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희생 끝에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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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화. 희생 끝에 평화를
2022.08.12.
“루베르의 가주로서 장군 아이냑,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
아이냑은 이사나의 말에 일순 멍해졌다가, 갑자기 눈빛에 서슬 퍼런 날이 서렸다.
“이제 와 루베르 가주라고? 그래서 명령에 따르라고?”
쾅-!
아이냑은 이대로 철창을 부숴버릴 듯, 내려치면서 살벌하게 이사나를 노려보았다.
이사나는 그런 아이냑의 시선을 절대로 피하지 않은 채 마주했다.
“내가 당신을 인정해서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줄 알아? 그냥 무시했던 거야. 안 그러면 당장이라도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을 테니까!”
잇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증오 어린 살기는 전부 진심이었다.
“피오레 공작 각하와 연이 있기에, 겨우 참았어.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자고 생각했다고. 네놈도 그걸 바란 거 아닌가? 그런데 뭐? 루베르 가주? 그런 백발과 문신을 하고 나타나면 누가 예, 하면서 예를 갖출 줄 알았나? 웃기지 마! 퉤!”
아이냑은 이사나를 향해 침을 뱉고서,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더러운 배신자 새끼가. 당장 꺼져. 네놈이 안 꺼지면, 경비병을 불러서 같이 처형대에 끌고 가줄 테니까!”
루베르를 버리고 외면했던 주제에.
자기 혼자 살겠다고 이사나, 그 말도 안 되는 이름으로 루베르의 흔적을 죄다 지우고 도망쳤던 주제에!
루베르는 그들을 지탱해주던 왕을 잃고, 가주를 잃고,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한 채, 맨몸으로 그 끔찍한 시간을 걷고 견뎌야했다.
다른 특별한 걸 위해서도 아니라, 그저 평범하게 살아보고자.
‘이제 겨우. 겨우 빛이 보이나 했는데. 대체 왜 또 이렇게 된 거지?’
솔라에서 처음으로 자신들을 이해해주며, 손을 내밀어준 피오레 공작을 따라서 마침내 태양의 제단에 입성했을 때.
아이냑은 정말로 목 놓아 울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여기까지, 정말 무수한 시련을 버텨왔으니까.
루베르에게 드디어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는데.
태양신의 태양이 우리 루베르에게도 비추는 것 같았는데.
또다시 이렇게 절망이라니.
아니, 그보다 더한 나락이라니…….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나. 언제까지 발버둥 쳐야 하나. 애초에 희망은 없었나. 끝내 이 솔라에서 루베르가 전부 멸족당해야 끝나는 것인가.’
“죽일 때 죽이더라도, 날 이용할 만큼 이용해.”
이사나의 말에 아이냑은 멈칫했다.
“도망치고 싶었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내가 루베르 왕족이고 가주라는 사실은 변함없었어. 그렇다면 이용해야 할 거 아니야.”
“…….”
“솔라가 원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반군이 되는 것이라면. 이토록 배신자로 내몰고 있으니, 그래.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뭔가 위태롭게 이어지는 이사나의 말에 아이냑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거냐? 반군을 일으키자고?”
아이냑은 스스로 내뱉어도 헛소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사나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못할 게 뭐지.”
“하. 미친 새끼가 정말로 미쳐버렸군.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대야말로 대체 언제까지 평화, 희망, 그따위 힘없는 말을 지껄일 거지? 그대도 이제 알 텐데. 그런 허상 같은 것으로 루베르를 지킬 수 없다는 거.”
이사나의 목소리가 점점 흉포해졌고, 아이냑은 아까와 다른 분위기에 압도당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더는 희생 없는 평화는 없어. 아니, 이제라도 덧없는 희생을 끝내야 해.”
아이냑은 위험한 결의가 담긴 이사나의 말에 꿈틀거렸다.
“이미 포르티세 공작이 루베르를 잡아들이고 있고, 황제는 이를 묵인하고 있어. 황명으로 움직이는 것이니, 묵인은 아니지. 이대로 가다간 처형식을 시발점으로 루베르의 학살이 시작될 거다.”
무섭게 이어지는 말에 아이냑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벌써 그렇게까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악으로 치닫고 있을 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마저…….
이사나는 아이냑의 반응에 무서울 정도로 당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우릴 믿지 않았으니까. 처음부터 솔라는 우릴 이용만 했으니까. 가장 먼저 버려지는 건 우리야.”
갈피를 잡지 못했던 아이냑의 마음이 이사나의 저 한마디에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이 방법뿐인가. 아니. 오히려 너무 늦었던 걸까.’
“……정말로 루베르를 위해, 죽을 각오인 겁니까?”
아이냑의 목소리가 한층 달라졌다.
하지만 이사나는 아이냑에게서 어떠한 예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루베르를 지키기 위해서 검을 드는 게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솔라를 향한 내 복수이기도 하니까.’
아바마마의 죽음에 대한 원한.
형님의 절규에 대한 원한.
처음엔 수인이 우릴 외면해서 이 비극이 시작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근본적인 이유는 솔라 제국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나는 제대로 솔라 제국과 대항하기 위해, 순혈을 택해서 각오를 다졌다.
순혈 루베르는 백발이었다.
루베르는 타 종족과 어울리는 것에 관대했기에 왕족이라고 다 순혈은 아니었다.
왕실에서 백발이 이어진 것은 이사나가 아닌 그의 형이자 왕세자였던 루에였다.
이사나는 사실 루비엔보단 루에가 되길 원했다.
오직 순수하게 루베르를 지키고자 했던 루에의 신념을 품고.
순혈이 상징이 되어, 루베르를 결집하고자 했다.
“저들에게 처형식이 시발점이라면, 우리에게도 처형식이 시발점이야. 이미 다른 루베르들도 나와 뜻을 함께하고 있어. 그러니 부디, 장군인 그대도 힘이 되어줘.”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아이냑도 결국 루베르가 사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여겼다.
“저는 루베르 장로이자, 루베르 장군으로서 마지막까지 그들을 위해 검을 들 겁니다.”
“…….”
아이냑은 자세를 바로 하고서 이사나에게 무릎 꿇고, 고개 숙였다.
“따르겠습니다, 가주. 아니 루베르의 왕이시여.”
아이냑의 입에서 위험한 발언이 세워졌다.
가주가 아닌 왕.
루베르는 더 이상 솔라의 다섯 공작가가 아닌 예전처럼 독립적인 나라가 될 것이다.
그걸 위해, 피의 각오를 심장 깊이 새기며 싸울 것이다.
이사나는 잠시 느리게 숨을 삼키며 루에를 떠올렸다.
‘언젠가 정령들이 돌아오면. 수인들도 돌아오면. 그때 다시 루베르를 일으킬 거야.’
‘형님은 아마 내 선택과 내 방법은 틀렸다고, 끝까지 반대했겠지. 하지만 형님, 정령들도 수인들도 절대 우릴 위해 싸워주지 않아.’
그들도 결국 그들만을 지킬 뿐이다.
정령은 정령들을 지키기 위해 시간의 숲을 봉인했고, 수왕도 마찬가지로 비밀과 비밀을 벼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살아남아야 해. 우리밖에 없어. 우리가 루베르를 지켜야 한다고!’
‘내게 루베르를 지켜야 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루베르로 돌아온 이유이자, 이게 내 선택이고, 내 방법이야.’
이사나는 이번 반란에 자신의 희생을 걸고 있었다.
“마지막 희생 끝에 루베르에게 자유가 있기를…….”
***
“이사나, 아니 루비엔이라고 소개하고는 모두를 데려갔어요.”
아멜리아는 라니의 말에 동공이 흔들렸다.
“루베르를 그냥 데려갔다고?”
라니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내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서…… 처음으로 그들이 나는 루베르가 아니라고. 나를 배척하더니, 전부 떠나버렸어요. 소냐 할머니와도 연락이 안 되고.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이사나가 루베르 가주를 택한 거구나.’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아멜리아는 애써 차분하게 정리하고자 했다.
루베르 가주가 루베르를 결집하기 시작한 이유는 단 하나다.
“라니, 여기까지 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가 루베르를 찾아볼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염치없지만, 이번에도 도와주세요, 가주님.”
“알았어. 일단 쉬어. 마미, 라니를 부탁해.”
마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라니를 데려갔다.
힘없이 돌아서는 라니를 보고 있으니, 아멜리아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이사나 경이 정말 반군이라도 될 기세인 듯하네요.”
아멜리아의 말에 루시아와 카마리, 이클리트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침묵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가 아이냑을 만났을 거라 예상했다.
블러드 아이리스를 이끈 단장이었으니, 마음먹고 은폐술을 한다면 아이냑을 만나는 게 엄청 어렵진 않았을 테니까.
‘만약 이사나가 일을 꾸미고 움직인다면, 그 역시 처형식일 거야.’
이제 그날,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사나의 선택을 탓할 수 없었다.
이사나는 이사나 나름대로 각오를 한 채, 루베르로 돌아가 루베르를 지키려는 거니까.
‘더는 그에게 피 묻지 않은 평화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어.’
잠시 후, 걸음을 돌린 루시아의 빈자리로 칼렌이 굳어진 표정으로 들어섰다.
아멜리아는 카마리와 칼렌을 보며, 몹시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처형식에서 카힐로 경과 아이냑을 구할 작정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황실에 반하는 일. 나는 내 지위를 잠시 내려놓고, 정체를 완전히 숨긴 채 움직일 생각이다. 만약 작전에 실패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내놓을 거다.”
잠시 부루아르로 몸을 숨긴 이클리트는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미간을 굳혔다.
피오레를 더는 위험에 빠뜨릴 그녀가 아니었기에, 짐작하곤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직접 입 밖으로 내뱉은 결의가 서늘하게 닿았다.
“그렇기에 피오레 공작으로서 칼렌 경과 카마리 경에게 명령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잡히면 죽을 것이고, 산다고 해도 불명예스럽게 처단당할 수도 있으니까. 칼렌 경과 카마리 경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아멜리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마리와 칼렌이 동시에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는 가문과 명예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가주님과 대공 전하를 지키는 것이 저의 명예이며, 저를 살려주신 카힐로 단장님을 이번엔 제가 구할 차례입니다.”
카마리의 선택에 이어 칼렌도 똑같은 선택을 내렸다.
“저도 개인적으로라도 돕고 싶습니다.”
칼렌은 이사나에 대한 얘기를 들은 상황이었다.
믿고 존경했던 단장님이 지금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상황이라니.
칼렌은 도저히 믿기 어려워서, 어떻게든 이사나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그가 처한 상황의 이사나를 직접 보고 싶었다.
“역시나 반대도 강요할 수 없으니. 다들 잘 부탁하고, 모두. 살아남길 바란다.”
아멜리아의 말은 짧고도, 묵직하게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게 했다.
‘이건 내게 하는 각오이기도 하니까.’
***
부루아르로 내려간 아멜리아는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표정으로 그에게 살며시 다가갔다.
이클리트는 일부러 더 가까이 파고드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연신 무거운 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사나 경의 움직임으로 이번 처형식이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복잡해졌습니다. 하지만 내가 말려도, 그대는 가겠지.”
“가야 해요. 어쩌면 죄 없는 솔라 제국민들이 휘말릴지도 모르니까.”
이클리트는 말리진 않았다.
다만.
“그럼 그 맹약, 제대로 지켜줘요. 서로가 서로를 지키기 위해, 자기가 자신을 지키자고.”
“대공 전하야말로 지켜줘요. 나는 우리 맹약, 절대 안 잊으니까.”
아멜리아는 언제나 지니고 있는 얼음 목걸이를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래도 이게 있어서 다행이에요. 비록 조금 녹긴 했지만, 이게 무사하면 당신도 무사하다는 거니까.”
“그대도 내게 준 부적이 있습니다.”
뭐지. 자신이 뭘 줬던가?
이클리트는 품에서 아멜리아에게도 익숙한 통을 꺼냈다.
“그대가 내게 준 편지. 여전히 날 살게 하는 부적입니다.”
“여전히 가지고 있었네요.”
“그러니. 이걸로 충분합니다.”
“예?”
뭔가 이상한 말에 아멜리아가 그의 표정을 제대로 보려는 순간,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돌려세워서는 뒤에서 와락 안겨들었다.
“대공 전하?”
“쓰다듬어줘요. 그럼 더 힘내서, 절대로 다치지 않고 나를 잘 지키겠습니다.”
오랜만에 그가 충견 모드로 비비적거리자, 뭔가 너무 그립고 반가워서.
하루하루 평범했고, 소소했던 그런 일상으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아서.
아멜리아는 울컥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이클리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자꾸만 묘하게 어긋나는 불안함을 그녀는 자꾸만 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