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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화.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161/199)


161화. 수상할 정도로 빠르게
2022.07.18.


혹시나 해서 지하 미궁으로 달려간 키르케는 있어야 할 이클리트가 보이지 않자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 멀어지겠다더니.’

“역시 이놈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군대가 필요해. 여차하면 다 죽여 버려야 하니까.”

싸늘하게 읊조리던 그녀는 바닥에 마구 떨어진 검은 깃털을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여길 혼자 빠져나가긴 어려웠을 텐데. 대체 누가 꺼내준 거지?”

 

***



“폐하, 폐하!”

에리얼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아스란에게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체자렛 백작이…….”

아스란은 에리얼의 말에 멈칫하더니 이내 표정이 험악해졌다.


“설마 도망친 것이냐?”

“……체자렛 백작이 숨졌습니다.”

“뭐? 누가 죽었다고?”

“방금 체자렛 백작가에서 전령이 왔사온데, 반인반수의 습격으로 체자렛 백작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아스란은 순간 헛숨을 삼켰다.


“반인반수가 또 공격했다고? 하! 이번엔 귀족을 죽이다니. 대체. 대체 반인반수를 움직이는 배후가 누구란 말이야!”

 

***

체자렛 백작의 사망 소식이 곧장 신성회에도 전해졌다.

신성회 부신관이자, 신녀인 미야는 대신관에게 이 같은 상황을 알렸다.


“백작가를 수습하면서, 곧 장례 절차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하여 대신관님께서 와주시길 바란다고 전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장례 절차를 밟는다는 건가요?”

“반인반수에 의한 사망이니, 태양의 제단 사건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솔라가 또 크게 시끄러워지길 바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장례 이후, 조사할 것도 많을 테고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속히 체자렛 백작령으로 가시지요.”

황실과 가까웠던 체자렛 백작이 숨을 거뒀으니, 그 장례 절차와 마지막 가는 길의 축복은 대신관의 몫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살짝 마음이 불안했다.


“체자렛 백작님의 마지막을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함께하신 듯합니다.”

대신관은 피오레 공작이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마지막에 피오레 공작과 함께 있었다는 건가요?”

“예. 백작 부인의 기일 때문에 하필이면 함께 계셨다고 들었는데. 충격이 크실…….”

“훗. 그게 그렇게 됐다, 이건가?”

대신관이 입술을 비릿하게 올리며 묘한 웃음을 띠자, 미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관님?”

“이상하지. 이상해. 반인반수 사건에 피오레 공작이 얽히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분명 뭔가가 있는 거라고요. 애초에 클리오 대공이 반인반수인데, 아무 상관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요.”

“하지만 이미 폐하께서…….”

“폐하께서 뭔가 숨기시는 것이지요.”

‘이번에야말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대신관은 아멜리아에게 붙잡힌 약점 때문에 계속 불안해하고 있었다.

언제 그 계집이 입을 열어서 자신이 쥐고 있는 이 권력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갈지 모를 일이니까.

그때, 클리오 대공과 함께 추락했어야 했는데 무슨 일인지, 황제가 감쌌지만.

이런 일에 계속 피오레 공작이 얽히게 된다면.


‘계속 감쌀 수는 없겠지. 그년도 배후가 분명해. 이참에 루베르와 함께 단두대에 올려야 한다고.’

태양신의 저주는 자신이 아니라 그 계집이 받아야 한다.

루베르 같은 야만인을 옹호하고, 그런 괴물과 어울린 죗값을!


“피오레 공작이 수를 쓴 거일지도 모르지요.”

미야는 너무 위험한 발언에 눈을 크게 떴다.


“대, 대신관님?”

“체자렛 백작과 피오레 공작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피오레 공작의 결혼식 때도 참석하지 않은 백작이에요. 그런데 백작 부인의 기일이라고 두 사람이 만났다고? 거짓말도 적당히 해야 믿을 거 아닙니까.”

대신관은 점점 확신에 찬 어조로 음습하게 말을 이었다.


“체자렛 백작가의 그 어마어마한 재산이 원래는 피오레 공작의 것이라지요? 그런데 그걸 레이디 메사리나가 이어받게 되었으니. 죽기 전, 두 사람만 집무실에서 발견됐다면. 확실해. 확실하다고. 후훗. 서둘러 백작가로 가봐야겠군요.”

대신관이 불길한 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지자, 미야는 감춰뒀던 싸늘한 표정을 띠며, 냉소적인 어조로 읊조렸다.


“하아. 또 경솔하게 움직이려나. 이거, 신성회에 더는 오점을 남기지 말아야 할 텐데. 자꾸 이러면 이쪽에서 먼저 움직일 수밖에.”

 

***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체자렛 백작가를 휩쓸고, 백작가는 음울하다 못해 비통한 슬픔에 잠겨 있었다.

백작님께서 반인반수에게, 그 괴물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두시다니.

살아남은 하녀와 하인들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그때, 아멜리아와 카마리가 중앙청 기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아, 아가씨. 아니 피오레 공작 각하.”

하녀와 하인들은 곧장 아멜리아를 향해 고개 숙였다.

아멜리아는 그들을 바라보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백작가를 수습할 거다. 다들 정신 차리도록 해. 고용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으니까, 중앙청 기사들을 도와주도록 하고. 그리고 아버지의 장례를 당장 치르기보단…….”

“아버지 장례는 제가 맡겠습니다.”

순간, 메사리나가 완강한 목소리를 내며 아멜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그런 메사리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니, 지금부터 모든 사건 수습도 제가 맡습니다. 아버지의 딸이자, 체자렛 백작가의 차기 후계자인 제가 당연히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오레 공작 각하.”

메사리나의 건방진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그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네가 체자렛 백작가의 후계자라고?”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후계자가 아니라 이젠 제가 체자렛 백작이지요. 아버지께서는 언니가 아닌 제게 이 가문을 상속하셨으니까요.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텐데요. 아버지께서 언니를 더는 딸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신 거.”

둘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휘몰아치면서,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아무 연락도 없이 백작가에 걸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피오레 공작가로 떠난 이후 두 번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누구라도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가 있더냐?”

메사리나의 시선이 하녀와 하인들을 향하자, 그들은 재빨리 고개 숙였다.

그나마 아젠을 곁에서 오래 보필했던 시종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작님께서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실 거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식 방문치고는 전속 하녀조차 없이, 호위 인원도 터무니없이 적고. 게다가 이 은밀히 방문에 하필이면 이런 큰일이 생기다니. 아버지를 가장 처음 발견한 것도 공작 각하시고. 우연치곤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점점 살벌해지는 목소리 끝에, 메사리나가 아멜리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타까운 표정 뒤로 숨긴 날 선 어조를 내뱉었다.


“체자렛은 피오레처럼 괴물을 이용해서 비겁하게 가로채지 못할 거야. 그러니 얌전히 꺼져.”

“선을. 제대로 넘었구나.”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나직이 내뱉은 말에 메사리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멜리아는 그런 메사리나를 빤히 응시하며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이번엔 진짜 죽을 각오한 거겠지?”

 

 
묘한 한마디를 남긴 채, 아멜리아가 등을 보였다.

메사리나는 이 기분 나쁜 의연함에 이를 악물고서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부터는 피오레 공작 각하가 아닌 내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 예, 아가씨.”

고용인들이 잠시 머뭇거리며 답하자, 메사리나가 사납게 외쳤다.


“아가씨가 아니야. 이제 내가 체자렛 백작이야. 내가 이곳의 가주야!”

 

***

후지아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침실을 맴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그녀답지 않은 초조함과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때, 노크와 함께 메사리나가 들어왔다.

후지아는 메사리나의 모습에 더욱 낯빛이 파리해졌다.

메사리나는 그런 후지아의 모습을 애써 뒤로 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사태를 수습하고 있어요. 빠르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장례식을 먼저 치른 다음에 바로 백작 작위를 이어받을 테니까, 어머니도 준비해주세요.”

후지아는 장례식이라는 말에 크게 흠칫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정말로 백작님이 돌아가셨니? 정말로 네가…….”

“어머니.”

순간, 메사리나의 강압적인 목소리가 후지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버지는 반인반수 때문에 사고로 돌아가신 거예요. 늑대와 장렬하게 싸우다가 말이에요.”

“…….”

“참으로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건인 거죠. 그러니 더는 소란스러워지지 않도록, 주인 잃은 이 가문을 어서 빨리 제가 이끌어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도 원하시던 일이잖아요. 마침내 이뤄진 거라고요.”

“그래. 그렇지. 그런 거지…….”

겁에 질린 후지아가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자꾸만 잘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메사리나는 그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어머니는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실 것 같네요. 일단 장례식까지는 조용히 지내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때 또 한 번의 노크와 함께 시종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대신관님이 오셨습니다.”

“벌써? 뭐, 빨리 와주셔서 감사하긴 하지만.”

메사리나는 마지막으로 후지아를 다독이고서 침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후지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읊조렸다.


“괜찮아. 다 사고였어. 사고였다고. 이제 우리 메사리나가 체자렛 백작이야. 가주야. 가주라고…….”

 

침실 밖으로 나온 메사리나는 시종장과 함께 걸음을 옮기면서, 더욱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무 서두르고 있긴 했지만.


‘더 빨리 정리해야 해. 이 백작가에서 그자의 흔적을 전부. 전부 없애버려야 해!’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불안함이 그렇게 메사리나의 등을 떠밀고서 재촉하고 있었다.

***

응접실로 가자, 대신관이 메사리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디 메사리나.”

“이렇게 서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대신관은 짤막하게 기도하면서 말을 이었다.


“당연한 일입니다. 체자렛 백작가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서둘러 이쪽 일이 수습되어야, 레이디 메사리나께서 작위를 이어받고,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하시겠죠.”

대신관은 어쩐지 묘하게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메사리나는 대신관의 속내는 알 수 없었으나, 차기 가주로 인정받는 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백작님의 마지막을 함께하셨다니. 우연치곤 나쁜 우연이군요.”

어쩐지 묘한 발언에 메사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반인반수 사건에 계속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가까이에 있는 듯한 기분도 우연일까요? 사실, 신관으로서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지만. 반인반수에게 무고하게 당한 저희 신관님을 생각하면 대신관으로서 가슴이 아프답니다.”

“…….”

“그러니 레이디 메사리나, 이번 장례가 끝나는 대로 사건 조사를 명백하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도울 일이 있다면 여러 가지로 도울 테니 말입니다.”

메사리나는 이제야 대신관이 이토록 빨리 백작가로 걸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신관은 아멜리아를 이번 사건과 엮어서 치워내고 싶은 거구나.’

뭐, 그게 가능하다면 나쁜 것도 없지.

연락도 없이 은밀히 찾아온 것도 수상하니까.

아젠 백작과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도 사실이고.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대신관과 뜻을 함께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대신관님.”

 

***

아멜리아는 엉망이었던 의복을 정비하고 있었다.

카마리는 그런 아멜리아의 시중을 도와주면서 밖에서 얻어온 정보를 은밀히 속삭였다.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대신관이 백작가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빠르군. 하긴 그쪽도 애가 타겠지.”

아멜리아는 대신관의 속내가 그저 훤히 보였다.


“벌써 장례 절차를 논의하고 있고, 장례를 끝낸 뒤,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카마리가 머뭇거리자, 아멜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말해도 괜찮아.”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아무리 백작님이 반인반수와 싸우다가 돌아가신 정황이 명확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장례부터 치른 뒤 사건 조사를 하겠다니…….”

“그래야 증거 인멸이 쉬워지지.”

“가주님?”

“말했잖아. 반인반수와 싸우다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말이야.”

“대체 뭘 알고 계신 겁니까?”

아멜리아는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창문 너머, 백작령의 영지민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카마리도 그 모습을 보며 무심히 읊조렸다.


“백작님이 돌아가셨다는 걸 알리려는 거군요.”

“그건 그저 명분. 백작가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어서 빨리 알리고 싶은 거겠지.”

영지민들을 바라보던 아멜리아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빨라서 잘됐군. 난 가서 다 차려진 테이블에 포크만 올리면 되겠어.”

“예?”

“카마리 경, 중앙청 기사들을 불러와 줘.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이제 알려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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