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시드는 꽃잎 하나
(143/199)
143화. 시드는 꽃잎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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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화. 시드는 꽃잎 하나
2022.05.16.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어나자, 기사들이 재빨리 아스란과 에드조프를 보호했다.
아스란은 몸소 느껴지는 엄청난 진동에 미간이 굳어졌다.
“또 폭발이라니. 대체 누가 감히 신성한 태양의 제단에서!”
에드조프는 역시 아스란을 보호하며 이를 악물었다.
‘키르케. 이년이 정말 미친 거야?’
알렉드라는 혹여 아스란을 노릴 것을 염려하며, 바짝 긴장한 상태로 외쳤다.
“폭발 지점은 어디인 것이냐!”
“또다시 위층입니다!”
‘위층이라면, 아멜리아…….’
에드조프는 곧장 그녀를 떠올리며 낯빛이 창백해졌다.
“위층이라면, 세스가 황자가 있지 않더냐?”
아스란의 외침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클리오 대공 전하와 피오레 공작 각하, 헤스틴 공작 각하께서도…….”
“그건 중요하지 않아. 세스가 황자가 저 폭발에 휘말리게 되면, 프리메와 전쟁이다. 당장 기사들을 보내. 세스가 황자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해야 해!”
“예, 황제 폐하!”
하지만 기사들이 움직이려는 순간, 어떤 바람에 의해 제단을 둘러싼 횃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귀족들이 잔뜩 겁에 질린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때, 횃불이 켜져 있음에도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발아래로 악마와 같은 거대한 그림자가 번졌다.
“이, 이게 무슨…… 하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모두가 숨을 멈췄다.
아스란과 에드조프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 끝에 이클리트가 쓰러진 아멜리아를 안고서 허공에 떠 있었다.
아니,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친 채 날고 있었다.
이클리트의 모습은 흡사 마수 같았다.
찬란한 태양의 제단을 어둠으로 지배하는 마수.
시뻘건 홍안이 번뜩일 때마다, 귀족들은 두려움에 주저앉았고, 신성회 신관들은 온몸에 피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수, 수인…… 클리오 대공이, 수인…….”
아스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가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안광에 환희가 스쳤다.
“수인이었어. 반인반수가 저렇게 완벽하게…… 하하!”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그래. 내 고귀한 피가 섞였는데, 그저 쓰레기일 리가 없었어.’
선택받은 수인이 완성된 거다.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다.
시간의 숲의 열쇠를!
에드조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저놈이 왜 수인인 거지? 저놈은 분명. 분명…….’
에드조프는 차마 제 입으로 되뇌지 못한 채 떨리는 숨을 삼켰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그래. 그래서 그 목검이 이상했던 거야. 저놈 주변에서 벌어진 이상한 힘도 수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거라고. 그렇다면 정말로 저놈도 나와 같은…….’
일순, 에드조프의 눈가에 알 수 없는 눈물이 고인 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정말 괴물이었어.”
‘나와 똑같은. 이 황실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 너도 괴물이었다고!’
이 모든 폭풍의 시작을 알린 키르케는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나직이 속삭였다.
“정말로 수인이었군. 그렇다면 아스란이 그토록 고귀하다고 믿고 있던 황후 역시, 수인이었던 거야. 그래. 그토록 경멸하고, 멸시했으면서. 네 아들도, 아내도 결국 수인이었다고, 아스란!”
참을 수 없는 기쁨에 몸이 떨리면서도, 키르케는 어쩐지 낯익은 이클리트의 모습에 가슴 한편이 싸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검은 독수리 일족이라니…….’
***
이클리트는 의식을 잃은 아멜리아를 꼭 안고서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녀뿐이었다.
“아멜리아, 내 말 들려요? 아멜리아.”
겁에 질린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붙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게서 호흡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호흡이 너무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아 두려웠다.
마침내 완전히 지상에 닿은 이클리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서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경멸과 멸시로 가득한 가장 차가운 눈빛과 사나운 목소리가 그에게로 사정없이 박혀왔다.
“괴물. 진짜 괴물이었어.”
“크, 클리오 대공이 수인이라니. 저런 괴물이라니!”
이클리트의 미간이 굳어지며, 턱 끝이 바짝 죄였다.
저런 날 선 반응은 익숙했기에 별거 아니었다.
단지.
“너무 시끄러워.”
그가 다시금 그녀를 안고서 날개를 펼쳤다.
사방으로 폭풍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점멸하던 횃불이 완전히 꺼지고 암흑이 뒤덮였다.
알렉드라는 이대로 도망치려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스스로 세이버를 들어 올렸다.
‘이제야 괴물 같은 힘이 무엇 때문인지 알겠군. 대공…… 아니지.’
“그저 괴물일 뿐이지. 이제야 그 본색을 드러낸 거야!”
알렉드라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저 괴물을 잡아야지! 감히 신성한 태양의 제단을 공격했다. 지금까지 솔라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은 저 괴물의 짓이다. 더는 대공이 아니다. 반역자일 뿐이야!”
기사들은 알렉드라의 고함에 겨우 정신 차리고서, 알렉드라의 뒤를 따랐다.
이클리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그들을 보며 짧게 읊조렸다.
“시끄럽다니까.”
이내, 공기를 찢을 듯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그들을 한 발자국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알렉드라는 세이버로 그 바람을 베어내며 계속 그를 향해 걸어갔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안은 손에 힘을 주고서 잇새로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으으으으윽.”
점점 들끓기 시작하는 피가 이클리트의 이성을 삼키며, 거센 야성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녀를 안은 손이 점차 커지면서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왔고, 핏발처럼 서린 눈동자가 광기에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이성을 위태롭게 건드리는 공포는 단 하나였다.
“내게서 그녀를 빼앗아간다면.”
잔뜩 짓이겨진 목소리 끝에 결국, 짐승의 본능이 튀어 올랐다.
“전부, 죽을 것이다.”
쿠쿵-!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지면서 정말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악!”
“사, 살려줘! 살려줘!”
살을 에는 비바람과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 앞에 귀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자 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숨을 들이켤 수가 없었다.
세상을 정말로 재앙으로 끌고 가는 이클리트의 모습은 더는 인간으로 볼 수 없었다.
알렉드라조차도 온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에 더는 그를 향해 단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 힘은…….”
저게 정말 고작 수인의 힘이라고?
키르케조차 이런 사달은 생각하지 못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서 말도 안 된다는 듯 읊조렸다.
“저 모습은. 수왕 폐하…….”
이클리트를 막으려던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목을 붙잡은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알렉드라는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힘을 준 채, 다시금 세이버를 들었다.
‘위험한 놈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죽여야 해. 그나마 저 계집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야!’
“저, 괴물을!”
알렉드라는 고함치며 이클리트를 향해 달려갔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손톱을 더욱 날카롭게 세운 채, 포효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죽여줄 것이다.”
이미 완전히 어긋난 이성을 지배하는 광기로 이클리트가 알렉드라를 공격하고자 움직이려는 순간.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손을 한 점의 온기가 나직이 붙잡았다.
“……나랑. 약속했잖아요…….”
“아멜리아…….”
폭주하던 그의 광기가 오직 그녀의 목소리 앞에 멈춰버렸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자신의 사나운 손에 닿아 있는 그녀의 고운 손이 다칠 것 같았다.
‘이 모습은 안 돼. 그녀를 다치게 할 거야. 그녀가, 싫어할 거야.’
이클리트는 더욱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그대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아스란이 서슬 퍼런 시선으로 명령했다.
“티어들은 뭐 하는 것이냐! 당장 잡아! 절대로 놓치지 마! 이건 황명이다!”
이클리트에게 안긴 아멜리아 때문에 조준하지 못하던 티어들은 아스란의 명령에 하는 수 없이 그를 겨냥하고선 그대로 불의 마탄 쐈다.
뜨거운 불길이 그를 공격했으나, 이클리트는 티어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기에 온몸으로 마탄을 감당한 채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사라지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아스란은 재빨리 등을 돌렸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마침내 열쇠를 찾았는데!’
“당장 군대를 소집하라. 저놈을 반드시 생포해야 해!”
이클리트가 일으킨 폭풍에 끝내 발이 묶여버렸던 알렉드라는 분노를 삼키며, 멀어지는 아스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폐하의 핏줄인 클리오 대공이 어떻게 반인반수일 수 있지?’
게다가 어찌 저리 침착하시단 말인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안고서, 황제의 추격을 피해 협곡의 절벽 아래로 내려앉았다.
마탄을 그대로 맞아버린 이클리트의 날개가 상처로 피범벅이 되어 엉켜 있었다.
그는 아멜리아에게 피가 닿게 하지 않으려고, 그녀를 내려놓고서 조금 멀리 떨어졌다.
설령 그녀의 피가 아니라고 해도, 피 묻은 그녀를 보는 건 너무 무서웠으니까.
그때,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멜리아!”
그녀는 숨을 토해내듯, 내쉬다가 결국 답답하게 죄는 드레스를 벗어버렸다.
다행히 마비는 풀려 있었다.
하지만 더 두려운 현실을 직시하며, 떨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친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피투성이인 그의 모습이 보였다.
이클리트는 괴로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다.
아멜리아가 그런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이클리트가 주춤거리며 피하려고 하자, 아멜리아는 눈물로 흐릿해진 시선 끝에 외쳤다.
“왜. 왜 대공 전하만 이렇게 다친 거예요. 내가 다쳐야 하잖아. 내가 다쳤어야 했잖아. 왜 내 약속 안 들어준 거예요. 왜!”
“…….”
“거기서. 거기서 그렇게 정체를 드러내면 어떡해. 지금도 내 앞에서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어떻게!”
가까스로 걸려 있던 눈물이 아프게 뺨을 갈랐다.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무사한 모습만을 겨우 눈동자에 담은 채, 그저 그 사실에 안도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에 처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부인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고.”
그저 말뿐인데도 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당신이 많이 아플 거란 말이에요. 이제야 겨우 온기를 알아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당신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또 아무도. 아무도 곁에 없게 된다고요!”
“괜찮아요. 부인이 있으니까. 나한테 당신만 있으면…….”
그 순간, 익숙한 고통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흐윽!”
“아멜리아?”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이겼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명 끝에, 그녀를 무너지게 했다.
“하아…… 악!”
끔찍한 통증에 아멜리아가 가슴을 움켜쥐며, 숨을 쉬지 못했다.
꽃잎이 또 떨어졌다.
하필이면 지금, 지금…….
“아멜리아! 아멜리아!”
이클리트는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얗게 질린 손으로 그녀를 감쌌다.
“왜 그러는 거야? 어디가 아픈 겁니까? 대, 대체 어디가…… 아멜리아? 아멜리아!”
하필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인 거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잔인한 고통에, 이미 눈물로 엉망이 된 그녀가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안 되겠어요. 당장 치료사를 만나러…….”
“……심장이요.”
이클리트는 그 한마디에 순간 등줄기로 묘한 오한이 스쳤다.
그녀는 슈미즈의 끈을 풀고서 가슴을 보였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제비꽃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저 그림에 지나지 않았던 저 제비꽃이 왜.
“왜, 시들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