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판도라의 상자
(162/199)
162화. 판도라의 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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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판도라의 상자
2022.07.22.
전속 하녀의 손에 의해 메사리나는 평소와 다른 투알레트를 거치고 있었다.
항상 화려하게 쏟아졌던 붉은색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렸고, 너무 화려한 보석 대신 기품 있는 장식으로 치장했으며, 아직 정식 의상은 아니었지만 체자렛 백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의복을 입었다.
백작가의 영애로 지냈지만, 체자렛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는 건 처음이었다.
메사리나는 몹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문양을 매만지며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내 차지가 되었어.”
물론 아직 작위를 받지 않았으나, 이미 백작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대신관도 자신을 인정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미치도록 벅차오르는 환희를 겨우 누르고서, 침실을 나섰다. 그러자 시종장과 하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메사리나에게 가주로서의 예를 다했다.
“영지민들이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대신관 님께서도 중앙홀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두르도록 하지.”
“예.”
평소 중앙홀은 사교 파티장으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영지민들에게 백작의 부고를 알려야 하기에, 차분하고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중앙홀 정면에는 태양신을 뜻하는 카렌듈라가 장식되어 있었고, 그 아래 제단에는 새하얀 천으로 가리어진 관에 아젠이 잠들어 있었다.
대신관과 함께 온 신녀와 신관들은 정식 장례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를 다해서 기도를 올렸다.
자리에 함께한 영지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두려운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백작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반인반수의 습격으로 돌아가셨다니.
이는 힘없는 자신이나 가족들도 당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백작님마저 공격하다니…….”
“폐하께선 괜찮다고 하셨지만, 이러다가 우리 마을도 공격하면…….”
“다 죽을 거야. 수인들이 다시 우릴 죽일 거라고!”
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공포로 물들어갈 때, 중앙홀의 문이 열리면서 메사리나와 대신관이 들어왔다.
영지민들은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메사리나는 신녀와 신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서, 엄중한 표정으로 영지민들을 응시했다.
숨 막히게 가라앉은 침묵엔 온갖 혼란스러운 감정만이 무겁게 뒤엉켜 있었다.
메사리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가장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들 갑자기 벌어진 일에 감정을 추스를 틈이 없었을 것이다. 태양의 제단에서의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작가에도 이런 비보라니…….”
의연하게 말을 이어가던 메사리나의 목소리에 울음이 차오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영지민들은 그 모습에 안타까운 감정이 스몄다.
자신들은 반인반수의 공격이 그저 두렵고 무서웠지만, 눈앞에 그녀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것이니 말이다.
메사리나는 자꾸만 바스러지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서, 몸을 바로 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나는 체자렛 백작가의 새로운 가주로서 이번 사태를 수습하고, 영지민들을 최우선으로 보호하여 지킬 것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가슴 아프지만, 계속 슬퍼만 하지 않고 받들 것이며…….”
그때, 갑자기 중앙홀의 문이 한 번 더 열리면서 메사리나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눈물로 흔들리던 메사리나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의 시선 끝으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멜리아가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다.
‘뭐야. 아직도 여기 있었던 거야?’
영지민들도 다들 아멜리아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아니. 이제 피오레 공작 각하시지.”
“백작가에 오셨구나.”
“아무리 사이가 안 좋으셨지만, 그래도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하지만 뭔가, 아버지를 잃었다는 애통한 표정보단 날 선 분위기에 절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멜리아는 잠시 중앙홀을 쭉 둘러보다가 대신관과 눈을 마주치고는 냉소를 그렸다.
대신관은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멜리아는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사리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메사리나는 이를 악물고서 아멜리아를 노려봤다.
“뭐 하는 거죠?”
아멜리아는 메사리나를 무시한 채, 아젠이 안치된 제단 앞에 살짝 고개 숙여 기도했다.
마침내 침묵하던 그녀가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부디 태양신의 곁에서 평온하시길. 체자렛 백작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새로운 백작가의 가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들으라는 듯, 한 마디. 한 마디.
힘이 담긴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메사리나는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언성을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왜 체자렛 백작가 가주라는 거예요!”
“체자렛 백작을 해쳤을지도 모를 사람에게 백작가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아멜리아의 싸늘한 목소리에 장내의 웅성임이 멈췄다.
메사리나는 그나마 붙들고 있던 이성까지 내던진 채 악을 썼다.
“무슨 헛소리야. 누가 누굴 해쳤다는 거야!”
“그때 집무실에 정말로 네가 없었다고 했지?”
“왜 자꾸 같은 말을 하는 거지? 집무실엔 오히려 네가 있었잖아. 중앙청 기사들도 전부 봤잖아.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걸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대체 백작가엔 연락도 없이 은밀히 왜 온 거야? 그것도 하필이면 아버지와 마지막 순간까지 단둘이! 오히려 네가 해친 거 아니야? 네가 아버지에게 원한을 가지고 그런 거 아니냐고!”
이성을 잃은 메사리나 앞에 아멜리아는 끝까지 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로 네가 없었다는 거지.”
그때, 카마리가 중앙청 기사들과 함께 몰려왔다.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영지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앙청 기사단장은 아멜리아를 향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피오레 공작 각하, 체자렛 백작님의 사망과 관련하여 의심될만한 증거를 포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메사리나는 중앙청 기사까지 끌어들인 아멜리아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뭐야. 또 무슨 비열한 짓을 하려는 거야? 아버지는 그 반인반수 괴물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괜히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다는 걸 의심받을까 봐,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아버지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내가 아버지와 마지막을 함께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언을 들을 수 있었지.”
“유언?”
“넌 그날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했는데. 어째서일까.”
아멜리아는 아젠을 가리고 있던 흰 천을 붙잡고서 그대로 들춰냈다.
관 안에서 잠든 아젠의 시신이 드러나면서, 지켜보던 신녀와 신관들이 파리해진 표정으로 외쳤다.
“피오레 공작 각하, 지금 뭐 하시는 것입니까!”
“너 정말 미친 거야?”
메사리나가 아멜리아를 밀쳐내려는 순간, 아멜리아가 오히려 메사리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왜 아버지는 네 머리카락을 이렇게 꽉 쥐고 계시는 걸까?”
메사리나는 순간 창백해진 표정으로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
아멜리아는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아젠 백작의 왼쪽 손을 펼쳐보세요. 아마 여인의 머리카락을 쥐고 계실 겁니다.”
아멜리아는 메사리나의 붉은 머리카락을 눈으로 훑어 내리며,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주 새빨간 머리카락을.”
메사리나는 잘게 떨리는 시선으로 아젠의 손을 바라보았다.
워낙 시신을 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살필 생각을 못 해서 왼쪽 손이 저 지경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행여나 손이 펼쳐지지 않도록,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휘어질 정도로 엮여 있을 줄은!
기사단장이 아젠의 꽉 쥔 주먹을 하나하나 힘겹게 펼쳤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아젠이 아멜리아에게 남긴 마지막 진실이 열렸다.
아젠의 손바닥에 메사리나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기사단장은 모두에게 붉은 머리카락을 보이며 말했다.
“정말로 붉은 머리카락이…….”
“세상에…….”
“저건, 메, 메사리나 아가씨의 머리카락…….”
긴가민가하던 영지민들의 표정에 경악이 물들었다.
메사리나는 이제야 아젠이 마지막 순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걸 떠올렸다.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하나, 했는데. 이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추락시키려고!’
끝까지 아멜리아를 선택하고자!
아멜리아는 벼랑 끝에 내몰린 메사리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다시 한번 묻지. 정말로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어?”
속을 훤히 꿰뚫는 아멜리아의 눈동자와 마주한 메사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 말이 어그러졌다.
“내, 내가 아니라 네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네 머리카락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쥐고 계셨던 거지?”
“사실, 반인반수가 습격하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서…….”
“역시 만났던 거네. 그래서.”
아멜리아는 메사리나가 피할 새도 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깊이 박았다.
메사리나는 마치 칼에 베이는 것처럼, 섬찟한 느낌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완전히 풀어 내렸다.
“아버지가 널 예뻐하느라, 이렇게 쓰다듬어주셨니? 그렇다고 하기엔 돌아가신 순간에 정말 필사적으로 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계신 것 같은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아멜리아는 아젠의 시신에 생긴 가슴의 상처를 가리켰다.
“반인반수에게 할퀴어졌다기엔 일정한 모양의 상처.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들자, 카마리가 곧장 죽은 늑대의 사체를 가져왔다.
“이 늑대 사체의 상처와 너무 유사하지 않아? 이 상처를 메사리나, 네가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말로 해서 못 알아듣겠니?”
아멜리아가 총을 꺼내서는 메사리나의 바로 발아래 바람의 마탄을 쐈다.
탕-!
순식간에 휘몰아친 바람에 메사리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바람의 마탄이 지나간 자리에 아젠과 늑대에게 생긴 상처 모양과 유사한 회오리가 보였다.
“말로 못 알아들어서 보여준 거잖아. 아버지의 상처와 늑대에게 생긴 상처, 바람의 마탄으로 만들어진 거야. 그날 내가 들었던 단 한 발의 총성.”
아멜리아는 선득한 시선으로 메사리나를 노려보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널 만났어. 네가 늑대와 함께 아버지를 쏜 거야. 아버지는 괴로워하시면서 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신 거고.”
“말도 안 돼. 날 모함하지 마! 저 괴물이 아버지를 공격한 거야. 그래서 아버지가 집무실에 장식된 장식용 검을 휘두르신 거고. 하지만 그 검으로 당해내지 못해서, 저 괴물이 아버지를 공격한 거야!”
제 입으로 술술 부는 메사리나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허탈한 미소를 그리며, 장전했던 총을 집어넣었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아는구나. 장식용 검을 휘둘렀다는 것도 다 알고 말이야.”
“누가 봐도 장식용 검이 꽂혀 있었으니까!”
“그 검, 사건 현장엔 없었어.”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말에 메사리나는 멈칫했다.
“뭐?”
“네가 오기 전에 중앙청 기사가 이미 증거품으로 가져갔으니까. 현장에 뒤늦게 왔던 네가 봤을 리가 없어.”
메사리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마구 깨물면서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냈다.
“기, 기사가 마, 말해줘서…….”
“말해줬나?”
아멜리아가 중앙청 기사들을 향해 묻자, 직접 검을 뽑아서 가져간 기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미 늑대와 싸우다가 돌아가셨다고 알고 계셔서, 굳이 무기까지는…….”
“거짓말하지 마라! 말해줬잖아! 아니면 네놈도 이미 아멜리아와 한패가 된 것이냐!”
중앙청 기사를 모욕하는 메사리나의 말에, 기사단장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험악한 표정을 띠었다.
“레이디 메사리나, 증거도 없이 중앙청 기사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아니야. 난 분명 들었어. 들었다고. 있었어. 내가 봤어. 봤는데!”
의심에서 확신이 된 눈초리가 메사리나에게 박혀들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메사리나를 보며 싱긋, 냉소를 그렸다.
“역시. 내가 들었던 그 한 발의 총성은 너였구나. 네가 체자렛 백작을 죽인 거야. 괴물은 이 늑대가 아니라, 바로 너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