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수왕의 결정
(169/199)
169화. 수왕의 결정
(169/199)
169화. 수왕의 결정
2022.08.15.
이클리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루시아가 다시 은밀히 그녀를 찾아왔다.
루시아의 손엔 간단한 스프와 빵이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헤스틴 공?”
“대공 전하께 듣자 하니 내내 아무것도 못 먹었다면서요? 백작가에서도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고, 걱정이 많으시네요.”
“하하. 괜찮아요. 그렇게 먹고 싶지도 않고…….”
“그럼 안 되죠.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하는데. 힘 빠져서 못 하면 어떡해요?”
“그건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정말로 음식 생각이 나질 않았다.
워낙 정신없고 바쁘기도 했지만, 힘든 일이 계속 겹치다 보니 속도 좋지 않았다.
“대공 전하께선, 이제 아시는 건가요?”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멜리아가 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먼저 헤스틴 공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아멜리아는 아젠 백작을 통해 알게 된 그 끔찍한 진실을 루시아에게 전부 말해주었다.
루시아는 아멜리아의 말에 표정이 얼어붙으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바스티얀 대공이. 아니. 이제 대공이 아니지. 세상에. 감히 가짜 주제에…… 하!”
황실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밑바닥까지 썩어 있었던 말인가.
루시아는 그녀답지 않게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을 밝혀야지. 이건 다섯 공작가로서도 가만있을 수 없는 일. 솔라 전체를 능멸하고 있는 일이에요. 결국 클리오 대공 전하께서 유일한 황위 계승자인 거잖아요.”
“그렇죠.”
“처형식에서의 작전이 성공하면, 카르티아 공작과 내가 폐하께 회의 소집을 요청하겠어요.”
다섯 공작가는 황제에게 회의를 요구할 권한이 있었다.
원한다면, 귀족들 전부를 황궁으로 부를 수 있었다.
“거기서 그 가짜의 정체를 밝혀야 해요. 물론 진실 앞에 솔라는 더 큰 혼란에 빠지겠지만, 더는 당하고 있을 수 없으니까.”
루시아의 말에 아멜리아는 어쩐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께 클로에 황후 폐하에 대한 진실을 말했어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으세요.”
아멜리아의 말에 루시아의 눈빛도 잘게 흔들렸다.
“원래 그런 분이시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진실을 들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라…….”
그래도 친어머니인데, 만나러 가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일부러 입에 담지 않는 듯 보였다.
“황궁에 황후 폐하께선 계시겠죠? 이 일이 밝혀지면 클로에 황후 폐하께도 큰일인데. 결국, 수왕인 게 밝혀질 테니…….”
“황후궁은 항상 은밀하게 지켜져서 자세한 건 모르지만, 카르티아 공에 의하면 평소보다 경비가 더 삼엄해졌다고 들었어요.”
“정말요?”
“아마 뭔가 일이 생긴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계속 숨길 수는 없다.
에드조프와 키르케를 궁지에 몰아야 하니까.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하니까.
‘황후 폐하. 그때, 제가 분명 조금 더 곁에서 버텨달라고 하셨죠. 대체 무슨 생각이신가요?’
클로에 황후께선 지금의 황제를 이용한 걸까?
시간의 숲의 열쇠를 위해서, 해와 달이 되고자?
가장 불안한 생각은.
‘설마 황후 폐하께서도 대공 전하를 이용하려고 하시는 건 아니시겠지.’
아멜리아는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아닐 거야. 그때 내게 했던 그 말엔 분명 걱정과 염려가 있었어.’
“일단은 처형식부터 생각하죠. 당장 내일이 우선이니까.”
“그래요. 그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죠.”
그때, 노크와 함께 마미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조금 급해서요…….”
“무슨 일이야?”
“사실, 케이트 님이 가주님께 남기신 것이 있습니다.”
“케이트? 그러고 보니 케이트가 안 보이네?”
“케이트 님이 공작가로 돌아가셨습니다.”
“응?”
아멜리아는 마미가 건네준 케이트의 편지를 펼쳤다.
그런데 편지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따로 얼굴 뵙고 말씀드렸어야 했으나, 상황이 너무 힘드신 것 같아서 편지를 남깁니다. 사실 벨반 공작 각하와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급하게 공작 각하를 찾아나서야 할 듯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 각하는 강하신 분입니다.
아무래도 먼 길을 떠나신 것 같은데, 소식이 닿는 대로 가주님께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외조부님께서…….”
소식이 끊어졌다니.
물론 자신과도 연락이 되진 않았지만, 케이트와는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계신 줄 알았는데…….
“내가,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가주님. 케이트 님께서 직접 가셨잖아요. 가주님께 걱정 끼쳐드리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케이트 님의 말씀처럼 큰일 없으실 거예요.”
아멜리아는 너무 불안했지만, 일단 케이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에게 소식 들어오면 곧바로 말해줘. 절대로 숨기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녀는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무사하셔야 해요. 꼭, 무사하셔야 해요…….’
***
북부에 머물고 있었던 소냐는 솔라리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곧장 짐을 챙겼다.
안 그래도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이혼 소식에 마음이 불안했기에, 더더욱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 재앙이 시작될 거야.’
“오랜만이군.”
그때,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소냐는 눈을 크게 뜨고서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가 서늘한 눈매를 접은 채, 소냐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 수왕 폐하!”
소냐는 클로에를 알아보고서 곧장 몸을 바짝 엎드렸다.
클로에는 그런 소냐를 일으켜 세우며 속삭였다.
“시간의 숲이 움직이고 있어.”
그녀의 한마디에 소냐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흔들렸다.
“아직 두 제국에서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걸 눈치채면 정말로 전쟁이야. 기회는 딱 한 번이지. 정령의 자비도 딱 한 번이야.”
그 말은 즉, 또다시 인간들이 시간의 숲을 더럽히고, 정령들을 분노케 하면 세상이 종말 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소냐는 조심스럽게 클로에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이클리트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읽었다.
“클리오 대공 전하가 수왕 폐하께서 택하신 달입니까? 역시 그분이, 수왕 폐하의 핏줄이었습니까?”
“하지만 내가 만든 열쇠는 미완성이었다. 진정한 사랑의 화합이 되질 못 했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그걸 완성할 줄이야.”
클로에의 말에 소냐는 곧장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그 아이가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사랑을 품었으니.”
클로에는 수인에게 잃어버린 시간의 숲을 되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정령이 분노하며 시간의 숲을 봉인했을 때, 직접 정령을 찾아가 끊임없이 고개 숙이고, 사과하며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정령이 내놓은 해답이 바로 열쇠였다.
그 열쇠는 달과 해가 하나가 되는 것.
달은 수인, 해는 인간이다.
결국 정령이 원한 것은 인간과 수인의 진정한 화합이었다.
정령의 분노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수인 또한 금기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무의미한 살생을 범하는 수인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수인이 힘을 과시하니, 인간들은 두려움을 느꼈고.
인간의 두려움이 힘을 향한 뒤틀린 이기심을 일으켰다.
정령들은 인간과 수인이 화합하여, 이 세상에 다시 질서와 조화가 찾아오길 바랐다.
클로에는 일단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그 화합을 아스란과 이루려고 했다.
물론, 아스란의 야욕과 욕망에 완전히 어긋나버렸지만.
이클리트가 열쇠가 되진 못해도, 수왕의 힘을 이어받았기에 그 힘이 강했다.
그녀는 이클리트를 지키고자 전 카르티아 공작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봉인하는 대가로 이클리트의 힘을 눌렀다.
이클리트를 보호하고자, 에드조프가 자기 아들이 아님을 알면서도 아들인 척했다.
아스란이 이클리트를 가혹하게 대할 테지만, 그래도 이클리트의 힘이 들켜서 이용당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그 아이가 스스로 그 힘을 다룰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지. 물론 나도 갖지 못한 사랑을 그 아이가 그렇게 깊이 품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혹시 몰라서 초상화에 문구를 남겼지만, 그게 이뤄질 줄 몰랐다.
미완성이었던 열쇠가 결국 스스로 정말 열쇠가 된 것이다.
소냐는 아멜리아의 불행한 운명을 떠올리며 떨리는 목소리를 붙들었다.
“열쇠가 되어 숲을 푸는 게 어떤 의미이자 방법인지,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 방법입니까?”
지난날, 소냐는 아멜리아에게 열쇠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열쇠의 운명이 너무 가혹했으니까.
클로에는 잠시 길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미 선택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이 세상…… 그렇겠지. 그분에겐 세상 전부지.’
예상했던 대답에 소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건가.’
처음 소냐가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봤을 때, 묘하게 맞물리는 두 사람의 운명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안타까웠다.
끝까지 함께 하고 싶지만,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에겐 종말과도 같은 끝이었으니.
‘해와 달은 같은 하늘에 있으나, 결코 서로 만나지 못하는 운명이다.’
클로에는 어두워진 소냐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 역시 같은 심정으로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이클리트, 그 아이를 마침내 제대로 만났던 그 날.
드러난 모든 진실 앞에 끝까지 자기 자신보단 그 여인을 걱정하던 이클리트였다.
‘정말. 그게 너의 선택인 것이냐?’
‘선택할 문제가 아닌, 그게 제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그게 이유라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를 여기서 꺼내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루라도 오래. 그녀 곁에 있겠습니다.’
“오히려 숲을 열지 못하는 게 그 아이에겐 더 큰 고통이겠지. 그게 그 아이가 선택한 운명이라면.”
정령은 자비로운 용서를 택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맺어진 화합을 원했으나, 결국 함께하지 못할 운명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니 말이다.
그만큼 정령의 분노는 컸고, 용서는 무겁고 슬펐다.
그러니 그 무게를 알고,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됐다.
“하지만 키르케, 그 아이는 막아야만 해.”
클로에의 목소리가 보다 섬뜩하게 번졌다.
수인의 금기를 범해, 살생을 일삼은 일족이 바로 뱀의 일족.
예전부터 인간을 죽이면서 강한 독을 축적해오고 있었다.
언젠가 인간을 없애고, 수인의 세상을 만들겠다면서.
물론 아스란에게 이용당한 것은 가여우나, 그렇다고 개인적인 원한으로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키며 고통받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라도 루베르를 도와야지. 우리의 수호자에게 한 맹약을 지켜야지. 너무 늦어서 미안하구나.”
“수왕 폐하…….”
루베르를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정령의 용서가 이렇게 길게 걸릴 줄 몰랐기에, 클로에는 루베르에게 미안하고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키르케를 막아서 루베르를 보호해야 했다.
“이자가 그대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클로에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녀의 빈자리로 뜻밖의 인물이 걸어왔다.
“어째서 피오레 전 공작 각하께서 여길…….”
소냐에게 걸어온 이는 바로 벨반 공작이었다.
게다가 벨반은 혼자가 아닌 어떤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지저분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아이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어딘가 몹시 아파 보였다.
“이 아이가 도움이 될 거라고 수왕 폐하께서 말씀하셨소.”
“그 아이는…….”
가까이에서 아이를 본 소냐의 눈이 커지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살아있었다니. 그렇구나. 저런 모습이어서, 들키지 않았던 거구나.”
겁에 질린 아이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몇 번이고 깜빡이는 아이의 동공이 흡사 뱀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