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용서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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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용서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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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용서의 기회
2022.04.25.
“오호, 다들 너무 놀라네?”
세스가가 태연하게 조각상에서 걸어 나오자, 알렉드라는 기이한 표정을 띠며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 대체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아, 포르티셰 공. 일종의 이벤트지.”
“이벤트, 말입니까?”
“이번 평화 회담을 위해 특별히 만든 조각상이야. 사실 여기서 그대들에게 선보이는 게 아니라, 솔라 제국민들 앞에 멋지게 등장하면서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번 평화 회담에 프리메가 이정도로 진심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 말이지. 그런데.”
세스가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대신관을 싸늘하게 응시하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가 무사히 여기 도착하리라고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서. 이러다가 피오레 공에게 폐가 되면 곤란하잖아? 아니, 대체 제단에 무사히 도착하지 못할 건 뭐야? 내가 무사하지 못할 만한 사건이 생길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세스가의 물음이 정확히 대신관에게 향하자, 대신관은 눈을 또르르 굴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황자 전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대신관은 세스가와 눈을 마주하지 못했고, 알렉드라는 그 모습에 점차 미간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아멜리아와 아이냑의 복장을 살폈다.
다소 헝클어진 의복과 마차에도 전투의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알렉드라는 대신관과 아멜리아 사이에 흐르던 묘한 공기를 떠올리며, 한껏 이를 악물었다.
‘대신관이 무슨 짓을 꾸몄던 거구나.’
이런 짓을 대신관 혼자서 간 크게 독단적으로 했을 리 없다.
‘바스티얀 대공, 감히 네가 내 말을 우습게 여겨!’
하지만 이 상황을 잘 넘겨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힌다면 프리메에게 약점이 될 수 있었다.
‘경거망동하게 저지른 짓이 결국 실패한 것 같으니.’
알렉드라는 곧장 잘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세스가 황자의 시선을 돌렸다.
“대신관 님의 지나친 걱정 때문에 황자 전하께서 오해하신 듯합니다. 이벤트에 대해서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걱정 하지 않았을 텐데……. 황자 전하께서 보이지 않으셔서, 저도 조금 놀랐었습니다.”
“그런 거겠지?”
“물, 물론입니다, 황자 전하! 이런 이벤트를 준비하시다니. 이번 평화 회담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겠습니다. 게다가 조각상들도 이리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다니…….”
“우리 조각가들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지. 그래서 제국민들에게 기억에 남도록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대신관이 이토록 나를 걱정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니 말이야.”
세스가의 목소리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고, 대신관은 끝끝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멜리아는 그 초라한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 제국의 신을 모시는 대신관이 저렇게 볼품없는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다.
그녀는 가까스로 감정을 삭이고 있는 알렉드라를 보면서, 루시아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다.
‘이번 일은 정말로 포르티셰 공작가와 관련 없구나. 에드조프와 대신관의 농간이었어. 저지른 사람 따로 있고, 수습하는 사람 따로 있군.’
포르티셰 공작의 성격상, 지금 얼마나 속에서 천불이 일고 있을지.
속이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비록 이번 일은 포르티셰 공과 관련 없다고 해도, 우린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니까.’
“자,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황자 전하. 이미 폐하께선 제단에 당도해 계십니다.”
“이런.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서두르지.”
알렉드라는 몹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멜리아와 아이냑을 보더니, 이내 지나쳤다.
아멜리아는 그런 알렉드라를 향해 싱긋 웃어줄 뿐이었다.
그렇게 알렉드라가 세스가 황자를 데리고 떠나자, 대신관도 서둘러 그 뒤를 따르고자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냉랭한 시선으로 그런 대신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신관은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흠칫했다.
“무, 무슨 일입니까, 피오레 공? 공은 제단으로 가지 않습니까?”
“신기해서요.”
“신기하다니요?”
대신관은 계속 긴장된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대신관의 그런 불안한 감정을 천천히 즐기며,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일을 이 정도로 벌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포르티셰 공 덕분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대신관 님은 정말 사고가 일어날 걸,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저도, 저도 놀랐습니다. 감히 피오레 공작가와 세스가 황자 전하의 행렬을 건드린 도적떼가 있었다니. 나는 단지 피오레 공이 조금 늦어지기에. 게다가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도 보이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대신관 님은 감이 참 좋으시네요. 도적 떼라고 바로 알아차리시고 말이에요.”
“그, 그런 간 큰 도적 떼가 다 있군요.”
“그렇죠. 그런 간 큰 도적 떼가 있었답니다. 정말로 태양신의 저주를 받겠죠?”
아멜리아가 대신관을 빤히 쳐다보며 묻자, 대신관은 괜스레 긴장되었지만, 애써 표정을 바로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런 짓을 하다니…….”
대신관은 절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설령 저들에게 잡혔어도, 자결로서 입을 다물 만큼 충직한 신성회의 교도들이니.
“그럼 대신관 님께서 저주를 받겠네요.”
“피오레 공, 지금 그게 무슨 막말!”
하지만 대신관은 긴말할 수가 없었다.
그를 응시하는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더없이 선득하게 바뀌어선, 어느새 주변의 공기마저도 냉랭했다.
아멜리아는 입가에 겨우 걸려 있던 미소를 싹 지우고서, 아이냑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아이냑이 조각상 너머, 수면제로 제압해둔 검은 그림자를 끌어냈다.
대신관은 아이냑이 끌고 온 검은 그림자를 보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직접 검은 그림자를 붙잡고서 대신관을 향해 싸늘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 도적, 모르십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긴, 도적은 아니었지.”
그녀는 검은 그림자의 어깨 부분을 그대로 쭉 찢었다.
그러자 어깨 부위에 신성회의 문양인 태양신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사색이 된 대신관은 끝까지 시선을 돌리며, 하얗게 질린 손끝을 부여잡았다.
“도적처럼 위장한 이자, 신성회의 표식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로 모르십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위장으로…….”
“감히 신성회의 표식을 달고 도적질을 하는 도적을 신성회는 그냥 내버려뒀단 말입니까?”
아멜리아는 대신관의 발밑으로 그자를 쓰러뜨렸다.
대신관은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렸지만, 자꾸만 그의 시야로 태양신의 표식이 선명하게 보였다.
“뭐, 정말 모르신다면. 황실에 제대로 넘겨 조사해야겠군요. 신성회 사칭도 모자라, 감히 제국에 오신 국빈인 세스가 황자 전하를 공격한 도적이라니. 당연히 저주받아야죠. 방금 그 입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신관은 너무 겁이 나서 자기도 모르게 멋대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들은 세스가 황자 전하가 아닌 루베르 장로를 공격…….”
“모르신다더니. 그걸 대신관 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도저히 시선을 피할 수 없어진 대신관은 자신을 그어 내리듯, 쳐다보고 있는 아멜리아의 녹안 앞에 등줄기가 오싹하게 떨렸다.
대신관은 피오레 공작에게서 이렇게 옴짝달싹도 못 할 한기를 느끼게 될 줄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살 떨리는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엄청난 위압감에 숨쉬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공작 작위를 이어받은 지 얼마 안 된 계집이라더니…… 전혀 신경 쓸 계집이 아니라고, 포르티셰 공작도 그리 말했었는데!’
“여전히 대신관 님은 모르시는 일입니까?”
대신관은 가까스로 숨을 끌어모아서는 입술을 달싹였다.
“피, 피오레 공.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자들이 정말로 세스가 황자 전하와 피오레 공을 공격했다면, 저들은 이단자입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끝까지 추하게 회피하는 그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더는 자신의 시간을 아깝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자가 일어나면 헤스틴 공이 가진 독을 먹일 겁니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독은 아닙니다. 최면을 거는 독이지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일은 누가 시켰는지. 거짓이 아닌 오직 진실만을 토설할 수 있도록. 이자의 진실하고 거룩한 입에서, 대신관 님이 나오지 않는다고 자신하신다는 거죠?”
대신관은 아멜리아의 말에 바들바들 떨면서 제 발밑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붙잡으려는 순간, 아이냑이 먼저 가로챘다.
그 모습에 대신관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피오레 공은 대체 누굴 위하는 겁니까? 설마, 루베르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성회를 모독하고, 나를 능멸하는 겁니까?”
“…….”
“저들은 솔라 제국민이 아닙니다. 반인반수가 신관을 죽였고, 그 반인반수는 분명 루베르와 관련 있어요. 없을 수가 없지. 그들은 수인과 어울린 야만족이니까!”
두려움과 불안감이 점점 팽만해지더니, 이내 대신관의 입을 벌렸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죄인을 벌한 것뿐이란 말입니다!”
자기 무덤을 파 들어가는 대신관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이내 싱긋 냉소를 그렸다.
“결국, 자기 입으로 다 밝히셨군요. 게다가 이런 짓을 하셨으면서, 태양신을 거론하며 자기 입맛에 맞게 쓰시면 안 되죠. 이거야말로 신을 모독한 거 아닌가요?”
궁지에 몰린 대신관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긴, 태양신을 모독한 게 이번 한 번은 아니시죠. 태양신께서는 모두에게 공평하고, 평등 하라고 하셨지. 그렇게 가려가면서 축복을 내리라고 하신 적은 없죠. 선택받은 이들에게만 축복을 내린다고 하신 적은 더더욱 없으시고.”
그녀의 입술에 걸린 냉소가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으며, 대신관을 죄어왔다.
“게다가 대신관 님이 말씀하신 그 신관, 죄인 아닌가요? 축복의 꽃을 한낱 욕심으로 다른 이에게 함부로 넘긴 것으로 아는데. 신성회의 오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 증거도 없이 루베르에게 뒤집어씌우시다니…… 더 발악하지 마시죠. 정말 추하니까.”
“가, 감히 어떻게 신의 대리인인 내게 그런 말을!”
“감히 신의 대리인이 태양신을 이토록 모독하고 있으니, 다섯 공작가의 공작으로서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아멜리아는 대신관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대신관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물론 제가 감히 태양신을 대신하여 저주를 내릴 수는 없으니, 피오레 공작가를 건드린 엄벌만 내리려고 합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대신관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나세요.”
“……뭐?”
그토록 떨고 있던 대신관의 눈동자가 사납게 굳어졌다.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신앙심을 보여 달라는 겁니다. 가진 권력과 그 세력을 지키고자 신을 이용하지 말고.”
아멜리아는 점점 흉포하게 일그러지는 대신관의 얼굴을 역겹게 응시했다.
“제국민들에게 끝까지 존경받고 싶으시다면. 신의 사자로 남고 싶으시다면. 제가 그 정도의 자비는 베풀 수 있습니다. 대신관 님의 사과를, 받겠다는 겁니다.”
자신이 착하고, 마음이 너그러워서 눈앞에 이자를 용서하겠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대신관 자리에서 내려가게 되면 신성회는!”
“그래도 잘 흘러가겠죠. 본인의 권력만 무너질 뿐.”
용서의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말 테니까.
결국, 스스로 만든 무덤에 속절없이 떨어지고 말 거다.
아멜리아는 묵직한 한숨을 삼키며, 아이냑에게 말했다.
“그자를 데려가. 평화 회담 끝나고, 처리해야 하니까. 신성회의 죄인을 처벌할 증인으로.”
“잠깐, 잠깐만 기다려. 피오레 공, 잠깐만!”
대신관이 아멜리아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아멜리아가 그 손을 차갑게 내치며 말했다.
“그래도 한때 대신관이셨는데, 저자를 죽일 그런 끔찍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손에 피를 묻힐 시, 진정으로 태양신의 분노가 함께 할 테니까요.”
“하아…….”
“무너질 때 무너지더라도, 더는 추하게 무너지지 마세요. 지금으로도 충분하시니.”
아멜리아가 등을 보이자, 대신관의 눈동자가 허망하게 흔들렸다.
“이 일을 대체…… 대체!”
***
에드조프는 의복을 정비하고서, 홀가분한 표정으로 제단에 당도했다.
그때, 그의 시야로 비틀거리고 있는 대신관의 모습이 보였다.
에드조프는 대신관을 향해 한걸음에 다가갔다.
“대신관 님, 여기 계셨군요. 소식은 이미 전해졌습니까? 세스가 황자에 대한 것은 대신관 님이 아무 걱정할 필요 없이 전부 클리오 대공의 잘못…….”
“더는! 바스티얀 대공 전하와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관이 그를 향해 사납게 외치자, 에드조프의 눈매가 굳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일을 하려면 똑바로 하든가. 그러게. 내가 세스가 황자 전하를 건드리는 건 그렇게 안 된다고 했는데!”
세스가 황자라는 말에 에드조프의 동공이 섬뜩해지면서, 그대로 대신관을 지나쳐 달렸다.
‘말도 안 돼. 세스가 황자는 분명 그 마차와 함께 떨어져서 죽었어. 죽었다고! 그놈이 황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