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태양의 눈 아래에서
(134/199)
134화. 태양의 눈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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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태양의 눈 아래에서
2022.04.15.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 아멜리아는 티어의 제복을 갖춰 입고서 칼렌 앞에 서 있었다.
칼렌도 몹시 긴장하고 경직된 자세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그런 칼렌을 보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칼렌 경에게 이번 평화 회담의 모든 호위를 맡길 겁니다.”
칼렌은 그 말에 살짝 움찔하며 너무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던 걸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가주님. 단장님은 현재 어디 계시는 겁니까?”
아멜리아는 쓴 호흡을 삼키며, 애써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잠시 긴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이라는 말에 칼렌의 눈동자에 걱정이 스몄다.
“오래, 돌아오지 못하는 임무입니까?”
“어쩌면. 하지만 반드시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않습니다. 단장님은 강하시니까요. 분명 가주님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오실 겁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에 대한 신뢰가 깊은 칼렌을 보며 괜스레 마음이 걸렸다.
당장 티어들에게 이사나의 정체에 관해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심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테니까.
‘적어도, 평화 회담이 끝난 이후여야 해.’
이사나가 피오레에서 얼마나 티어로서 존경받으며 지냈는지, 비단 칼렌만이 저런 깊은 신뢰를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렇기에 칼렌 경이 이번 회담에선 임시 단장이 될 겁니다.”
“반드시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칼렌의 가슴에 임시 단장을 칭하는 배지를 달아주었다.
칼렌은 그 배지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임시라고 해도 얼마나 무수한 책임과 목숨이 오가는지 알았기에, 더더욱 자신의 태도에 결의를 품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존명!”
칼렌이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케이트가 아멜리아를 찾아왔다.
마지막까지 회담 준비를 도와주었던 케이트는 정작 회담장에는 함께하지 않았다.
“가주님.”
“아, 케이트. 아이냑의 마법 도구는 무사히 보냈나?”
“예, 신경 써서 보냈습니다.”
“후야제 때 멋진 폭죽을 같이 보면 좋을 텐데. 왜 함께 가지 않겠다는 거야?”
아멜리아가 아쉬운 듯 말하자, 케이트가 역시나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는 이 저택을 지켜야 합니다. 가주님과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실 테니까요.”
케이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묘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주면서, 돌아올 곳을 지켜준다는 것이.
그런 쉼을 만들어준다는 것이, 너무나도 든든하게 느껴졌으니까.
“고마워, 케이트. 무사히 회담을 마무리하고 돌아올게.”
케이트는 살짝 긴장이 섞여 있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여전히 딱딱한 어조긴 했으나 격려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벨반 공작 각하께서 가주님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조부님께서?”
“꽃은 피는 자리를 가리지 않는다고. 그 어떤 곳에서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예쁘게 핀다고. 그런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고.”
“…….”
“가주님도 가주님만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계신 겁니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테니, 자신을 믿으십시오. 피오레는 그런 가주님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처음엔, 갑자기 나타난 이 나약한 영애를 믿을 수 없었고, 인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하는 행동은 전부 위험 요소가 따랐고, 위태로웠으며, 지금껏 피오레가 지켜온 전통과는 굉장히 어긋났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서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비록, 그 길은 지금까지 피오레가 걸어가던 길은 아니지만.
실패하면 피오레의 영광에 금이 갈 수도 있었지만.
벨반 공작 각하의 말씀처럼.
피오레의 상징인 꽃은 특정한 꽃을 나타내지 않기에.
누군가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걸어가면서, 피오레의 새로운 전통과 명예가 된다면.
‘피오레는 절대로 지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피어날 수 있겠지.’
그 새로운 피오레가 몹시 기대됐다.
아멜리아는 케이트의 뜻밖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다.
솔직히, 이따금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이렇게 가도 되는 걸까, 확신이 들지 않을 때가 있었으니까.
누군가가 믿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따르는 엄청난 중압감이 되기도 했지만.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기에.
더 든든한 힘이 되어, 자신을 지탱해주기도 한다.
“외조부께서는 잘 계시지?”
아멜리아가 안온한 온기를 담아 묻자, 케이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계십니다.”
“나한테도 연락주시면 좋을 텐데. 그래도 케이트 그대가 외조부님의 좋은 벗이니까.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그런데.”
“응?”
“이번 일이 끝나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케이트의 말에 의아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
케이트와 멀어진 아멜리아는 저택을 나서기 직전, 유리 천장에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게 떠오른 태양이 선명하게 보인다.
‘부디 모든 일이 무사히 잘 끝나기를…….’
그녀는 태양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되뇌어보았다.
그때, 천장을 바라보던 아멜리아의 시선 끝에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뭐지?”
처음엔 그저 유리 천장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줄 알았는데.
그것과 다른 이질적인 문양이 보이는 듯했다.
‘장식을 해둔 건가? 하지만 햇빛에 비치지 않으면 티도 안 나겠는걸?’
아멜리아도 처음 발견했으니까.
“이상하게 저 천장에 자꾸, 마음 쓰인단 말이야.”
마치 저택에 하늘을 담은 것처럼.
이 중정 같은 홀에 자꾸만 마음이 끌린다.
분명 예쁘고 신기한 곳이긴 하지만, 이런 묘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가주님!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그때, 하녀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정신 차리고서 시선을 돌렸다.
“안 돼.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저택을 나서자, 이미 준비를 마친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클리트는 흑마를 타고 세스가 황자와 루시아를 몰래 호위하며 협곡을 지날 예정이었다.
이클리트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조심해야 합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조심하세요.”
놀랍게도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번엔 티어로서, 아이냑과 함께 진상품 마차를 지킬 예정이었다.
이클리트는 마지막까지 아멜리아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고서,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곤 돌아섰다.
아멜리아는 뺨에 닿은 그의 온기를 더듬으며 또 한 번 되뇌었다.
“부디 무사히, 제단에서 만날 수 있기를.”
아멜리아와 멀어진 이클리트의 눈빛이 극도로 냉랭해졌다.
북부의 흑사자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듯, 벌써 그의 주변 공기가 숨 막히게 팽팽했다.
루시아는 마차에 오르기 전, 이클리트에게 다가와서는 싱긋 눈웃음을 띠었다.
“부인과 멀어졌다고 바로 그렇게 표정이 달라지시나요?”
“긴장을 늦출 수는 없으니까요.”
“이게 대공 전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루시아가 이클리트에게 무언가를 은밀히 건네주었고, 이클리트는 그것을 손에 쥐고선 짧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저를 잘 지켜주세요.”
아멜리아는 리볼버와 장총을 잘 챙기고서, 갈색 마에 올라탔다.
곁에서 마미는 몹시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주님,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물론 위험한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미는 아멜리아와 제단으로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 일에 다소 위험이 따른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다만, 왜 그녀가 마차에 타지 않고 직접 호위를 하는 건지.
그게 의문이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그런 마미를 다독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이제 말 엄청 잘 타. 제대로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생긴 거지.”
“가주님을 누가 말리겠어요. 그래도 대공 전하는 말려주실 줄 알았는데…….”
“대공 전하도 바쁘신걸. 진짜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주님은 제가 잘 지킬 테니.”
그때, 역시나 말을 탄 아이냑이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마미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마미는 딱 봐도 체격 좋고, 강해 보이는 아이냑의 모습에 살짝 위안이 되었다.
“우리 가주님,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아니. 나 진짜 말 잘 탄다니까?”
“그런데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안 보이시네요?”
마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아멜리아가 이클리트가 지키는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타셨어, 저 마차에.”
“아, 그러세요? 그런데 진짜 마차가 너무 다 똑같네요. 어디에 뭐가 들어있는지, 헷갈리겠어요.”
“헷갈리면 다행이네.”
“네?”
아멜리아는 마미를 향해 그저 싱긋 웃어주었다.
마침내, 협곡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아멜리아는 고삐를 꽉 쥐고서 제대로 자세를 취했다.
“그럼 마미, 케이트랑 같이 저택을 부탁해.”
“네! 몸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멜리아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이클리트와 시선을 맞추고는, 고삐를 크게 휘두르며 협곡을 향해 출발했다.
겉으로 보기엔 호화스러운 행렬이 이어졌지만, 행렬을 둘러싼 공기는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
***
스무 대가 넘는 크고 화려한 마차가 줄줄이 협곡을 향해 달렸다.
아직까진 행렬이 순조로웠다. 아니, 오히려 평화로웠다.
마을을 하나하나 지나갈 때마다 제국민들이 우르르 나와서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행렬을 구경하거나, 카렌듈라를 던지면서 기도하는 사람도 종종 보였다.
비록 이번에 태양의 제단으로 제국민을 초대하긴 했으나, 많은 인원을 초대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렇게라도 평화 회담을 함께 하고자 하는 제국민들의 마음이었다.
칼렌을 중심으로 티어들은 멀리서 이 행렬을 쫓아오고 있었고, 카마리는 마차에 가까이 붙어서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로웠지만, 호위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이클리트는 세스가 황자와 루시아를 함께 호위해야 했기에 한시도 경계하는 감각에 힘을 빼지 않았다.
마침내,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마을이 사라지고, 인적이 없어지면서 굉장히 거센 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지르며 불어왔다.
아멜리아는 잠시 멈춰 서서 떨리는 숨을 삼켰다.
“여기가, 협곡이구나.”
새하얀 자작나무가 마치 그들을 아래에서 내려보는 것처럼, 빽빽하게 솟아 있어서 창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왜 자작나무에 눈이 달려 있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외눈처럼 형성된 수많은 나이테가 정말로 눈을 치켜뜬 채, 그들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섬뜩한 기분에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아멜리아는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이켜는 공기가 달라짐을 느끼며 절로 고삐에 힘을 주었다.
아이냑은 그런 아멜리아를 살피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멜리아는 애써 긴장했던 기색을 지웠다.
“괜찮아요. 적응하고 보니, 오히려 조금 대단하네요.”
아이냑도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신의 영역에 있는 느낌입니다. 저게 정말로 태양의 눈이라면. 태양신은 우리를 받아들여 줄까요?”
“물론이죠. 루베르도 우리와 똑같아요. 전혀 겁먹을 필요 없어요.”
아이냑은 곧바로 튀어나오는 아멜리아의 말에 오히려 자신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 앞서가던 이클리트가 걸음을 멈췄다.
순식간에 그의 안광이 선득해지면서, 곧장 아멜리아에게 달려와 망토를 방패처럼 그녀 앞에 펼쳤다.
“대공 전하?”
휘익-!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오면서 그들을 덮쳤다.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고, 이클리트는 자작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의 인기척을 느끼며 읊조렸다.
“아직, 이건 시작이 아닙니다.”
“적이 나타났다! 전원 대형을 유지하고, 경계를 강화하라!”
카마리가 외치며, 기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냑도 곧장 검을 빼 들고서, 사방에서 나타난 검은 그림자를 상대했다.
검은 그림자는 아이냑이 목적이라는 듯, 그를 에워싸며 검을 휘둘렀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이를 악물고서, 리볼버를 들어 올렸다.
“신성회일까요?”
이클리트는 검은 그림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때,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춘 채 점점 눈빛이 날카로웠다.
자작나무에 빽빽하게 막혀,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그늘 너머,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낯선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일부러 똑같은 마차로 현혹시킨다는 건가. 누가 속을 줄 알고?”
그가 손짓하자, 사방에서 거친 짐승의 울음소리가 협곡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대지가 흔들리면서 흑표범 떼가 줄지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클리트의 뒤에 있던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달려오는 흑표범을 보며 눈이 커졌다.
“저건, 그때 지하실에서 우릴 공격했던 그 흑표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손을 한번 붙잡고서 말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이클리트는 미소를 띠었다.
“제단에서 만나요.”
“무사하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아멜리아는 놓아주고 싶지 않은 손을 겨우 놓아야 했다.
이클리트는 순식간에 아멜리아에게서 멀어지며 외쳤다.
“마차와 호위를 나눠!”
그의 명령 아래, 순식간에 마차들이 마구 섞이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며, 상대를 교란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가 가소롭다는 듯 읊조렸다.
“이런. 세스가 황자를 찾아봐라, 이건가?”
로브에 감춰뒀던 은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에드조프, 그가 여유로운 눈빛으로 이클리트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