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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화. 움직이기 시작하다 (167/199)


167화. 움직이기 시작하다
2022.08.08.



“신성회에 기회를 줘야 할까요?”

미야는 아멜리아의 뻔히 보이는 의도에 이를 악물었다.


‘거래인가.’

아니, 거래가 아니다.

이건 신성회에 하는 경고다.

더는 자신이 하는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경고.

더 나아가, 어떤 형태로든 신성회가 피오레의 힘이 될 수 있도록, 일부러 신성회에 큰 빚 하나를 지게 하는 것이다.

신성회가 고작 저런 햇병아리 공작의 뒤를 지켜줘야 하다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저 손을 뿌리치고 망설일 일이 아니다.

제국법대로 처리하면, 신성회 대신관이 아무리 독단적으로 저지른 악행이라고 해도, 제국민에게 알려지면서 신성회의 권능이 크게 실추될 것이다.

미야는 대신관의 경솔함과 멍청함에 절로 욕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다.


‘세스가 황자까지 건드리다니. 미친놈! 그래. 어차피 대신관을 끌어낼 작정이었다.’

미야는 예전부터 비 대신관 파로서, 대신관의 탐욕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 탐욕이 신성회에 흠집을 낼 거라는 것도.


‘이참에 친 대신관 파에 맞서, 내가 대신관에 오를 명분을 쥐는 거라면…….’

그리 손해 보는 건 아니다.

미야는 아멜리아를 향해 곧장 고개 숙여, 깊이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저희가 너무나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신관이 사특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는데, 더 빨리 막지 못한 것도 잘못입니다.”

아멜리아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한 미야의 선택을 차분히 들었다.


“태양신을 모시는 종으로서, 이런 민낯을 보여드려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피오레 공작 각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신성회에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확실한 죗값과 더불어 반드시 이 은혜는 갚을 것입니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

아멜리아에겐 저 말이 가장 중요했다.


“신성회에 몹시 실망했지만, 그래도 부신관이 이렇게 간곡하게 반성하고 있으니. 나도 다시 한번 신성회에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아멜리아는 미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더는 내가 신성회에 실망하지 않게 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마주 잡은 손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래가 성사되었음이 읽혔다.

아멜리아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미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앞일을 위해, 그녀는 여기서 더 적을 늘려선 안 됐다.

신성회 같은 집단은 완전히 같은 편은 안 되더라도, 적에게 넘어가지 못하게 묶어는 둬야 했으니까.


‘대신관을 굳이 이 손으로 처리하면 그저 속만 풀릴 뿐, 제대로 얻는 건 없어. 이렇게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걸 취하는 게 이득이야.’

게다가 대신관은 어차피 물러나게 될 거다.

눈앞에 이 부신관이 대신관의 약점을 쥐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할 테니까.


‘이제 정말로 막아야 하는 건 처형식이다.’

 

이클리트는 바람결에 아멜리아가 내린 판단을 듣고, 존중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는 그저 기꺼이 따를 뿐이니까.


“그대의 편이 많아져야, 훗날 그대가 안전할 테니까.”

비록, 자신이 이 세상에서 없어져도…….

***

중앙청 기사단장과 아멜리아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이번 사건은 중앙청에서만 해결하기엔 이미 그 선을 넘었으니, 내가 직접 솔라리스로 가서 폐하를 뵙도록 하겠다. 혹시 모르니 중앙청 기사 몇을 배치하여 백작가를 부탁한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피오레 공작 각하.”

아멜리아는 옆에서 불안하게 서 있는 시종장에게 당부했다.


“백작가의 모든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임시로 백작가를 부탁한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오래 모셨지? 지금 어수선한 백작가를 잡아줄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 믿고 맡기도록 하지.”

시종장은 아멜리아의 말에 불안했던 표정을 다 잡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작 각하께서도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대충 상황을 정리한 아멜리아는 잠시 고개를 들어 커튼이 굳게 쳐진 후지아의 방을 응시했다.


“백작부인도 잘 부탁하지. 괜히 허튼짓 못하게. 허튼 생각 못하게.”

“알겠습니다.”

급하게 사태를 마무리한 뒤, 아멜리아와 카마리는 곧장 말을 타고 솔라리스로 향했다.

카마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멜리아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대공 전하께서는요?”

카마리는 돌아와 준 대공 전하에게 너무 감사하면서도, 정말로 돌아오신 건지 불안했다.


“걱정 마. 먼저 솔라리스로 가셨어. 같이 가면 눈에 띄니까.”

“정말로 돌아오신 거죠?”

“……그래. 돌아오셨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아멜리아의 눈빛에도 여전히 신경 쓰이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

클로에 황후의 별장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마미가 먼저 한걸음에 달려왔다.


“가주님, 가주님!”

마미는 아멜리아의 안색을 먼저 살피며 애써 의연하게 말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식 듣고 너무 놀라서. 제가 어떻게든 체자렛 백작가에 가려고 했는데, 헤스틴 공작 각하께서 제가 가는 게 오히려 부담일 거라고 하셔서. 그래서 그냥 기다렸어요.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지 않으시겠지. 정말로 아젠 백작님도, 메사리나 아가씨도…….”

물론 너무나도 깊은 악연이긴 했지만, 마미는 도통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 일을 해결해야지. 난 괜찮아.”

그때, 어느새 다가온 루시아와 아멜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루시아는 이미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에게 갔다는 걸 알고, 이곳에서 기다린 것이었다.

아멜리아는 마미를 다독인 뒤, 카마리를 데리고 루시아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이미 집무실에선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아는 무사해 보이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안도하며 평소처럼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내 약이 몹시 도움 됐죠?”

“도움 됐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후훗. 그거 만들기 엄청 어렵고, 까다로운 거예요. 그러니까 대공 전하, 나한테 큰 빚진 거예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

“반드시 갚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형태로 갚아줘요. 꼭.”

루시아가 힘줘서 하는 말에, 이클리트는 살짝 가라앉은 표정으로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무튼 다시 이렇게 얼굴 보니 좋네요. 두 사람은 역시 같이 있어야 해. 이렇게 질투 날 정도로 예쁜 부부니까.”

아멜리아는 루시아의 말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루시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정신적으로도 버팀목이 되어줬는지.

이클리트처럼 아멜리아도 그녀에게 갚지 못할 은혜를 입고 말았다.


“당분간 내 모습은 남들에겐 계속 숨기는 게 나을 겁니다. 그래야 그대가 움직이기 쉬울 거예요. 앞으로 큰일이 많으니까.”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냑의 처형식. 카힐로 경도 위험할 거예요.”

카힐로라는 말에 카마리의 표정도 급격히 가라앉았다.


“카르티아 공이 일단 처형식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황궁으로 갔어요. 물론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지만.”

루시아는 생각보다 더 나쁜 소식을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포르티셰 공이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닥치는 대로 루베르를 잡아들이고 있어요. 이대로라면 이번 처형식이 루베르 학살의 시발점이 될지도 몰라. 게다가 체자렛 백작가 사건 때문에 반인반수에 대한 불신과 분노도 커지고 있고. 황제께서 전언까지 하면서 사건을 바로잡겠다고 했는데, 연이어 터지고만 있으니. 황실 입장도 곤란해졌거든.”

“황제는 반인반수 사건의 배후를 모르고, 무엇보다 대공 전하를 이용해야 하기에, 제국민들의 화살받이로 루베르만 한 것이 없네요.”

아멜리아의 말에 루시아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아멜리아는 가까스로 화를 삼켰다.

에드조프와 키르케의 악행을 루베르가 전부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새니까.


‘루베르를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할 테지만, 쉽지 않을 거야.’

이클리트가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일단 아이냑과 카힐로부터 구하도록 하죠. 특히 아이냑은 루베르 장로입니다. 장로가 처형당하게 되면, 루베르의 입지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될 겁니다.”

아마 이건 루베르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 될 거다.


“구할 방도가 있을까요? 시간이 너무 촉박한데…….”

처형식은 당장 내일이었으니까.


“경비가 삼엄할 테지만, 그 삼엄한 경비가 흐트러지는 단 한순간이 있을 겁니다.”

이클리트의 말에 아멜리아는 순간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처형식 당일?”

이클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그때뿐입니다.”

그래. 그날이다.

제국민 모두가 몰려들어서 경비가 더 빽빽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오히려 그 전부를 경계해야 하니, 허점이 생길 기회가 많아진다.

게다가 어차피 처형당할 이들이니, 감시도 삼엄하지 않을 테고.


“처형식 때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태양신에게 참회하는 짧은 시간을 주기도 하니까. 그때를 노린다면 어쩌면.”

아멜리아의 말에 루시아가 다소 회의적인 어조를 띠었다.


“하지만 그땐 신성회 신관들과 신녀들이 지킬 텐데.”

“그건 괜찮아요.”

“응?”

아멜리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빨리 신성회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올 줄이야.’

“그렇다면 처형식 때 그들 모두를 구출하는 걸로 하죠. 그렇다면 일단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

그때, 노크와 함께 마미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워낙 사항이 급해서 이렇게, 크, 클리오 대공 전하?”

마미는 생각지도 못한 이클리트의 모습에 얼어붙었고, 이클리트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군, 마미.”

“마미, 무슨 일이야?”

아멜리아가 곧장 마미의 시야로 끼어들었고, 마미는 일단 침착하게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그게…… 라니가 왔습니다.”

아멜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랐다.


“라니가 오다니? 라니가 여기 왜…… 지금 솔라리스는 위험한데!”

“그게, 일단 라니를 만나보세요.”

아멜리아는 마미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잠시 후, 정말로 라니가 들어왔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라니를 보자마자 헛숨을 삼켰다.


“라니…… 대체 무슨 일이야?”

“가주님…….”

라니의 분위기가 지난번 헤어졌을 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손질을 안 해서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창백한 낯빛과 불안이 가득한 눈빛까지.

그토록 당당하던 라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설마…….’

“공작령에 무슨 일 있었니? 다른 루베르에게 무슨 일 생긴 거야? 포르티셰 공이 감히 내 영지에 있는 루베르에도 손을 댄 거냐고!”

“모두. 가버렸어요.”

“뭐?”

“루베르 모두가. 이사나, 그자가 와서 전부 데려갔어요.”

이사나라는 말에 카마리의 눈빛이 날카롭게 멈춰버렸다.

***

아이냑은 엉망이 된 몰골로 철창에 갇혀 있었다.

내일이면 그의 처형식.

하지만 그보다 자신 때문에 다른 루베르까지 피를 볼까 봐, 아이냑은 그게 불안하고 두려웠다.


“젠장. 젠장. 젠장!”

아이냑이 차가운 바닥에 마구 머리를 찧었다.

그에게 생긴 상처는 대부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 생긴 상처였다.

툭-.

그때, 평소처럼 철창 사이로 빵이 던져졌다.


“그렇게 자기 몸 학대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나?”

하지만 평소와 다른 목소리에 아이냑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끝에 로브를 쓴 이사나가 서 있었다.


“당신이 여긴 어떻게…….”

“그대의 그 분노를 이제 우릴 위해 쓰도록 해.”

“뭐?”

이사나가 로브를 벗자, 아이냑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어지럽게 헝클어진 백발 아래, 선홍빛 눈동자가 날카로웠고, 그의 창백한 얼굴 가득 새겨진 루베르의 문양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내 이름은 루비엔 루베르, 루베르의 가주로서 장군 아이냑,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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