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신이시여, 제발
(145/199)
145화. 신이시여,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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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화. 신이시여, 제발
2022.05.23.
“그대가 없으면.”
“이 세계도 필요 없어.”
그 악몽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내가 죽을 수 있게, 이 세상을 없앨 겁니다.”
이클리트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입꼬리에 비해, 그의 푸른 눈동자엔 온기 한 점 없이 싸늘했다.
그러다 점점 핏방울이 고이듯 붉은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고 바랐는데. 이대로 그대를 빼앗길 수 없습니다. 당신을 빼앗는 게 이 세상이라면, 맞아요. 이게 옳아. 멸망하는 게 옳은 겁니다.”
점점 공허해지는 목소리가 공기를 앗아가며, 폐허처럼 퍼석거렸다.
아멜리아는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서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끔찍한 말을 해선 안 돼요. 그런 짓을 해서도 안 돼요!”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클리트를 붙잡으며, 불안하게 뒤틀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이 1년이 너무 행복했어요. 평생 살아온 순간보다 더 행복했다고요.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요. 대공 전하가 왜 날따라 죽어요. 나 때문에 왜 이 세상을 없애겠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이 없잖아.”
싸늘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눈가가 점점 습윤하게 젖어들었다.
“나도 당신과 함께한 그 1년이, 내 행복의 끝이에요. 더 바라지 않아. 내가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생을 다한 겁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상관없어요.”
겨우 의연하게 버티던 그의 눈빛과 미소와 호흡이 결국, 무너져 내렸다.
그는 눈에 띌 정도로 잘게 떨리는 손으로 아멜리아의 양어깨를 붙잡고서 울컥울컥 치미는 목소리를 쥐어짜듯 내뱉었다.
“왜 혼자서 정리하는 겁니까? 어떻게 날 버려두고, 혼자 떠날 준비를 해요? 그래서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한 겁니까? 그렇게 당신을 기억하라고? 다른 감정을 배우라고 한 것도. 내 주변으로 사람을 채웠던 것도…….”
“대공 전하…….”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그대로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닿은 손에 한껏 힘을 주고서.
금방이라도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마음에 온몸으로 위태롭게 그녀를 붙들었다.
점차 잇새로 씹히는 그의 울음이 아멜리아의 심장으로 거세게 박혀 들었다.
“기억은 필요 없어. 내 눈앞에 당신이 있는 걸 바라. 이렇게 안아주고, 키스하고, 만지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도록. 그 아이는 당신이 아니야. 나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이 아니면 안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그댈 사랑하는 감정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멜리아는 도저히 손을 뻗어 그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그의 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분을, 어떻게…….
“내게서 단 한순간도 그대가 지워지지 않는데.”
어깨에 너무나도 낯선 물기가 느껴지자, 떨리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대로 멎어버렸다.
‘대공 전하께서, 울고 계셔…….’
북부의 흑사자라 불리는 그가, 울고 있었다.
불시에 마주쳐버린 그의 처절한 슬픔 앞에, 아멜리아의 눈 안이 점점 아려왔다.
그때, 원망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죽을 때까지 그대의 허상만 좇으라는 겁니까? 그렇게 날 더 미치게 할 겁니까? 그 또한 명령인 거예요? 그 명령에도 복종해야 합니까? 이 심장의 살점이 다 뜯겨 나가더라도 나는, 살아야 하는 겁니까?”
아멜리아는 입술만 달싹거린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 그 어떤 말도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차라리 원망이 나았는데.
“……거짓말이라고 해요.”
어느새 그 원망조차 쉽게 꺾인 채, 애원에 가까운 비명이 그녀의 귓가를 붙들었다.
“1년뿐이라는 거. 사실 아니었다고 해줘요. 그렇게 해줘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억지, 들어줘요. 제발, 제발…….”
빌고 또 비는 그의 간절한 속삭임에 아멜리아는 결국, 떨고 있는 이클리트의 어깨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질 만큼, 불안하고 절박하게 뛰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끝끝내 울음을 씹어 내뱉었다.
“내가 대공 전하의 인생을 망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차라리 더 망쳐줘. 그대 때문에 망가져도 좋으니까.”
낭떠러지에서, 오직 기댈 수 있는 건 서로밖에 없는 것처럼.
손톱을 세운 채 서로에게 박히듯, 안겨든 두 사람이 겨우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태어난 것이 아닌 만들어져서, 사는 것도 내 마음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생애 마지막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요.”
그의 말도 안 되는 부탁이 절절하게 그녀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마음을 독하게 잡고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발, 살아주세요.”
“아멜리아…….”
“명령이라고 말하면 들어줄 건가요? 내 말은 어길 수 없다면서. 내게 복종한다고 했으니까. 부디, 살아줘요.”
그의 손길이 이미 다 젖어버린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
“그러니까 살라고 하지 마.”
그가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짠맛이 느껴지는 속을 헤집은 채 읊조렸다.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같이 죽을게요. 그렇게 하게 해줘요. 제발, 같이 죽게 해줘, 아멜리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제발 죽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이라니.
‘신이여. 대체 저 사람에게 무슨 마음을 주신 겁니까. 어쩌자고 이런 대책 없는 사랑을 주신 겁니까…….’
어째서 이런 가여운 마음만을…….
서로에게 닿은 입술이 점차 격렬해졌다.
마치, 이대로 서로를 삼켜버릴 것처럼.
이클리트는 점점 더 그녀를 몰아붙이며, 작은 빈틈도 내어주지 않은 채 그녀의 숨을 들이켰다.
그 움직임에서 자꾸만 그의 애달픔이 읽혔다.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날 떠나지 마. 날 버리지 마. 계속,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처절하기까지 한 몸짓이 점점 서로의 이성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점멸하듯 깜빡이던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게 타오르며, 그녀를 바닥으로 거칠게 밀어뜨렸다.
바닥에 등허리가 부딪히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그가 그녀의 위로 올라섰다.
온몸을 감싸는 그의 무게감.
평소 사랑을 나눌 때와 다르게, 일자로 박히는 그의 홍안 아래 등줄기가 저릿해졌다.
“아멜리아.”
심연처럼 차갑고 짙은 목소리가 오직 그녀의 이름만을 음미하며 되뇌었다.
이클리트가 다시금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하지만 아까와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통증이 느껴질 만큼 옥죄는 손길에 이끌려, 그녀는 그의 시선에 묶인 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그녀를 훑어 내리다가 이내 더 바짝 상체를 숙이며 사납게 읊조렸다.
“그댄 내 거야. 내 것이야. 나의 아내야. 날 떠날 생각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다!”
“이클리트…….”
소유와 집착이 뒤엉킨 채, 그의 체향과. 숨결과. 심장 소리가 순식간에 아멜리아의 전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매 순간 다정하게 안아주던 그의 모습은 없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숨결이 격하게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이따금 귓가를 훑고 지나가는 목소리에 아멜리아의 심장이 아찔하게 들썩였다.
“이제부터 진짜 위험해질 거야. 전부, 내 마음대로 할 거니까.”
하지만 어느새 아멜리아는 그에게 몸을 맡기고서, 떨리는 손가락을 벌려 그를 꼭 붙잡았다.
그 움직임에 이클리트의 동공이 크게 부풀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너졌다.
결국, 그녀 역시 그를 원하고 있었다.
이클리트가 날개를 펼치고서, 온 힘을 다해 그녀를 감쌌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으니까.
이토록 슬픈 와중에도 그녀를 안고 있으니, 속절없이 몸이 들떠서는 미칠 듯이 심장이 뛰었다.
이 순간에도 그녀만이 그에겐 전부였기에.
이런 자신이 어떻게.
“당신을 잃어…….”
결국, 그는 끝까지 그녀에게 나빠지지도, 위험해지지도 못했다.
다시금 다정해진 그의 손길이 그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고, 아멜리아는 그런 그에게 안긴 채 아까보다 더 절실해진 슬픔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자꾸만 비집고 나오려는 이 말 만큼은 가까스로 입안 가득 물었다.
‘나도. 나도 당신이랑 계속 살고 싶어요. 살고 싶어…….’
이 말을 내뱉는 순간, 그에게 함께 죽어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아멜리아는 자꾸 흔들리는 눈에 힘을 주고서, 끝까지 그를 강하게 마주 보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 사람을. 이 사람을.
“살아줘요, 부디. 이클리트, 당신은 살아야 해요. 제발…….”
하지만 끝내 이클리트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신음 외에 더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도록.
그녀를 탐하고, 원하기만 했다.
***
어젯밤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공기마저 눅진한 새벽녘.
하지만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두웠기에, 짙은 어둠이 이클리트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밤새 자신을 받아들이느라 지쳐 잠들어 있는 아멜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였다.
이클리트는 혹여 추울까 봐, 주변의 바람을 완전히 멈춰버렸다.
바람 소리마저 완전히 사라지니, 오직 그녀의 숨소리만이 그에게 들리는 전부였다.
그녀의 얼굴을 쉼 없이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공포에 질려 떨렸다.
‘1년, 이라고.’
내리깐 시선 끝에 아멜리아의 제비꽃이 보였다.
‘고작 저런 게 감히 그녀의 생을 움직인다고.’
그녀가 없는 세상을 엿본 적이 있었다.
그저 악몽이라 여기며 외면했던 그 꿈.
비석에 그녀의 이름만 허무하게 남겨져 있던 그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그 꿈을 현실이 되게 할 수 없었다.
계속 그녀의 제비꽃을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나직이 흔들렸다.
“제비꽃. 로사…….”
갑자기 로사가 남긴 편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너무 거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어서, 그 마나 때문에 생명이 깎여가는 거라고.
그녀를 살리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과 우연에서 운명으로 얽히게 했다고 했다.
‘나의 힘으로. 생명을 피우는 이 힘으로…….’
-대공 전하, 아가씨의 심장의 꽃을 부탁해요. 오직 대공 전하만이 아가씨의 꽃을 지킬 수 있으십니다.-
심장의 꽃이 그저 비유가 아니라면.
정말로 저 제비꽃을 뜻하는 거라면.
“내가 살릴 수 있는 거야. 내가, 찾아야 하는 거야.”
대체 이 힘으로 뭘 어떻게 해야 그녀가 산다는 걸까?
이클리트는 자신의 힘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분명 반은 인간의 피가 섞여 있는데, 왜 온전한 수인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 왜 순수 수인보다 더 강한 힘을 움직일 수 있는지.
처음엔 아스란의 실험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내가 가진 힘에 뭔가 비밀이 있는 거다. 그 비밀이, 아멜리아를 살릴 수 있는 거라면.’
그에게 이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떠올린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설령, 당신과의 맹약을 깨뜨리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멀리서 어떤 기척을 느낀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푸른 눈동자가 다시금 시뻘겋게 변하면서, 검은 날개를 높이 펼쳤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멜리아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