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마침내, 태양의 제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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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마침내, 태양의 제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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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화. 마침내, 태양의 제단에서
2022.05.02.
협곡과 가장 가까운 마을 여관이 오랜만에 왁자지껄 북적거렸다.
태양의 제단에 초대받은 제국민도 제국민이지만, 초대받지 못한 이들도 이번 평화 회담을 즐기고자 이 마을에 모여서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여관 식당에서 남녀 할 것 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나도 가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딱! 내 앞에서 순번이 끝나더라니까?”
태양의 제단에 초대받은 제국민들은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 선착순으로 진행했었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음에도 갈 수 있겠지. 이제 매번 평화 회담이 열릴 때마다 초대하지 않겠어?”
“당연하지. 이렇게 태양의 제단이 열린 거야.”
“이게 다 피오레 공작 각하 덕분이지.”
“그분은 예전부터 우리 같은 것들도 태양신을 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주셨어.”
“맞아. 축복의 꽃도 보여주시고. 함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시고.”
마을 사람들은 아멜리아에 대한 애정을 담아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엔 그녀가 루베르를 감싸고, 수인을 옹호하는 모습에 적대감을 품기도 했었지만.
점점 그런 마음은 엷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루베르 장로가 루베르 폭죽을 선물했다던데.”
“나도 들었어.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거라며?”
“피오레 공작령 사람들이 그러더군. 루베르가 만든 마법 도구가 그렇게 편리하고 좋다고.”
“그래?”
“그러니 그 폭죽도 대단하지 않겠어?”
“만약.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차기 황제가 되신다면…….”
그러다가 그들 사이로 생각지도 못한 말들도 은밀히 오가기 시작했다.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그토록 믿고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맞아. 소문과 다를 거야. 괴물 대공 전하의 모습이 다가 아닐 거라고.”
남자들의 목소리에 이어 여인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엄청 다정하시다고 하던데.”
“피오레 공작 각하를 몹시 사랑하신다고 하고.”
그들의 시끌시끌한 수다를 그저 뒤에서 묵묵히 듣기만 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바로 피오레에서 도망쳐선 모습을 감추고 있던 이사나였다.
이사나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저 술잔만 기울이며, 이들의 목소리에서 이클리트와 루베르에 대해 달라지고 있는 제국민들의 반응을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역시 대단하시네, 가주님.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았던 거리를 점차 다듬고 계시니. 하지만…….’
술잔을 움켜쥔 이사나의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클리오 대공이 반인반수라는 것이 밝혀지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텐데. 대체 황실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그때는 너무 화가 나서 아무 생각 할 수 없었지만, 이쯤 되니 황실이 가장 문제였다.
그 옛날, 루베르를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놨으면서.
이번엔 무슨 짓으로 클리오 대공을 만든 것인가.
‘황실은 혈통조차 도구로 이용하려는 건가? 그 시간의 숲 때문에?’
그때, 여관 안으로 한 남자와 여자가 축 늘어진 소녀를 데리고 달려왔다.
“여기, 여기 치료사 없습니까? 치료사가 여기 머물고 있다고 하던데! 제발. 제발 우리 딸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부모로 보이는 이가 울부짖자, 치료사로 보이는 남자가 재빨리 달려왔다.
“무슨 일이오?”
“우리 딸 좀 봐주십시오. 갑자기 쓰러졌는데, 숨을 쉬질 못해서…….”
여관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걱정 어린 눈으로 그들을 지켜봤고, 이사나 역시 묘한 시선을 두었다.
치료사는 딸아이를 바닥에 눕히고서 여기저기를 살폈다.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소녀의 호흡이 열기로 가득했다.
얼굴에 반점처럼 번져있는 열꽃까지…….
게다가 식은땀 때문에 더더욱 체온 유지를 하지 못한 채, 퍼렇게 변한 입술이 경련처럼 마구 떨렸다.
치료사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중독 현상인데.”
중독이라는 말에 부모의 표정이 더욱 파리해졌다.
“중독이라면. 도, 독이라는 겁니까?”
“아이고! 우리 세실 어쩌면 좋아! 살릴 수 있겠지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독이라는 말에 여관 사람들도 더욱 수군거렸다.
지켜보던 이사나의 눈빛에도 불길함이 스쳤다.
‘저런 소녀에게 독이라고?’
“대체 이 아이, 어디서 뭘 하고 온 거요?”
치료사의 말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말했다.
“특별한 건 없었고. 카렌듈라 조화를 만들었습니다.”
“카렌듈라 조화?”
“예. 태양의 제단에서 급하게 필요하다고 전령이 내려와서……. 우리 마을 아이들은 대부분 조화를 만들어서 생계를 유지하거든요.”
“조화를 만든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는데. 어디 나가지도 않았고.”
치료사는 그 말에 더더욱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대체 어디서 이런 중독이…… 일단 독의 성분을 알아보려면 여러 약초를 사용해서…….”
치료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관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치료사님, 여기 계시죠!”
“우리 딸 좀 봐주세요!”
“우리 딸도. 우리 딸이 숨을 안 쉽니다!”
“여기도, 여기도 봐줘요!”
“아니, 이게 대체…….”
갑자기 축제 분위기에서 아수라장이 된 여관.
전부 이 소녀와 같은 증상으로 밀려온 병자들이었다.
이사나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다급하게 여관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소녀들이 중독 현상으로 쓰러졌다? 중독 자체도 흔하지 않은데, 그것도 전부 평화 회담에 쓰일 조화를 만든 소녀들이라고?’
뭔가 불길하다.
이게 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평화 회담에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래. 그 회담이 이렇게 순조롭게 열릴 리가 없었다.
이사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곧장 태양의 제단을 향해 달렸다.
***
아멜리아는 평화 회담 준비를 위해, 태양의 제단 뒤편에 마련된 신전에 머물고 있었다.
잠시 후, 황궁 시녀들이 주르르 와서는 아멜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 저희가 이번에 공작 각하의 투알레트를 맡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황제 폐하께서 보내주신 만큼,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십시오.”
“고맙다. 잘 부탁하지.”
시녀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곧장 아멜리아의 주변으로 몰려와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먼저 빗기 시작했다.
원래는 마미와 더불어 공작가의 하녀들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황궁에서 전령이 내려왔다.
황제 폐하께서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이다.
함께 내려온 말로는 피오레 공작이 처음으로 주도하는 공식적인 사교 행사인 만큼, 투알레트 정도는 황실에서 도와주고 싶다는 거였다.
보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너무 갑작스러운 호의이긴 하지만…….’
게다가 영 신뢰가 가질 않는 호의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자신에게 처음 하사했던 검도 날이 서 있는 검으로 평범하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황제가 보낸 선물을 거절할 수도 없으니.
아멜리아는 일단 두 눈을 부릅뜨고서, 시녀들의 손길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의심하는 게 미안해질 만큼, 치장하는 시녀들의 손길은 몹시 아름다웠다.
과하지 않지만, 더없이 우아한 화장술이 순식간에 펼쳐졌고, 머리 장식은 너무 화려하지 않게.
하지만 자연스럽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 바로 아래, 꽃으로 된 보석 장식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런 쪽으로 관심 없는 그녀가 봐도 무척 잘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가장 중요한 드레스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와…….”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자아냈다.
시녀들은 그 모습에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녹색은 평화의 상징이기에, 황궁에서 특별히 제작한 드레스입니다. 이번 회담 이후 후야제에서도 입으실 텐데, 공작 각하를 제외한 누구도 이 녹색 드레스를 입지 못할 겁니다. 공작 각하께서 유일하십니다.”
그냥 녹색이라고만 말하기엔 아까울 만큼.
드레스가 움직일 때마다 영롱하게 빛났는데, 그게 너무 신비롭고 오묘했다.
아멜리아는 손에 닿자마자 스르르 떨어지는 드레스 자락을 보며 말했다.
“보석인가? 하지만 보석 장식은 안 보이는데…….”
“보석을 빻아서 실처럼 가늘게 만들어낸 것이랍니다. 몹시 귀하고 어려운 재봉술이죠.”
“폐하의 마음에 크게 감동하게 되는군.”
아멜리아는 일단 황제를 향한 입 발린 존경을 표해야했다.
시녀들은 마지막으로 그 드레스를 아멜리아에게 입혀주었다.
하지만 어찌나 코르셋을 세게 죄던지, 그녀는 꽤 답답함을 느꼈다.
“괜찮으신가요?”
시녀들이 묻자, 아멜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좀 답답하긴 하지만. 견딜 만해. 그런데 꽤 덥군.”
답답한 것도 답답한 건데, 습한 더위 때문에 좀 더 힘든 부분이 있었다.
시녀들도 아멜리아의 말에 동의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안 그래도 신녀들 사이에서 더위 때문에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답니다.”
“예. 평소보다 더 습하고 덥다고요. 피부에 열꽃까지 생겨서, 현기증을 호소하는 신녀들도 있고…….”
“공작 각하께서도 조심하세요.”
시녀들은 걱정하면서 아멜리아에게 깃털 부채를 건네주었다.
아멜리아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현기증이라…… 제국민들도 많이 모일 텐데. 해가 떨어지면 좀 괜찮아지려나?’
***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에스코트하면서, 제단으로 향했다.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답지 않게 말을 길게 했다.
“신녀들이 말하길, 태양의 제단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어색한 수다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살짝 떨리는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신녀들이 불만을 표하던가요? 포르티셰 공은 몹시 불쾌해했거든요.”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특히 제국민들이.”
제국민들이 좋아해 준다는 말에, 아멜리아는 긴장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럼 더더욱 다행이고요.”
그때, 아멜리아가 힘겨운 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더우십니까?”
“조금 그러네요. 대공 전하는 괜찮으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호흡도 안 좋네요.”
“모처럼 예쁜 드레스 입었는데, 낯빛이 안 좋으면 곤란한데 말이에요.”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부인이 가장 중요하지.”
그때,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얼음 목걸이를 살며시 당겨서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갑자기 얼음 목걸이 주변으로 냉기가 감돌면서, 아멜리아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좀 낫습니까?”
“와! 진짜 신기하네요! 하지만…….”
아멜리아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면서,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무리 사소한 마법이라고 해도, 조심하셔야 해요.”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다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침내 제단으로 들어섰다.
천공에 떠 있는 듯, 거대한 원형 모양의 제단이 시선을 압도했다.
게다가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거대한 태양신의 동상이 그 위엄을 자랑했다.
제단은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위층은 신관과 신녀들이 기도를 드리도록 마련한 좌석 층, 아래층은 대신관이 기도를 주관하는 광장 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위층엔 제국민들이, 아래층엔 귀족들이 머물고 있었다.
위층과 아래층은 제법 간극이 있기에 거리가 멀었는데, 이렇게라도 귀족과 제국민의 차별을 둔 것으로 보였다.
본디 귀족은 제국민을 아래로 깔봐야 했으나, 태양의 제단은 태양신 동상이 더 가까운 아래층이 더 좋은 위치였다.
제국민들이 앉아 있는 자리엔 카렌듈라 조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비록 조화지만, 마치 햇살이 쏟아지듯 금빛 가루가 하늘하늘 떨어져서 몹시 아름다웠다.
아멜리아는 잠깐 모든 걸 잊고서, 순수하게 이 풍경에 감탄하려는 순간.
“피오레 공작 각하!”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오셨어!”
“클리오 대공 전하!”
갑자기 제국민들의 환호성이 그녀와 그에게로 쏟아졌다.
아멜리아는 일순 당황했지만, 이클리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으며 말했다.
“화답해줘야죠. 부인께서 초대한 손님들이지 않습니까.”
“아, 그, 그렇죠. 그래야죠.”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제국민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제국민들을 그런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몹시 반겨주고 있었다.
어쩐지, 아멜리아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선택을 인정받고, 제국민들에게 환호받는 것도 좋았지만…….
아멜리아는 살며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클리트도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이내 점점 이 환호 속에 느껴지는 온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그를 보는 게 너무 좋았다.
지난날, 고작 쓰다듬어지는 온기를 부러워했던 대공 전하를 안쓰러워하며 말했었다.
‘이 온기를 기억해요. 더는 외로워하지 말고. 외로움에 익숙해지지도 말아요. 이것만 기억하고, 채워요. 제발 그래야 해요.’
하지만 이젠 정말로 사람이 전하는 온기에 익숙해지셨겠지.
‘대공 전하의 주변이 채워지고 있어. 더는 혼자서 외롭지 않도록. 차가운 시선이 당연했고, 외면받고 차별당하는 게 평범했던 날들이 점점 바뀌는 거야.’
아직은 조금 불안하고,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저들에게 이분은 괴물 대공이 아닌, 클리오 대공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 사실이 눈물 날 것처럼 너무나도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