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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화. 사랑받고 싶었어 (165/199)


165화. 사랑받고 싶었어
2022.08.01.


뱀이 메사리나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메사리나는 삽시간에 번진 독에 온몸이 굳어져서,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도 믿기지 않아서 머릿속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키르케는 메사리나의 충격 어린 표정에 혀를 찼다.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요. 이렇게 세상사 청순했다니.”

메사리나는 굳어진 입술을 겨우 달싹였다.


“어떻게, 나한테…… 날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너무 쓸모없잖아요.”

키르케의 냉정한 한마디에, 메사리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함부로 말을 지껄였다.


“……가, 감히. 너 같은 게, 나한테, 이러고도. 무, 무사할 것 같아? 반인반수의 배후…… 그 괴물들을. 이용하고 있는 게. 너. 너라는 걸. 내가 다 아는데. 여기서, 날 구하지 않으면. 다, 다 밝혀버릴 거야!”

“하! 하하하하하!”

키르케는 싸구려 연극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웃으면서 메사리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머리가 비었을 줄이야. 지금 그런 말이 나오나?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모자를 판국에?”

메사리나는 순간, 데자뷔로 겹쳐지는 장면에 크게 흠칫했다.


“체자렛 백작에게 네가 했던 말이잖아. 쓸모없어서 버리는 거라고. 메사리나, 너도 마찬가지야. 쓸모없어서 치워내는 거야.”

키르케는 메사리나의 바로 눈앞에서 뱀보다 선득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 오싹한 느낌에 메사리나는 더더욱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실 백작 작위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죽어도 그 재산이라도 남겨서 네가 사랑하는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 도움이 됐을 텐데. 네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큰 걸 바란 거지.”

“……처음부터. 나, 날 이용했다고?”

“당연하잖아. 황후라니. 어림도 없지. 반쪽짜리 잡종 주제에. 안 그래?”

“……아니야. 안 돼. 싫어. 이,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죽을 수 없어. 살려줘. 바스티얀 대공 전하를 부, 불러줘…… 그분은 날 선택할 거야. 날 살려주실 거야. 날 지켜주실 거라고!”

이제 와 애원하는 메사리나의 모습에 키르케는 더는 말도 섞을 가치가 없다는 듯, 등을 보였다.


“대공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냥 조용히 죽어.”

그녀는 그렇게 메사리나를 버려둔 채, 걸음을 옮겼다.


“체자렛 백작도 죽었고, 저 계집도 죽었고. 이제 우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피오레 공작뿐인가?”

 

키르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메사리나의 몸이 급속도로 마비된 채,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흐윽, 흐윽. 흐으으으윽!”

쉰 소리만이 잇새 사이로 쥐어짜듯 새어 나왔다.

숨을 쉬려고 해도, 장기도 마비됐는지 숨이 들이켜지지 않으면서 메사리나는 바닥에 마구 몸을 구르면서 괴롭게 경련했다.

하지만 생채기가 나도 피가 나오지 않았다.

피조차 점점 차갑게 굳어지고 있었던 것.

정말로 이젠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면서, 메사리나는 그저 눈만 무겁게 끔뻑이며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에…… 에드. 에드…….”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메사리나가 부르고 있는 건 그의 이름이었다.

그날 밤, 자신을 안고 버렸던 그 모습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 나도. 나도 사랑받고 싶어. 당신을 위해서, 나는 뭐든지 다 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날…… 사랑. 사랑, 해줘…….”

끝내 그녀는 제대로 눈도 감지 못했다.

그저 에드조프만을 처절하게 원하면서, 황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은 채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아멜리아는 카마리와 함께 다급한 표정으로 달렸다.

마침내 걸음을 멈춘 곳엔 중앙청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기사단장은 아멜리아를 발견하고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지?”

“시신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대체 무슨 독에 당한 건지, 몸에 피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독살…….”

아멜리아는 메사리나가 독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그녀는 괴괴한 숨을 삼키고서, 기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일순, 자신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삼켰다.

피가 말라붙은 피부는 흉측한 모양새로 등가죽에 들러붙어 있었다.

메사리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그녀는 처참하게 이곳에 버려져 있었다.


‘독이라고? 그렇다면 뱀인가? 그 여자 짓이야? 메사리나가 이제 필요 없어져서 이렇게 버린 거야?’

눈을 감지 못한 채, 움푹 파여 있는 그녀의 표정은 고통보단 절망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아멜리아는 말없이 메사리나의 눈을 억지로 감겨주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분노가 더 앞섰지만, 이 순간만큼은 다른 분노가 심장을 건드렸다.


“저리 가! 저리 꺼져!”

그때, 후지아의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그녀가 아멜리아를 밀쳐버렸다.


“가주님!”

카마리와 중앙청 기사들이 다급하게 달려왔으나, 아멜리아는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메사리나를 붙잡으며 마구 끌어당겼다.


“메사리나? 메사리나?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대답해보렴, 메사리나. 이 어미를 혼자 두고 가지 마. 이 어미를 위해 백작이 된다고 했잖아! 하아! 아니야. 아니야!”

마구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메사리나를 붙잡던 후지아가 이내 고개를 돌려서는 아멜리아를 잡아당기며 악을 썼다.


“네가 그랬지! 네가 그랬어! 네가 메사리나를 저렇게 만들었어! 이 살인자! 네가 또 괴물을 이용해서 우리 메사리나를, 메사리나를 저 꼴로 만들었어! 악! 죽어버려! 네년도 같이 죽으라고! 죽어버려!”

“백작부인, 진정하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백작부인도 체포할 것입니다!”

기사들과 카마리가 후지아를 뜯어말리려고 하자, 되려 아멜리아가 후지아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그냥저냥 조용히 메사리나의 죄를 참회하면서 지내면, 그 목숨은 살려주지.”

후지아는 말문이 막힌 채,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온몸을 떨었다.


“정말 딸을 생각하는 어머니라면, 얌전히 있어. 다른 건 몰라도 메사리나를 저렇게 죽인 이는 내가 찾아서 끝을 볼 테니까.”

아멜리아는 후지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후지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아멜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메사리나를 보며 들끓는 오열을 다시 내뱉었다.


“흐으으흡! 메사리나. 아가, 메사리나…….”

아멜리아는 후지아의 오열을 묵묵히 들으며, 손끝을 지긋이 움켜쥐었다.

메사리나가 비록 잘못했지만, 저런 식의 최후는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메사리나를 저렇게 죽일 자격이 없다.

똑같은 살인자인데.

똑같이 악을 저질렀는데.

움켜쥔 그녀의 손등에 뼈가 하얗게 튀어나올 만큼, 힘이 가해졌다.


‘에드조프. 키르케 그 여자. 절대로 용서 못 해.’

솔라를 위해서도.

루베르를 위해서도.

아무 죄 없이 희생당하고 있는 세인트와 반인반수를 위해서도.

순간, 심장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통증에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스스로 되뇌었다.


‘대공 전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내 생을 걸고 해야 할 마지막 일은,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거야.’

 

***

에드조프는 개인 응접실을 맴돌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다행히 아직까진 황궁이 조용했다.


‘에리얼이 황후궁을 잘 틀어막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거다.

그전에 무슨 대책을 강구해야······.

그때, 익숙한 인기척에 에드조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에드조프가 사나운 표정으로 키르케에게 달려갔다.


“절 기다리셨나요?”

“헛소리하지 말고.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이클리트, 그놈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황후가 수인이라는 사실을 대체 언제부터!”

“그건 이제 중요한 게 아니죠. 대공 전하께서 이 제국의 유일한 황위 계승자이며, 황제의 진짜 아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곧 원하는 모든 걸 가지실 거랍니다.”

키르케는 에드조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체자렛 백작과 레이디 메사리나가 죽었습니다.”

“뭐? 설마 네가 죽인 거냐?”

“마지막까지 우리 정체를 들키면 안 되니까. 그 공방을 들킬 수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대공 전하의 앞에 거슬리는 건 죄다 제가 치울 거랍니다.”

섬뜩하게 와 닿는 키르케의 말에 에드조프는 절로 등줄기가 떨렸다.


“백작가 재력을 손에 넣어서 군대를 만들었다면 좋았겠지만. 할 수 없죠. 여차하면 반인반수 무기 중, 최강의 무기를 쓰는 수밖에. 물론 워낙 사나운 놈이라 아직은 다루기 역부족이지만, 곧 완전히 지배할 수 있을 거랍니다. 최고의 살인 병기를!”

“군대라니······ 설마, 반란을 일으키라는 거야?”

“당연하잖아요?”

키르케의 동공이 더욱 희번득하게 커졌다.


“클리오 대공만으론 안 되겠어요. 대공 전하께서 이 나라를 부숴버리세요. 그리고 원하는 걸 가지세요! 제가 반드시, 그리 만들 테니까.”

키르케는 하얗게 질린 에드조프를 다독이고서,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

홀로 남겨진 에드조프는 헛숨을 삼켰다.


“저년이랑 계속 얽히면, 내가 위험해지겠어. 그나저나 체자렛 백작이 죽었다니······ 메사리나.”

하지만 에드조프의 머릿속에 메사리나는 그저 짧게 스쳤고, 곧장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점점 그녀의 주변이 황폐해지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그대에겐 나밖에 없어. 결국 나뿐이라고.”

 

***

겁에 질린 대신관은 서둘러 짐을 쌌다.


‘레이디 메사리나가 그렇게 끔찍하게 죽다니!’

독살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남은 반인반수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맴돌았다.


“아니면. 또 피오레 공작, 그 계집 짓이던가.”

알아보니, 메사리나가 백작가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건, 아멜리아가 잠시 기사들을 떼어놨기 때문이었다.


“봐. 또 관련 있잖아.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한 다음, 제대로 소문을 내야 해. 폐하께서도 더는 그 계집을 감싸지 못할 그럴 소문을.”

대신관은 이번에야말로 아멜리아를 처리할 생각을 하면서, 짐을 들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대신관을 노려보는 시선 하나에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어딜 가는 거지?”

“어, 어떻게. 네, 네놈이. 너 같은 괴물이 여기 왜…….”

이클리트, 그가 대신관을 선득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딜 쥐새끼처럼 빠져나가고 있냐고 물었다.”

“네놈이야말로 왜 여기! 역시 피오레 공작, 그 계집과 한패…… 흐윽!”

대신관의 입에서 아멜리아가 나오자마자, 이클리트가 대신관의 목을 움켜쥐고서 순식간에 방문을 쿵, 닫아버렸다.

분명 해가 뜬 아침인데도, 이곳만은 마치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짙은 어둠이 대신관을 짓누르며 공포에 떨게 했다.


“하아, 하아! 이거. 이거 놔!”

대신관이 발버둥 쳤으나, 이클리트는 붉은 눈동자를 더욱 번뜩이며, 금방이라도 대신관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힘을 주었다.

계속 발버둥 치던 대신관의 몸이 점점 축 늘어지기 시작하면서 눈알이 하얗게 뒤집히려는 찰나, 그가 거칠게 대신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쿵-!
 


“악!”

뼈 어디가 부서진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신관은 이런 고통보다 더한 공포에 질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며 고개 들었다.

눈앞에 거대한 검은 날개로 어둠을 일으키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클리트의 모습은 완벽한 악마였다.

대신관은 결국 체면도 잊은 채, 두 손으로 빌면서 말했다.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대공 전하!”

“그때도 너 같은 것이 감히 그녀를 건드렸지.”

“저, 저는. 저는, 태양신을 모시는 신성한 몸입니다. 저를 이리 대하시면, 태양신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이클리트는 무심히 읊조렸다.


“설령 태양신이라고 해도, 똑같아.”

그는 날카롭게 변한 손톱을 들어 올렸다.


“내게 유일한 신은 아멜리아, 그녀뿐이니. 그녀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야 해.”

“으아아악!”

이클리트는 그 손으로 대신관의 머리통을 움켜쥐고서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그러곤 어떤 약을 대신관의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게. 이게 대체 나한테 무슨. 무슨 짓을!”

“이대로 널 죽여 버릴 수 있으나, 그 또한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니니.”

대신관은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면서 의식을 빼앗겼다.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은데.

일어나면 너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그댄 최면 상태에 빠져 그녀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녀의 명령 아래, 오직 진실만을 말하겠지. 그대의 악행을 모두에게 그 입으로 자백하게 해주마. 그녀의 자비에 감사하도록.”

그 한마디를 끝으로 대신관은 죽은 듯, 쓰러져버렸다.

이클리트는 그제야 다시 방안으로 빛을 가져왔다.


“이렇게 쉬운 일이면 좋았을 텐데…….”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을.

아프게 하는 것을.

이렇게 자기 손으로 전부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

하지만 지금 아멜리아를 힘들게 하는 건, 이런 것이 아니니까.

이클리트는 지난밤, 그녀가 흘린 눈물을 아리게 떠올리며.

고작 이것밖에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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