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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화. 괴물 (146/199)


146화. 괴물
2022.05.27.


카마리와 이사나는 가까스로 제단에서 빠져나와 협곡을 건너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황제의 추격대가 협곡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밤도 늦었고, 괜히 돌아다니다가 잡히면 그게 더 곤란했기에.

그들은 밤새 숨어 있다가, 이른 새벽녘이 되어서야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사방으로 기척을 살피며 나직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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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계속 있다간 들킬 거예요. 어떻게든 협곡을 빠져나가서 마을 안으로 몸을 숨겨야 합니다.”

카마리는 이사나의 말에 그저 이를 악물었다.

내색하고 싶지 않았으나, 카마리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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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힐로 단장님은 괜찮으시겠지. 역시 내가 끝까지 남았어야 했을까…….’

이사나는 말없이 조용한 카마리의 속내를 꿰뚫고서, 장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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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리 경이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난 카마리 경을 기절해서라도 데리고 나왔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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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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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그 상황에서 카마리 경은 도움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카힐로 경에게 오히려 짐이 됐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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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쉽게 내팽개치고 도망친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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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전부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사람도 마음 편한데, 카마리 경이 왜 그렇게 불편해하는 거예요? 이것도 하나의 작전인 겁니다. 훗날을 도모해야 할, 가장 큰 임무가 카마리 경한테 있는 거니 정신 똑바로 차려요. 아직 추격대가 주위에 있을 텐데, 괜히 잡혀서 꼴사납게 끌려가지 말고.”

나름대로 걱정해주는 말에, 카마리는 자기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는 괜한 생각을 털어내며, 악착같이 이사나의 뒤를 따랐다.

이사나는 발소리부터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이제야 조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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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험한 길로 갈 겁니다. 그래야 추격대를 피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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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신경 쓰지 마. 당신 발목 잡는 한심한 짓까진 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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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제 엄청 편하게 말을 놓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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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도 아니고, 존경할만한 사람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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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벽이 없어진 기분이라, 난 이게 더 편하긴 하네.”

이사나의 가벼운 말에도 카마리는 여전히 마음이 술렁여선, 더 사납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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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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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이사나는 괜스레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카마리는 그런 이사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전히 둘만 있는 시간이었다.

그때, 눈앞에서 그를 놓친 이후.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니. 반드시 다시 찾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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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걱정해서 왔다고 했어. 그건 진심일 거야. 그는 여전히 이사나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한 거야.’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

카마리의 눈빛이 한순간 흔들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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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반인반수임을 알아차려서 떠난 거야?”

걸어가던 이사나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러다가 한껏 어두워진 어조로 짧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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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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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 루베르잖아. 수인과 루베르는 사이가 좋은 거 아니야? 반인반수라면 더더욱 루베르는 대공 전하를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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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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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증오하는 거지? 사실은 떠나고 싶지 않았잖아.”

어렵사리 입을 열었던 카마리는 점점 감정이 복받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사실, 그에게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속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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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반인반수였다는 건 나도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대공 전하께서 달라지시는 건 아니야. 그분은 똑같아. 내가 봐온 그분은 똑같으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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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이해하려고 하지 마요.”

순간, 이사나의 싸늘한 목소리가 카마리에게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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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려고 하면서, 나한테 또 흔들리지 말라고. 지금은 잠깐 같이 있지만, 나는 변함없어요. 수인도 반인반수도 증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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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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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마리 경은 그분이 설령 반인반수라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테고, 계속 지킬 거잖아요? 그렇다면 우린 계속 적이에요.”

카마리의 입술 끝이 하얗게 떨렸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그때, 이사나가 장총을 들고서 곧장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카마리 역시 소매에 숨겼던 암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든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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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

카마리의 떨리는 목소리 끝에 닿은 사람은 바로 이클리트, 그가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이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멀어지는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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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모습을 감추지도 않고 무방비하게 지나간다고? 황실 추격대가 계속 쫓고 있을 텐데? 게다가 가주님은 어디 계시는…… 설마.’

그는 곧장 이클리트가 날아온 방향을 확인하고서는 그쪽을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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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나 경? 이사나 경!”

카마리는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 이사나의 모습에 이클리트를 뒤로 하고 같이 달렸다.

이클리트는 이사나와 카마리가 아멜리아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안도하고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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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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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나 경! 대체 어딜 가는 거야!”

카마리가 뒤에서 계속 외쳤지만, 이사나는 이클리트가 날아온 방향만을 되뇌면서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내 그가 멈춘 곳은 협곡의 절벽 근처.

그가 아주 조심스럽게 절벽 주변을 살피자, 한쪽 바닥이 비정상적으로 휩쓸린 흔적이 있었다.

게다가 떨어져 있는 검은 깃털까지.

일부러 이런 흔적을 남긴 거다.

이사나는 절벽 아래를 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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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이 이 아래 계시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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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이? 그럼 아까 대공 전하께서 여기를 알려주려고…….”

상황을 파악한 카마리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곧장 암벽을 잡고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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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카마리 경!”

이사나는 이 위험한 곳을 잘도 맨손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담력에 한숨 섞인 감탄을 했다.

얼마쯤 내려갔을까.

평지에 발을 내딛자마자 카마리는 쓰러져 있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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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

카마리가 그녀에게 달려갔지만, 아멜리아는 의식이 혼미해져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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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 가주님!”

그녀는 재빨리 아멜리아의 호흡과 맥을 살폈다.

이사나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카마리를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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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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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이 많이 쇠하긴 하셨지만, 괜찮아. 그래도 얼른 치료사에게 데려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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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대공 전하…… 안 돼요…… 제발, 당신은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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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가주님!”

의식을 잃은 이 와중에도,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사나는 그 모습에 무거운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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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주님을 남겨두고, 대체 어딜 간 거지?’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사나는 곧장 아멜리아를 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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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황후 폐하 별장으로 가죠. 그나마 거기가 가장 안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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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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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렌도 생각이 있으니, 이 주변으로 은밀히 티어들을 보냈을 겁니다. 신호를 계속 보내면서 가봐야죠.”

이사나는 바닥에 넝마가 된 채 나뒹구는 녹색 드레스를 슬쩍 보고선 아멜리아를 업은 손에 힘을 주고서 그대로 달렸다.

***

키르케는 자신을 찾는 에드조프마저 뒤로 한 채, 어수선함을 틈타 말을 타고 곧장 황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은 클로에 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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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녀의 정체가 뭐지? 대체 수인의 어느 일족이기에 클리오 대공이 수왕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때, 전속력으로 달리던 키르케가 흠칫하고는 곧장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말이 멈추기도 전에 순식간에 말의 목이 그대로 꿰뚫리면서, 키르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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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키르케는 짧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이 드리운 그림자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키르케는 섬뜩한 공기를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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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오 대공 전하? 흐으윽!”

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클리트의 시커먼 발톱이 키르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서 그대로 나무에 처박았다.

키르케는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송곳처럼 박히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이클리트는 이대로 그녀를 갈기갈기 찢고 싶은 것을 꾹 참고서, 차갑게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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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뱀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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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을 죄는 살기에도 키르케는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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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뵙게 됩니다. 고귀하신 황자 전하신 줄 알았는데……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를 줄이야……. 지난번, 흑표범의 목을 꿰뚫었던 것 역시. 대공 전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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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그분께 피를 흘리게 했으니까.”

키르케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이클리트는 더욱 세게 그녀의 목을 조였다.

날 선 발톱이 그녀의 살결에 박혀선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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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역시 마찬가지지. 감히 그분께 손을 대다니. 감히 너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고막을 찢을 듯한 포효에도 키르케의 입꼬리에선 미소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순간 헛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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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정체가 뭐지? 에드조프의 유모로 황실에 숨어서 뭘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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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대공 전하와 같은 목적일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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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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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은 제가 한 것이 맞지만, 저는 단지 솔라 제국민만 건드렸습니다.”

키르케는 번뜩이는 눈빛으로 정녕 뱀처럼 요야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에드조프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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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과 눈이 닮았어. 묘하게 풍기는 이 기분 나쁜 분위기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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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듈라 조화에 제가 만든 독을 묻혀서, 제국민들의 움직임을 붙잡고 회담을 망친 후, 피오레 공작 각하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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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 직전, 그분의 앞에 네가 있었다.”

이클리트는 분명 똑똑히 봤었다.

아멜리아의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던 이 여자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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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께서 저를 보셨다면, 공작 각하께서도 저를 봤다는 건데. 왜 공작 각하께서는 폭발되기 전에 도망치지 못했을까요? 왜 도와달라고 외치지도 못했을까요?”

이클리트는 키르케의 말에 한순간 눈빛이 멈칫했다.

키르케는 그 작은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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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그 순간 공작 각하께서는 온몸이 마비되셨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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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한 짓이니까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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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훗! 대공 전하께선 정말로 모르고 계셨군요. 하긴, 그래도 핏줄을 나눴으니, 믿고 계셨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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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헛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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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에 묻힌 독은 독성이 약합니다. 가까이에서 노출된 제국민과 신녀들, 그 꽃을 만들었던 소녀들만 중독되었지요. 공작 각하께서 당하신 독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키르케는 느릿한 어조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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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란 황제 폐하이십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그 녹색 드레스 때문이지요.”

이클리트는 아스란이라는 말에 일순, 손끝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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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왜 피오레 공작 각하께 독을 쓰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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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나의 약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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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대공 전하를 가지고자 공작 각하를 이용한 겁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특별한 힘 때문에!”

이클리트는 분노로 뒤엉킨 숨을 겨우 삼켰다.

그렇게도 그녀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그녀가 위험해진 모든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

애초에 모든 불행의 시작인 봉인된 시간의 숲.

그 봉인을 풀 열쇠!

살기로 얼어붙었던 그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키르케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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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힘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것이 있나?”

자신의 힘에 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이클리트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것이 바로 이 여자.

그나마 같은 수인 일족인 이 여자였다.

키르케는 이클리트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에서 뭔가 애타는 갈망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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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내게 자신의 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다니.’

그건 즉, 자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건데…….

누구도 그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겠지.

수인의 힘을 아는 건, 오직 수인뿐이니까.

그녀에겐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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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힘을 내 손에 넣을 수도 있겠구나.’

키르케는 미치도록 흥분되는 심장을 가다듬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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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힘은 고귀합니다. 우리와 같은 수인의 힘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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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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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수왕 폐하의 힘과 흡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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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왕?”

이클리트는 순간, 소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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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저 그런 반인반수가 아닙니다. 고귀한 수인이에요. 수왕의 피를 이어받은······.’

  
그땐, 말 같지도 않다고 여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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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왕은.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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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의 지배자이며, 시간의 숲의 수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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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숲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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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말로는 부족합니다. 정령과 함께 이 자연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능력은 바로, 생명을 다루는 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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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다룬다고?”

이클리트는 그 한마디에 눈빛이 번뜩였고, 키르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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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여자는 생명을 다루는 이 힘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는 거다.’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클리트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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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다룬다면, 죽음도 다스릴 수 있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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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서 알고 싶으신 것이 많으시군요.”

갑자기 키르케가 입을 다물어버리자, 이클리트는 다시금 그녀에게 닿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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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대답해!”

그가 다루는 생명은 고작 식물을 피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 힘으로, 아멜리아의 제비꽃을 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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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것을 얻고 싶으시면, 대가가 필요하지요.”

마침내 키르케가 본색을 드러내자, 이클리트의 눈빛이 더욱 얼어붙었다.

이 여자는 이미 눈치챘던 거다.

자신이 지금 이 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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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미끼를 던졌구나.’

이 간사한 여자를 당장이라도 죽여야 하는데.

이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 때문에 그녀가 위험해졌고, 루베르도 궁지에 몰렸으며, 세인트와 같은 반인반수들이 밀주로 인해 이용당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지만…….

그런데도 이클리트는 그 모든 죄악 앞에 눈을 감고, 시커멓게 치솟는 욕심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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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멜리아, 그녀를 살려야 해. 지금 내게 그녀보다 중요한 건 없다.’

설령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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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원하는 게 뭐지?”

떨어져 주마, 나락 끝까지.

애초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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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괴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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