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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화. 쓸모없어서, 버리는 거예요 (158/199)


158화. 쓸모없어서, 버리는 거예요
2022.07.08.


쥐 죽은 듯 고요한 백작가 안으로 메사리나가 다시 돌아왔다.

창백한 표정으로 메사리나를 기다리고 있던 후지아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갔다.


“대체 어디 갔었던 거야! 빨리 백작님께 가서 잘못했다고 빌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용서를 빌라고!”

하지만 메사리나가 꿈쩍도 하지 않자, 후지아는 날 선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지금 넋 놓고 있을 때야? 뭐든 해야지! 밤새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지! 이러다가 잘못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된다고!”

힘으로 끌어당기던 후지아의 손을 메사리나가 꽉 움켜쥐었다.


“언제까지 빌어?”

“뭐?”

“나, 이제 두 번 다시 무릎 꿇지 않을 거예요. 나도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고개 빳빳하게 들고서 전부 내 발아래 무릎 꿇리는 자리로 갈 거라고!”

“메사리나…….”

지난날, 클리오 대공에게도 무릎 꿇었고, 아멜리아 앞에도 꿇었다.

아까도 무릎 꿇었었지!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저 치욕에 치욕만 쌓일 뿐!

후지아는 감정적인 메사리나를 일단 다독여야 했다.


“네가 남작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백작님이 어떻게 아셨는지는 몰라도, 그건 이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난 남작의 피를 이었…… 아니. 난 체자렛 백작가의 피를 이었어요. 체자렛 백작가의 영애야. 이젠 유일한 후계자고.”

메사리나는 후지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져야 해. 내가 가지는 게 맞는 거예요. 난 아버지 딸이잖아. 내가 아버지 딸이란 말이에요!”

“너 지금 뭘 어쩌려고…….”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하녀들의 비명이 울렸다.


“악!”

“사, 살려주세요! 싫어!”

“괴물이야!”

백작가 전체에서 울리는 끔찍한 비명에 후지아는 파리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메사리나는 냉정한 표정으로 후지아를 붙잡고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지금 바로 침실로 가서 숨어 계세요. 절대로 나오지 마시고.”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저 비명은 대체 뭐고. 넌 무슨 일인지 아는 거니? 메사리나? 메사리나!”

그때, 메사리나의 앞으로 한 하녀가 달려와 기겁하며 외쳤다.


“아, 아가씨. 지금 백작가에 짐승들이. 짐승들이 습격해서…….”

메사리나는 하녀에게 후지아를 넘겼다.


“어머니 모시고 침실에 숨어 있어.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마.”

“아가씨!”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후지아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저택 안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미 공기 중에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메사리나는 걸음을 내디디면, 내디딜수록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서 버텼다.


“악!”

그때, 가까이에서 들리는 비명에 메사리나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백작가를 습격한 늑대가 하인을 물어뜯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메사리나는 절로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하인과 하녀들이 늑대들을 피해 도망치면서 다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온몸이 덜덜 떨렸으나, 이내 외면한 채 다리에 힘을 주고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는 메사리나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품 안에 있는 리볼버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으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으니까.

지금 그녀가 필사적으로 가고 있는 곳은 바로 아젠의 집무실이었다.

늑대들을 이끌고 있던 세인트가 집무실로 사라지는 메사리나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다가 이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

집무실과 중앙 홀과는 거리가 제법 있었기에, 소란을 듣지 못한 아젠이 무거운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 아래, 오직 벽난로의 불씨만이 어두운 불꽃을 일렁이고 있었다.

그 불그림자 아래에서, 아젠은 복잡한 표정을 띠고서 뭔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바로 펜던트 목걸이였다.

연신 손가락으로 그 목걸이를 머뭇거리며 만지고 있던 그가 슬그머니 펜던트를 열었다.

펜던트에 그려진 작은 초상화.

아멜리아를 너무나도 꼭 닮은, 아일리의 얼굴이었다.


“아일리. 나는 그대에게도 용서받지 못 하겠지. 내가 이토록 나약하고 무능하니까. 그래도. 그래도 이것만큼은…….”

아젠은 다시금 펜던트를 손에 꼭 쥐고서 눈을 감았다.

그때,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젠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왔구나.”

하지만 고개를 든 아젠은 흠칫했다.

그의 시선 끝에 아멜리아가 아닌 늑대가 광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으으으윽.”

아젠은 보자마자 반인반수임을 깨달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네놈이 여길 어떻게. 설마, 그 여자가!”

늑대는 섬뜩한 이를 드러내며, 점점 아젠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아젠은 그런 늑대에게서 서슬 퍼런 살기를 느끼며 조금씩, 조금씩 옆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곧장 벽에 장식되어 있던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젠을 향해 덤벼들었다.


“윽!”

아젠은 곧장 검을 휘둘렀으나, 기사가 아닌 그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위협조차 되지 않는 검을 휘두르며, 결국 궁지에 몰린 아젠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완전 짐승이 아닌 이상, 말은 알아듣겠지? 지금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너희들을 절대 살려두지 않을 거다. 그 여자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오직 키르케의 명령에 복종하게끔 세뇌당한 늑대가 드러낸 이를 감추지 않고서, 다시 아젠에게 달려들었다.

아젠은 가까스로 검으로 막아내며 외쳤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이냐! 시종장! 시종장!”

그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아젠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는 무의식중에 읊조렸다.


“아멜리아?”

하지만 그 이름 끝에 나타난 사람은 메사리나였다.


“메사리나…….”

메사리나는 쥐고 있던 리볼버를 천천히 들어 올려 단 한 곳을 향해 겨냥했다.

방아쇠에 걸려 잘게 떨리던 그녀의 손끝이 아젠이 내뱉은 아멜리아의 이름에 힘이 가해졌다.


“끝까지.”

그의 시야로 서늘한 총구가 보였다.

아젠은 뭔가 오싹한 느낌을 삼키며, 메사리나를 응시했다.


“너…….”

“제 이름이 아니네요. 그래서 다행이에요.”

 
탕-!


 

***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체자렛 백작가에 다다른 아멜리아는 순간 파고든 익숙한 굉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총성?”

“가주님?”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 듯, 호위로 함께 온 카마리가 곧장 검을 빼 들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카마리의 목소리에 아멜리아도 뭔가 섬찟한 분위기를 느꼈다.


‘백작가를 지키는 이도 없고. 게다가 그 총성은…….’

느낌이 몹시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어머니의 총을 챙겨 들고서 곧장 백작가로 뛰어갔다.


“가주님! 잠깐만요! 가주님!”

카마리를 뒤로 한 채, 백작가에 들어선 아멜리아는 절로 멈칫했다.


“이게 대체…….”

자신이 기억하던 백작가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당황했다.

사방이 캄캄했고, 공기 중에 떠도는 날 선 분위기에 절로 오한을 느꼈다.

거기다 어울리지 않는 피 냄새까지.

카마리는 아멜리아의 곁에서 바짝 경계하면서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저기…….”

카마리가 가리킨 방향에 피 묻은 짐승 발자국이 한 가득이었다.


‘설마 반인반수가 습격한 거야?’

아멜리아가 곧장 계단으로 올라가자, 인간화된 반인반수들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멜리아는 그들이 공격할 수 없도록, 곧장 바람의 마탄으로 길을 끊어버렸다.

콰쾅-!
 


“가주님!”

카마리는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 바닥에 움찔했고, 아멜리아는 카마리를 이끌고 반대편으로 달렸다.


“저쪽으로 가면 돼.”

아멜리아는 총에 끊임없이 마나를 장전하며 마탄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무사하신 거야? 아까 그 총성은 메사리나인가? 하지만 메사리나의 저격술로는 이들을 계속 막아내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때, 날카로운 바람이 불면서 아멜리아의 앞으로 세인트가 나타났다.

카마리는 곧장 세인트를 향해 검을 겨눴으나, 아멜리아가 말렸다.


“괜찮아!”

“하지만 지난번 협곡에서 본 녀석입니다!”

“우릴 공격하지 않잖아.”

“예?”

세인트는 정말로 아멜리아를 그저 빤히 응시했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확신했다.


‘분명 우릴 도와주는 거야.’

협곡에서도 대공 전하를 도와준 게 분명했다.


‘예전처럼 밀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건가?’

세인트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아멜리아는 그런 세인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 방향은 아버지의 집무실인데. 대체 왜 이쪽으로 날 유인하는 거지?’

 

***

단 한 발의 총성.

그 총성에 아젠을 공격하려 했던 늑대가 그의 발밑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호흡과 함께 아젠 역시 가슴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메사리나가 쏜 바람의 마탄이 칼날이 되어 늑대를 꿰뚫고, 아젠까지 함께 휘갈겼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 점점 힘을 잃는 동공으로 메사리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메사리나는 아젠에게 다가가서는 그가 떨어뜨린 검으로 죽은 늑대를 한 번 더 찔렀다.


“여기서 늑대와 장렬하게 싸우다가 함께 돌아가신 거로 해드릴게요.”

“너!”

그녀는 눈물 맺힌 눈가를 휘늘어뜨리며 웃기 시작했다.


“훗. 후후훗! 이젠 당신이 내 앞에 이렇게 무릎 꿇고 있네요? 하긴. 움직일 힘도 없겠지. 그런데도 끝까지 살려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헛소리라니.”

메사리나는 아젠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서 눈을 내리깔았다.

아젠은 파들거리는 손으로 피 칠갑이 된 가슴을 움켜쥔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생각했고, 당신 딸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부족했던 아멜리아 대신 이상적인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고요. 그런데도 끝까지 아멜리아, 아멜리아! 왜 다들 그 이름을 부르고 난리야!”

메사리나는 아예 몸을 숙이고서, 아젠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아니라고 하니까. 예. 맞아요. 나는 당신 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지킬 필요 없잖아. 그러니 죽이는 거예요. 내 피가 천해서. 이렇게 손에 피를 묻혀야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으니까. 그걸 가르쳐준 건, 당신이었잖아요?”

아젠은 가까스로 숨을 삼키며 섬뜩하게 박히는 메사리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쓸모없는 건 버리라고 했잖아요. 당신도 이제 나한테 쓸모가 없으니까. 당신의 가르침대로, 당신을 치워내고 체자렛을 가질 거예요. 그러니 날 원망하지 말아요.”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젠이 순식간에 손을 뻗어 메사리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야!”

메사리나는 아젠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아젠은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서 바짝 당겼다.

어느새 핏줄이 터져 붉어진 그의 동공을 마주한 메사리나는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건 네 것이 아니다. 절대 넌 체자렛 백작이 될 수 없어. 진짜 후계자가 오고 있으니까.”

메사리나는 쥐고 있던 리볼버로 아젠의 얼굴을 후려치고서는 쓰러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손에 묻은 피를 마구 닦아내며, 입술이 터질 정도로 짓이겨 깨물었다.


‘내가 후계자야. 내가 후계자라고. 아니, 이젠 내가 체자렛 백작이야!’

메사리나는 난리 통 때문에 곳곳에 불길이 일어나자, 거기에 리볼버를 집어 던져버렸다. 그리고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아가씨! 여긴 위험해요! 얼른 피하셔야 해요!”

“난 괜찮아. 너희 먼저 피해. 그리고 얼른 중앙청에 알려.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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