. *** 루베르 국왕은 끝내 수왕의 답을 듣지 못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에 루베르의 피 끓는 절규와 오열이 그치지 않았다. 눈밭에 어찌나 계속 시신을 묻었는지, 새하얀 대지가 핏자국으로 얼룩져선 이조차 묻을 땅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결국, 루베르 국왕은 솔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난번 협상을 받아들이겠소. 루베르만은 부디 살려주시오.”
솔라 황제는 무릎 꿇은 루베르 국왕을 싸늘한 시선으로 훑어 내리며 예전과 다른 협상을 내놓았다.
“이제는 그때와 상황이 다르지. 이미 우리가 이긴 전쟁인데. 좀 더 내게 유리한 협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루베르 국왕은 이미 각오한 표정으로 품에서 단검을 꺼내서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물론이오. 루베르만 살려준다고 약조하면, 불필요한 목숨은 없애 드리겠소.”
솔라 황제는 루베르 국왕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그대의 목숨을 걸겠다?”
“아무리 다 쓰러진 공국의 국왕이라고 하나, 협상의 카드로는 쓸 만하지 않겠소?”
“흠……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스스로 그리해주겠다면, 훗날을 위해서도 괜찮겠지. 역시. 자기 자신보다 루베르를 먼저 택한 그대는 끝까지 국왕이오.”
“그럼, 받아들이는 것이오?”
“마지막 가는 길은 예우해드리겠소.”
루베르 국왕은 솔라 황제의 배려 아닌 배려에 쓴웃음을 지었다.
“……고맙소.”
그 말을 끝으로 루베르 국왕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단검으로 곧장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루베르 국왕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솔라 황제는 그 모습을 무심히 보며 고개를 돌렸다.
“전쟁은 끝났다. 루베르는 이제 우리 솔라 제국민이 될 것이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루에와 루비엔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이미 숨을 거둔 국왕을 붙들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아니 되십니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일어나세요! 아바마마, 안 돼요. 제발, 아바마마!”
어린 루비엔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상실감에, 모든 삶이 지옥으로 처박히는 것 같았다. 루비엔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왜!’
*** 처음엔 루베르를 속국으로 만들겠다던 솔라 황제는 속국이 아닌, 루베르를 있는 그대로 솔라에 흡수시켰다. 하지만 루베르 국왕이 어떻게 숨을 거뒀는지 루베르에게 알려지면서, 그 죽음에 분개하며 끊임없이 반란군이 튀어나왔다. 이미 잃을 게 없었던 루베르의 저항은 심했다. 솔라 황제는 무의미한 반란을 멈추고, 루베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루에를 직접 만나서 뜻밖의 제안을 했다.
“루에, 그대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도록 하지. 솔라에서 공작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겠지?”
솔라의 공작은 황제와 겨룰 만한 힘을 가지게 된다. 황실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공작령을 통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루에는 지친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루베르가 모두 죽고, 멸망하게 될 테니까.
‘살아야 해. 어떻게든 버텨서, 정령들이 돌아오는 날. 예전의 루베르로 돌아가야 해. 그게, 돌아가신 아바마마의 뜻이야.’
“공작 작위를 얻게 되면, 우리 영지에서 자유롭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라고 주는 작위야. 우리 황실은 공작령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그럼 책임지고, 지금의 반란군을 멈추게 하겠습니다.”
루에는 루비엔과 루베르 모두를 데리고 북쪽, 원래 그들의 영토로 모습을 감췄다. 그때부터 루베르는 다섯 공작가가 되었으나, 철저히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 *** 루베르 공작령에서 루에는 루베르를 예전으로 돌려놓고자, 끊임없이 수왕에게 연락을 취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수인과 수왕밖에 없었기에. 하지만 수왕의 답은 없었고, 수인의 흔적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루에는 마지막 희망마저 놓을 수밖에 없었다. 루에의 부름으로 그의 침실로 간 루비엔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술에 잔뜩 취해, 루에가 엉망으로 망가진 모습으로 루비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형의 낯선 모습에 루비엔이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자, 루에가 그런 루비엔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아직은 작디작은 루비엔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혀, 형님…….”
“루비, 우리 루비. 이 어리석은 형이 이제야 깨달았어. 우린 버림받은 거야.”
“형님?”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답을 내린 거였어.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는데…… 정령들을 위해 기도하고, 수인들을 지키기 위해 수호자가 되고!”
억눌렸던 분노가 삽시간에 터져 나오면서, 광기로 얼룩진 루에의 표정에 루비엔은 공포에 떨었다.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자며 약조했던 맹약은, 거짓이었던 거야. 우린 제물이었어. 수인에게 이용당한 제물이었다고!”
“아, 아니야. 그들은 우리 친구야. 분명 페르소가 다시 돌아와서…….”
“잘 들어, 루비. 이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해. 우리밖에 없어. 우리가 루베르를 지켜야 한다고!”
루베르를 지켜야 한다는 루에의 말이 너무 무거운 쇠사슬이 되어 루비엔의 온몸을 파헤칠 만큼, 죄어왔다. 해가 바뀌면서, 솔라 황제가 루베르를 속국으로 삼지 않고 공작가로 만든 그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또다시 루베르를 이용하기 위해. 몹시 잔인한 야욕이 움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