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가장 하고 싶었던 말
(155/199)
155화. 가장 하고 싶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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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화. 가장 하고 싶었던 말
2022.06.27.
“이클리트…….”
사랑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내뱉는 것부터 그 온도가 다르다.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심장이 어찌나 뛰던지, 온몸이 들썩이고 만다.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에게 하고픈 무수한 말들은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그저 머릿속을 꽉 채우는 건.
그가 너무, 너무 보고 싶다는 것.
아멜리아는 어느새 항상 지니고 다니게 된 반쯤 사라진 얼음 목걸이를 꼭 쥐고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목걸이가 더 녹지 않았으니까.
이곳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거니까.
‘괜찮은 거겠지? 어디 아프진 않겠지?’
그냥, 딱 한 번만…….
꾹꾹 누르던 그리움이 끝내 그녀의 입술에 나직이 눌린 채 새어 나왔다.
“얼굴만, 보여주면 안 돼요? 대공 전하가 무사한지 보고 싶어요. 괜찮은지. 그 잘생긴 얼굴에 흉터 남은 건 아닌지. 아니. 흉터 남아도 좋으니까.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요. 그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까, 그냥. 그냥 당신이 보고 싶어…….”
잔뜩 힘을 주고 내뱉었으나, 끝내 속절없이 허물어져서는 아멜리아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바람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강한 바람이 그녀의 주위를 맴돌다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이 바람 가득, 그의 체온이 전해진다.
마치 그가 안아주는 것처럼.
게다가 사방에서 쏟아지는 이 불빛마저도 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하긴. 예전엔 날 위해 태양까지 가져왔었지…….’
어두우면, 밝히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보고 싶으면, 만나면 된다.
아멜리아는 더는 나약한 모습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그땐 나한테 대공 전하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갔으니까. 그럼 이번엔 내 말만 똑바로 들어요.”
그녀는 더는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누구 마음대로 이혼이에요! 난 동의 못 해요. 당신은 약속 어겨도, 난 약속 절대 안 어기니까. 나는 맹약을 지킬 거예요. 당신을 지켜낼 거예요. 당신은 내 거야. 누구 마음대로 떠나겠다는 거야? 난 절대 허락 못 해!”
자신의 곁을 머무는 바람에, 그를 향한 속삭임을 담고 또 담아서 실어 보냈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맹약은,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주는 거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꼭, 곁에 있을 거예요.”
아멜리아를 지켜보는 이클리트는 온몸에 힘을 꽉 주고서 버텼다.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달려가지 않도록.
공기에서조차 느껴지는 그리움과 애달픔에 무너지지 않도록.
그렇게 가까스로 이성을 긁어모으고 모아 버티다가, 곁에 있어 주길 바란다는 말에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도 그 맹약을 지키기 위한 겁니다. 오랫동안 그대가 이곳에 있어 주길 바라니까.”
그래도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자신의 아내라는 이름만 붙잡은 채, 계속 주저앉아 있을 그녀가 아니기에.
그녀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니까.
이클리트는 조금은 안도하면서,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바람결에 보냈다.
하고픈 말을 다 해버린 아멜리아는 조금은 속이 누그러졌다.
그 순간, 귓가로 빨려드는 바람결에 이상한 속삭임이 들렸다.
<솔라리스 광장에서 사흘 후, 반역자 아이냑을 공개 처형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처형의 총책임을 공작 각하께 맡기셨습니다.>
“이건…….”
<아이냑과 관련된 루베르도 수소문하여 처리하시라는 명입니다.>
에리얼의 목소리, 그것도 황제가 아이냑을 공개 처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다른 루베르까지 끌어들이겠다는 거야?’
아멜리아는 날 선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황제가 대공 전하를 이용하고자 시간을 끌려는 거구나. 죄 없는 루베르를 학살하면서!’
서둘러 움직이려던 아멜리아는 잠시 멈춰 서서는 다시금 이클리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계속 앞만 보고 갈 거예요. 대공 전하가 평범하게 행복해지는 그런 세상을, 난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내 걱정 말아요.”
클로에 황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여기선 말할 수 없었기에 꾹 참으며 다른 식으로 돌려 말했다.
“나만 대공 전하를 기다리는 게 아니에요.”
분명 황후 폐하께서도 계속 대공 전하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셨을 거다.
그 기억이 없는 순간에도 에드조프가 아닌 대공 전하를 택하고, 안아주셨으니까.
내게 고맙다고 한 말과 조금만 버텨달라는 그 말은 분명, 대공 전하를 위한 말일 거다.
그러니 두 사람이 꼭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이 세상에 도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대공 전하 역시 사랑과 애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그에게도 그런 다정한 부모가 있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으니까.
“대공 전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으니까. 그러니까. 다치지 마요, 절대…….”
마지막으로 그에게 진짜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가장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내가 오늘 더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분명 어디선가 그는 자신을 지켜볼 테니까.
그가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은 환하게 웃는 지금의 모습일 테니.
아멜리아가 걸음을 돌렸다.
그때, 또 다른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이제 어리지 않습니다.>
선명히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더는 망설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제야 이클리트가 그녀의 빈자리로 걸어와서는 아멜리아를 닮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도 말했잖아요.”
‘계속, 사랑해줄 겁니까?’
‘더 많이 사랑할 거예요.’
‘아니. 내가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그건 그대에게 절대, 지지 않아요.”
***
에리얼이 곧장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황후궁 앞에는 에드조프가 서 있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
“시녀가 제대로 전한 모양이군.”
“그럼 대공 전하께서 보낸 시녀였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다급한 에리얼과 달리 에드조프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아마 안 돌아오실 거다.”
“예?”
“어마마마는 내가 찾을 것이다. 그러니 폐하께 말씀드리지 말고, 황후궁에서 얘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대가 신경 쓰도록 해. 그래서 부른 거니까.”
“하, 하지만…….”
에드조프는 무서운 표정으로 에리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폐하께서 아시면 그대도 곤란할 텐데. 아닌가?”
사실 그랬다.
지난번, 황궁 안에서 사라지셨을 때도 폐하께서 이성을 잃으셨는데.
아예 황궁 밖으로 나가서 사라지셨다니…….
이런 시국에 폐하께서 어떤 모습을 보이실지 감히 상상이 안 돼서 더 두려웠다.
‘더는 장로회와 신성회에 빈틈을 보이셔선 안 돼.’
그러니 일단은, 바스티얀 대공을 믿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좋아.”
에드조프는 곧장 걸음을 돌려서는 쓰러진 쉐리를 만나러 갔다.
겨우 의식을 찾은 쉐리는 에드조프의 모습에 파리해진 표정으로 그를 붙잡았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
“네가 날 불렀다고?”
쉐리는 반쯤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제가. 제가 보았습니다. 보았어요!”
“뭘 봤다는 거지?”
“그, 그러니까……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 수인. 수인…… 그 붉은 눈동자는 분명…….”
겁에 질린 쉐리의 목소리에 에드조프는 무심히 한쪽 손목의 뱀 팔찌를 쓰다듬었다.
“어마마마께서 수인이었다고?”
쉐리는 수인이라는 단어 자체에 흠칫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닐 겁니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명 수인이, 그 사악한 것이 황후 폐하인 척한 겁니다. 얼른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야 합니다. 진짜 황후 폐하를 찾아야…….”
“지금 이 사실은 너만 아는 것이지?”
“저만 알고 있습니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렇군. 잘했어.”
그때, 에드조프가 쉐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른한 눈동자로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대, 대공 전하?”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서는 쉐리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내리며, 점점 뜨겁게 맥박치는 목덜미에 와 닿았다.
“그 입을 영원히 다물면, 더 잘했겠지?”
에드조프에게 홀리듯 취해있던 쉐리가 떨리는 입술을 벌렸다.
“예? 으윽!”
에드조프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뱀 팔찌가 진짜 뱀이 되어 순식간에 쉐리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쉐리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대로 몸이 고꾸라지면서 심장이 멎어버렸다.
에드조프는 의연하게 몸을 일으켜서는 다시 팔찌로 돌아온 뱀을 역겨운 눈초리로 응시했다.
키르케가 지난날, 여차하면 쓰라고 준 것이지만.
이런 재수 없는 힘을 쓰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칼로 죽이면 흔적이 남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는 양손을 털어내고서 걸음을 옮겼다.
에드조프는 클로에의 정체가 아직은 제국에 드러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클로에가 수인이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아스란은 자신을 버릴 거다.
자신을 진짜 아들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피가 단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거니까.
‘가짜가 되어 버려질 수 없어. 이제 와, 그럴 수는 없어.’
***
“피오레 공. 안 그래도 공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아스란은 아멜리아를 반겨주었고, 아멜리아는 단정한 표정으로 황제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아멜리아 클리오 피오레, 위대하신 솔라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스란은 아멜리아의 말에 눈썹을 움찔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지, 아니야. 피오레 공, 짐을 더 미안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예?”
“더는 클리오 피오레가 아니지.”
아멜리아는 아스란의 말에 멈칫하고선 이내 허한 숨을 삼켰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짐에게 송구할 일이 아니지.”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폐하께 청하였습니다. 솔라 제국에 조금 더 남아서 치유를 마치고 싶으니, 황궁에 머무는 것을 허하여 주길 바라옵니다.”
세스가가 프리메에 곧장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회복까지 다 하게 된다면 솔라는 프리메에게 진심으로 사죄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솔라에 남아주는 게 더 유리한 것이다.
“당연하지. 세스가 황자가 회복될 수 있도록, 솔라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피오레 공이 큰일을 하였군. 안 그래도 피오레 공에게 여러 가지 빚을 진 것 같았는데 말이야.”
아스란은 미소를 띄우며, 그녀에게 서늘한 말을 내뱉었다.
“루베르의 일은 정말로 유감이야. 공이 많이 신뢰했을 텐데…….”
“…….”
“공이 클리오 대공을 많이 사랑했던 것도 알고 말이지. 그런 공의 마음을 농락하고, 제국까지 농락하다니…….”
아멜리아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으나, 끝까지 참아냈다.
예전처럼 감정적으로만 굴 수 없으니까.
‘그런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억울하고 분할수록, 머릿속은 차갑고 또 차갑게.
더 이성적으로 견뎌야 한다.
“저보다 폐하께서 더 심려가 크실 테니, 도울 일이 있다면 다섯 공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돕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든든하군.”
하지만 상대가 계속 건드리면, 하나 정도는 맞받아쳐도 되지 않을까?
“평화 회담 때, 폐하께서 주셨던 녹색 드레스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정말이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멜리아가 먼저 그 드레스를 언급하자, 아스란은 재미있다는 듯 짙은 곡선을 그렸다.
“정말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드레스였는데…….”
“…….”
“다음엔 제가 감사와 사죄의 뜻으로 폐하께 꼭,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선물일지, 기대되는군.”
“아주 특별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둘 사이로 팽팽한 공기가 오갔다.
아멜리아는 겁내지 않고 이 분위기를 한 번 더 조였다.
“제 아버지가 황궁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체자렛 백작과 얘기가 좀 길어졌지. 좀 더 황궁에 머물러줘야 할 듯한데…….”
“지금은 피오레 공작이 아닌 한때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로서 폐하께 청을 드립니다.”
뜻밖의 말에 아스란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몹시 아꼈던 제 어머니이자, 체자렛 전 백작 부인이며, 피오레 전 영애였던 아일리 체자렛을 폐하께서 기억하신다면, 아버지와 기일을 함께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멜리아는 황궁에서 아젠을 꺼내기 위해, 외조부까지 거론하며, 아스란이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감금이 아니라면, 거절할 명분이 없지.’
아스란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군. 청을 들어줘야지.”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돌리려다 문득, 딱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클로에 황후 폐하께선, 잘 지내시옵니까?”
아스란은 그 한마디에 단정했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공이 그걸 왜 묻지?”
“황후 폐하께 크게 치하받았으니, 언제나 은혜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황후는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치하는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예, 폐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돌아선 아멜리아의 눈동자도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황제는 황후 폐하가 수왕인 걸 모르고 있나.’
만약 알았다면, 굳이 다른 수인과 아이를 만들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다른 수인의 아이가 왜 대공 전하가 된 걸까.
다른 수인이 낳은 진짜 아이는 어디 있는 거지?
그러면서 불길하게 파고드는 생각 하나.
“에드조프는 왜 황후 폐하의 아이가 된 걸까…….”
분명, 그 지하 미궁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실험에 실마리가 있다.
‘나는 대공 전하의 얘기로 단편적인 것만 알아. 자세한 건, 아버지께서 아셔.’
“일단은 아버지를 만나야 해.”
대체 그 금기의 실험에 아버지가 왜 얽혀 있는 건지, 그 또한 의문이었으니까.
***
황명과 함께 아젠은 서둘러 체자렛 백작가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황제에게서 풀려난 것이다.
물론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백작가는 끝이라고 황제가 협박했으니.
돌아갈 거다.
아젠은 그저 지금껏 두렵고 무서워서 꺼내지 못한 진실을 말하고자 움직이는 것뿐.
‘그 아이라도 다치지 말아야 해.’
아젠은 곧장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그 순간.
“오랜만에 뵙네요, 체자렛 백작님.”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키르케가 섬뜩한 미소를 띠며 손짓했다.
“너, 너는…….”
아젠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곧장 도망치려고 했으나, 키르케의 손짓에 뱀들이 순식간에 아젠을 휘감았고, 그대로 문이 쾅 닫힌 마차는 유유히 그곳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