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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화. 마지막 한 마디 (160/199)


160화. 마지막 한 마디
2022.07.15.



 
모든 진실과 그 진실에 얽힌 더 어두운 밑바닥이 드러나자, 아멜리아는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결국, 복수 때문에.

원한과 원한이 얽힌 그 복수 때문에.


‘아무 죄 없었던 대공 전하가 그토록 아파해야 했던 거야? 그토록 괴로워해야 했던 거야? 아무것도 모른 채 평생 그 상처를 짊어지고 계셔야 했던 거냐고!’

다른 그 누구도 아닌, 그분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젠은 점점 통증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눈앞이 하얗게 어그러졌다.

생이 점멸하고 있었다.

아젠은 마지막 숨을 끌어모아 삼키고, 내쉬면서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술 끝에 걸려 있던 마지막 속내를 어렵사리 내뱉었다.


“이 실험에 가담한 것 자체로, 이 엄청난 진실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겁쟁이라서, 항상 도망치고, 또 도망치기만 했어.”

아멜리아는 아젠의 낯빛이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변하는 걸 보면서 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더는 말씀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치료사를 불러야 합니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주시면…….”

“널 버리고, 외면한 것도. 전부 도망이었다.”

하지만 아젠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말에 아멜리아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일리는. 인간의 심장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마나에 삼켜졌고, 태어난 순간 심장이 약했던 너도 마찬가지였다.”

“심장…….”

자신의 심장이 약한 이유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이유는.

인간의 심장으론 버티지 못하는 마나 때문이었나.


“아일리는 그걸 항상 걱정하면서, 네 곁을 떠나지 못했지. 항상 널 지켜주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의 부탁을 거절했어.”

“부탁, 이라니요?”

“프리메는, 시간의 숲과 더 가까웠기에. 그 당시 남아 있는 마법사나 현자들이 있었어. 나는. 너보다 아일리가 더 중요했다. 혹시라도 그들은 아일리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부디 함께 프리메로 가자고 부탁했지. 물론 그렇게 되면, 너와는 떨어져 지내야 했다. 갓난아기가 견디기엔 먼 여정이니까.”

아멜리아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일리는 널 택했다. 남아 있는 모든 생을 너와 함께하겠다며. 조금도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어.”

아젠의 목소리를 따라서, 아멜리아는 아일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너무 어렸기에, 기억이 드문드문했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순간, 어머니는 자신의 곁에 함께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제비꽃을 보여줬고,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애정을 가득 주면서.

언제나 자신의 어머니로 곁에 있어 주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항상 웃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아픈 내색하지 않으셨어. 이미 지금의 나처럼. 언제 죽을지 알고 계셨을 텐데.’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았어야 했는데.


“물론. 뭘 해도 그녀는 살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는. 그 슬픔에서 도망칠 핑계가 필요했다. 널 미워했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네가 빼앗아간 거라고. 그녀가 너 때문에 죽은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네가 태어난 것이 저주라며. 널 원망하며, 홀로 널 내버려 뒀다.”

덤덤하게 이어지던 아젠의 목소리가 마구 부서졌다.

아멜리아는 그런 아젠의 모습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일리의 딸이기에. 내가 그 순간, 널 지킬 수 있는 길은. 백작가에 가둬두는 것이었지.”

아젠의 눈동자가 점점 습윤하게 흔들리며, 계속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네 어머니는 널 사랑했다. 너에겐, 아버지만 없는 거야.”

“…….”

“네 아버지가 아닌. 아일리의 남편을 택한 나니까. 하지만. 아일리가 목숨 걸고 널 살리고자 했으니.”

아젠은 아멜리아가 쥐고 있는 아일리의 총을 바라보며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죽어서도 이 아일 지켜주고 있으니.’

“어떻게든 넌 살아남아라.”

“아버지…….”

“클리오 대공과 더 얽히지 말고. 황실에도 관여하지 말고. 거긴, 전부 미쳤어. 미친 곳이야.”

“……절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아멜리아의 한마디에 아젠은 움찔하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말했지. 너에겐 아버지는 없다고. 네 아버지를 택한 적, 없다고. 네 목숨은. 네 것이 아니다. 아일리의 것이야.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아일리의 희생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 거라면, 저도 제가 택한 삶이 지금의 삶이에요. 어머니가 제 어머니를 선택하신 것처럼, 저도 남은 생. 제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지키겠어요.”

죽을 줄 알면서도 어머니는 행복하게 웃으셨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다.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분의 곁에서, 그분을 사랑하기에.

어렴풋이,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야.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 테니까.”

일순, 아젠은 눈을 크게 떴다.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따라서, 아일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미안해요, 여보. 하지만 아멜리아와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살아 있는 동안, 이 아이의 엄마로. 아주 많이. 많이 사랑해주고 싶어. 후회 없이 살 거예요. 끝이 정해져 있어도. 이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당신의 아내로 죽을 수 있다면.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행복했어요.’

 
아일리가 보이는 아젠의 아른거리는 눈동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니 부디. 내가 아닌 아멜리아를 지켜줘요. 꼭, 사랑해줘요.’

  


“윽!”

“아버지!”

아젠은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통증은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미련과 후회가 그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이제 진짜 말씀 그만 하세요! 상처가 계속 벌어지니까!”

그때, 아젠의 상처를 살핀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의구심에 부풀었다.

늑대에게 당한 상처치고는 이상하다.

뭔가 가슴이 꿰뚫려서 헤집어진 것 같은…….

아멜리아는 곧장 쓰러진 늑대를 바라보았다.

아젠의 칼이 박혀 있으나, 자상보다 더 큰 상처가 늑대를 죽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늑대와 싸운 게 아니야. 둘 다, 서로가 낸 상처가 아니라고.’

아멜리아는 차갑게 굳어진 어조로 외쳤다.


“늑대에게 당한 게 아니죠? 여기 또 누가 있었던 건가요?”

아젠은 말없이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니, 아멜리아가 아닌 아일리를 바라보면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후지아와의 결혼도 아젠에겐 도망이었다.

조금이나마 아일리를 잊어보려고 했던 발버둥.

하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채, 엉망으로 꼬이고 말았지만.


‘아마 당신은 날 끝까지 용서하지 않겠지. 당신의 마지막 부탁을 내 어리석음으로 들어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마지막엔…….’

“……되었다…….”

“아버지?”

“저, 정말로…….”

아젠은 아멜리아의 손가락에 손등을 갖다 댔다.

아멜리아가 움찔하며 시선을 내린 순간, 뭔가가 눈에 보이면서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아젠은 그 모습에 안도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며 읊조렸다.


“……미안. 하구나…….”

허하게 흩어지는 한마디 끝에 아젠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크게 들썩이던 아젠의 호흡도 고요해졌다.

아멜리아는 귓가에 내려앉는 괴괴한 침묵에 온몸이 굳어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린 채, 잠시 멍하니 숨을 내쉬기만 했다.

그러다가 아젠이 여전히 꽉 쥐고 있는 그 무언가를 다시 확인하자마자 눈동자가 까맣게 일그러졌다.

그때, 바깥에서 소음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집무실로 중앙청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백작님, 무사하십니까! 아, 피오레 공작 각하!”

“공작 각하께서 여기 어떻게…… 백작님? 백작님?”

기사들은 아멜리아를 발견했다가, 아멜리아의 곁에 쓰러져 있는 아젠을 보고 기겁했다.


“백작님! 숨을 쉬지 않으시는데…….”

“매, 맥박이…….”

“설마. 백작님!”

중앙청 기사들은 쓰러진 늑대와 아젠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기사는 음울한 표정으로 늑대에 박혀 있던 칼을 빼내고는 증거품으로 가져갔다.

그 순간.


“여보!”

비명과 함께 후지아가 눈물범벅으로 나타나서는 아젠을 붙들었다.


“여보? 여보! 안 돼요. 내가 왔어요. 내가 왔다고요. 여보! 눈 좀 떠봐요. 안 돼. 날 두고 가지 마요, 여보!”

후지아는 아젠을 꽉 끌어안고서는 절규 어린 울음을 내뱉다가, 침묵하고 있는 아멜리아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네가 대체 여기 왜 있는 거야. 왜!”

아멜리아는 아무 말 없이 후지아를 응시했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설마 같이 있었던 거니? 그럼 네가 구했어야지. 천재라며. 천재 머스켓티어라며. 그럼 네가 구했어야지. 아무리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구했어야지. 대체 뭘 한 거야! 하아, 하아!”

“진정하십시오, 부인!”

후지아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자, 기사들이 그런 후지아를 집무실 밖으로 데려갔다.

아멜리아는 그저 냉소를 그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목소리가 박히면서,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어머니가 왜 저렇게…… 아버지? 아버지!”

집무실로 들어온 메사리나는 횡설수설하다가, 쓰러진 아젠을 발견하고선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

중앙청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니야. 말도 안 돼. 뭔가 잘못된 거야.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제발. 제발!”

메사리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멜리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서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으며 마주 섰다.

메사리나는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으윽! 왜 이러는 거예요, 언니!”

하지만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여기로 오기 전에 총성을 들었는데. 집무실에 아버지와 같이 있지 않았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언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죠? 아버지와 같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왜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어요? 언니라면 충분히 지킬 수 있었잖아요!”

“정말로 집무실에 온 적 없다고?”

메사리나는 아멜리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외쳤다.


“대체 뭘 의심하고 있는 거죠? 아무리 언니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지금 아버지가, 아버지가 저 괴물들에게 당해서 돌아가셨다고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메사리나가 오열하다가 결국 실신하자, 중앙청 기사가 황급히 달려와서는 메사리나를 데리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중앙청 기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아멜리아에게 고개 숙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 일단 진정하십시오. 저희가 여길 정리할 테니…….”

“이쪽 정리는 내가 하도록 하지.”

“예? 아, 예.”

기사들은 메사리나와 달리 너무 차분한 아멜리아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대들은 이 사실을 황궁에 알리도록 해.”

“알겠습니다.”

“가주님!”

카마리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굳어진 표정으로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체자렛 백작님께서는…….”

“돌아가셨어. 하지만 절대로 반인반수에게 당해서 돌아가신 게 아니야.”

“예?”

아멜리아는 마지막으로 아젠의 곁으로 다가갔다.

온몸에 힘이 빠졌을 텐데.

이 주먹만큼은 판도라의 상자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움켜쥔 그의 손을 소매 끝에 잘 숨겨두면서, 복잡한 눈빛으로 나직이 한번 잡아보았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이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본 적 없었다.

잡아준 적도 없었고.

마지막으로 이 집을 나섰을 때도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두진 않겠습니다.’

아버지와 똑같이 아버지를 버린다면, 평생 기억하고 말 테니까.


‘날 위해서야. 날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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