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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화. 닿지 못하는 이름 (154/199)


154화. 닿지 못하는 이름
2022.06.24.


여름궁으로 들어오자, 에리얼이 곧장 아멜리아를 맞이했다.

그는 근위대 단장과 달리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죄인 이클리트 때문에 피오레 공작가에 황실이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차가워졌으나, 한껏 숨을 고르며 참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 공작 각하께 청을 드리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피오레 공작 각하를 참으로 마음에 들어 하신 모양입니다.”

아멜리아는 뭔가 불편한 마음으로 에리얼의 긴 서문을 들었다.

에리얼은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어야, 피오레 공작가의 임무도 무사히 끝나지 않겠습니까? 비록, 평화 회담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녀는 에리얼이 숨기고 있는 속내 앞에 절로 냉소를 그렸다.


‘은근슬쩍 피오레 공작가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냐는 충고로 들리는군.’

“폐하께서도 공각 각하께 기대가 크십니다.”

‘게다가 황제가 피오레를 그만큼 주시하고 있다, 이거고.’

굳어진 표정을 띠고 있던 아멜리아가 일순 에리얼을 향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폐하께서 이리 간곡하게 부탁하시니, 잘 마무리해야지.”

“…….”

“그나저나 폐하께서도 이번 일 때문에 심려가 크실 텐데…… 유감이야. 황실이 정말로 수인에게 당했다니 말이지. 직접 듣고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아멜리아는 가볍게 눈썹을 추켜세우며, 에리얼을 응시했다.


“정말, 듣고도 말이야.”

날카롭게 박히는 아멜리아의 말에, 에리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으나,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곳까지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둘 사이로 흐르는 팽팽한 공기가 이제야 조금 느슨해지면서, 아멜리아는 에리얼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여름궁 안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고요했다.

아니, 고요하다 못해 무거울 정도로 적막하다고 할까?

하긴, 태양의 제단이 망가지고, 황실에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모두가 침묵할 수밖에.

아멜리아는 복도를 걸으면서, 이곳의 구조를 다시 파악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곳은 아멜리아가 늑대들에게 쫓긴다고 마구 달렸던 곳이라, 대충은 머리가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고.’

그녀의 생각대로 에리얼과 그녀는 계단을 올랐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지하실이 나오는 복도가 나오는데. 여기서 한 층 더. 한 층 더 올라가서 모퉁이를 돌게 되면…….’

아멜리아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머릿속으로 지도를 펼치고 있던 찰나, 갑자기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친 순간,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에리얼은 어디선가 자꾸만 불어오는 바람에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어디 창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모양인데…….”

바람이 점점 더 심하게 불어오면서, 복도를 밝히던 횃불들이 점멸하다가 이내 순식간에 꺼지고 말았다.

에리얼은 한숨을 삼키며, 결국 걸음을 멈췄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공작 각하. 제가 가서 확인을…… 공작 각하? 각하!”

하지만 아멜리아는 에리얼을 뒤로 한 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엔 이미 확신이 차 있었다.


‘대공 전하야. 대공 전하께서 계셔. 분명 내가 온 걸 아신 거야. 날 부르는 거라고!’

그녀의 생각과 달리, 점점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그녀의 걸음을 밀어내는 듯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서 좁혀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찾을 거야. 아무리 날 밀어내도, 반드시. 반드시!’

그렇게 복도 끝에 다다르고, 마지막 모퉁이를 돈 순간,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클리트가 아니었다.


“……아버지?”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젠 백작, 그것도 기사들에게 붙들려 있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아젠 역시 기사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멜리아를 발견하고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아젠이 여기 있는 것도 의아한데, 왜 기사들에게 붙들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체자렛 백작을 붙잡고 뭐 하는 것이냐!”

아멜리아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를 뒤따라왔던 에리얼이 낭패 어린 표정을 지으며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곧장 아젠을 풀어주었다.

아멜리아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에리얼을 응시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체자렛 백작이 왜 기사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제대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 아니, 제대로 답하라.”

아멜리아의 냉랭한 명령에 에리얼과 기사들이 곧장 고개를 숙였다.


“기사들에게 붙잡혀 있다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공작 각하. 체자렛 백작께서도 황제 폐하의 명으로 걸음 하신 겁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지금 알현실에 계시지 않아서, 기사들이 안내해주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백작님.”

에리얼이 슬쩍 시선을 올려 아젠을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싸늘한 눈초리에 아젠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소란 피우지 않아도 됩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아멜리아는 뭔가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감지하고서 아젠을 바라보았다.


“아버…… 아니. 정말입니까, 체자렛 백작.”

아젠은 제대로 자세를 갖추고서 아멜리아 앞에 섰다.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한 그 날 이후, 처음 마주하는 그의 모습.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쩐지 조금, 야윈 듯한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아젠의 눈동자는 예전처럼 변함없었다.

변함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물론입니다. 잠시 피오레 공작 각하와 독대할 수 있겠습니까?”

뜻밖의 요구에 아멜리아는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는 세스가 황자 전하를 알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체자렛 백작님을 찾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에리얼이 자연스럽게 아젠의 요청을 끊어냈다.

하지만 아젠은 집요하게 말을 이었다.


“잠시, 가족 일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아멜리아는 더더욱 심장이 덜컥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의 어머니 기일이 멀지 않아서, 나눌 얘기가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이어진 말에 떨리는 숨을 삼켰다.

어머니 기일에 대한 얘기라니.

두 사람은 지금껏 한 번도 어머니 기일을 함께 챙긴 적이 없었다.


‘어머니 때문에 누구보다 날 원망하는 아버지야. 게다가 나는 어머니 기일에, 아버지에게 버려졌었고…….’

그런데 그걸 입에 담고서 자신을 붙잡았다는 건.


‘뭔가가 있구나.’

아멜리아는 못마땅해하는 에리얼을 향해 짧게 명했다.


“잠시 얘길 나누겠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에리얼은 기사들과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아멜리아는 아젠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이죠?”

그러자 아젠은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클리오 대공을 찾으려고 하는 거면 그만둬라. 이쯤에서 더는 얽히지 마.”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그분을 만나신 겁니까? 지하실에 계세요? 아버지는 대체 여기 왜 있는 겁니까? 저들이 아버지를 왜!”

“시간 없다. 내 말에 대답하기나 해. 지금이라도 헤어진 걸 다행으로 여기고, 절대. 절대 얽히지 마.”

“싫습니다. 그분은 제 남편이에요. 아무리 그분이 반인반수라고 해도 저는!”

“반인반수인 게 문제가 아니다.”

뭐지? 대체 그분에 대해서 뭘 알고 계시는 거지?


“아버지는, 대체…….”

아젠은 에리얼의 눈치를 살피며 짧게 읊조렸다.


“황제의 실험에 내가 가담했다.”

그 한마디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진실을 더 알고 싶다면, 체자렛 백작가로 와. 날 황궁에서 꺼내주는 게 조건이다.”

“꺼내 달라니…… 설마 폐하께서 아버지를 여기 감금한 겁니까?”

하지만 아젠은 더는 침묵한 채, 아멜리아에게 살며시 고개 숙이며 말했다.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

아젠은 아멜리아를 지나쳐서는 그대로 에리얼과 함께 있는 기사들에게 걸어갔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니, 서두르지.”

“예, 백작님.”

그렇게 아젠이 기사들과 사라졌다.

아멜리아의 머릿속에서는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에리얼은 굳어져 있는 아멜리아에게 걸어왔다.


“얘기 나누셨습니까, 공작 각하.”

그녀는 순식간에 당황한 표정을 지우며, 의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기일이 몹시 중요해서 말이지. 조만간 체자렛 백작가에 방문해야 할 것 같군. 황궁에서 체자렛 백작의 용무가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에리얼은 살짝 굳어진 입매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멜리아는 에리얼의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

세스가는 아멜리아를 만나자마자, 손등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살아서 보니 너무 좋네, 피오레 공.”

“저야말로 이리 무사히 뵐 수 있어서 안심했어요, 황자 전하. 정말로 괜찮으신 거죠?”

세스가는 아멜리아의 낯빛을 살폈다.


“나보다 피오레 공이 더 걱정이었지. 꼴사납게 기절해서는 너무 큰 사건을 놓쳤었네. 그래도 걱정한 것보단 표정이 괜찮아 보여. 막 울고 있으면 어쩌지, 했거든.”

세스가의 가벼운 농에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빨리 제정신 차리지 않으면,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상황이니까요.”

세스가는 어떻게든 잘 버티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클리오 대공이 반인반수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나 보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황자 전하가 말씀하신 시간의 숲이 움직인다는 말에 더 관심을 보였던 거고, 평화가 더 절실했죠.”

“시간의 숲이 움직인 것과 대공 전하가 관련 있다는 건가?”

아멜리아는 순간 클로에 황후를 떠올리며, 말을 감췄다.


“어쩌면, 그런 것 같아요.”

세스가는 아멜리아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느꼈으나,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아이냑이 잡혀 있다고 들었어. 아무래도 루베르가 더 위험해지겠더군. 프리메에선 나보고 돌아오라고 난리야. 나를 명분 삼아 솔라 제국을 가만 안 둘 기세니까. 하지만 난 여기서 루베르를 지킬 거야.”

뜻밖의 말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루베르를, 지키시겠다고요?”

세스가는 진지한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평화를 원한다는 말에 거짓은 없어. 평화 회담은 실패로 끝났고, 상황은 더 악화됐지.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니겠어?”

“황자 전하…….”

“그러니까 앞으로 나의 행보를 보고 믿음이 가면, 말해줘. 나는 피오레 공의 신뢰를 원하니까.”

세스가가 싱긋 웃으면서 말하자, 아멜리아는 무거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 내가 숨기고 있는걸, 눈치채셨구나.’

세스가를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문제만큼은 신중했다.

무려 솔라 황실의 비밀.

어디서부터 누구까지 얽혀있으며, 누가 알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괜찮아.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오직 피오레 공, 자신의 판단을 믿어야 해.”

“네.”

“그나저나, 여기 나도 나지만 클리오 대공을 만나려고 온 거 아니야? 어디 있는지는 아는 건가? 내가 뭐 해줄 게 있을까?”

“사실 그랬지만,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응?”

 

***



“부르셨습니까, 세스가 황자 전하.”

에리얼이 곁눈질로 아멜리아를 살피며 세스가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기에, 허락을 요청한다.”

세스가가 아닌 아멜리아의 요청에 에리얼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말씀입니까?”

“사실 내가 직접 폐하를 알현하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직 몸이 안 좋아서, 피오레 공에게 부탁하기로 했지.”

세스가가 창백해진 낯빛으로 이마를 짚자, 에리얼은 뭔가 이상하긴 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폐하께선 알현실에 계십니다. 제가 폐하께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아멜리아는 에리얼 몰래 세스가와 눈인사를 나누고서, 침실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한 채, 한 시녀가 에리얼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에리얼 님.”

시녀는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피며, 에리얼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에리얼의 표정이 완전히 얼어붙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폐하께선 아시느냐?”

“아직 모르십니다.”

“그럼 일단 숨겨야 한다.”

에리얼은 그제야 아멜리아를 보면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잠시 급한 일이 생겨서,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다른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아니야. 난 좀 기다리면 되니까. 급한 일 같은데, 어서 가봐.”

“송구합니다.”

아멜리아가 의심하겠지만, 그걸 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에리얼은 이를 악물고서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 또 사라지셨다니!’

아멜리아는 사라지는 에리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지? 얼핏 폐하께 뭔가 숨기는 것 같았는데…….’

“대체 이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리고, 그때 그 바람 때문에 꺼진 횃불이 많아서 복도가 여전히 어두웠다.


“이젠, 어둠이 무섭지는 않지만.”

그녀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제 옆자리를 응시했다.

그때, 안온한 바람이 다정하게 그녀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곤 어두웠던 복도가 순식간에 환한 불빛으로 그녀의 옆을 채웠다.


“하아…….”

아멜리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올랐고, 눈동자는 젖은 채 흔들렸다.


“……이클리트…….”

그녀의 속삭임 끝에, 조금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는 이클리트의 모습이 있었다.


“아멜리아…….”

서로를 품은 속삭임이, 오직 서로에게만 닿지 못한 채 아릿하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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