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우릴 위해 희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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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우릴 위해 희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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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화. 우릴 위해 희생하겠다
2022.08.19.
아스란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황실 기사단과 포르티셰 공작가 기사들의 배치에 신경 쓰고 있었다.
“광장 구석구석에 배치 해. 그리고 이번 호위에서 티어들은 전부 빼. 이제 그것들은 믿을 수가 없어. 이클리트, 그 새끼가 분명 피오레 공작 계집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에리얼은 아스란의 분노 앞에 애써 침묵하며, 고개 숙였다.
이클리트, 그가 지하실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 그 새끼가 날 이용한 거야. 황실 정보만 빼돌리고 사라진 거라고!’
아스란은 크게 분노했지만, 그놈이 사라진 사실을 숨겨야 했기에 아멜리아를 불러서 추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었고 말이다.
특히 지금 아멜리아를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체자렛 백작가 사건 이후, 제국민들이 아멜리아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사건을 빠르게 수습하고 처리했다며,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니…… 그 미궁에서 아무리 그놈이라고 해도 혼자 빠져나가긴 힘들었을 텐데.”
그만큼 놈의 힘이 강해진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탐난다.
다시 붙잡아서, 이번엔 좀 더 확실하게 팔과 다리에 사슬을 걸어둬야 한다.
“분명 처형식에 나타날 거야.”
체자렛 백작가의 비보로 아멜리아는 이번 처형식에 불참을 알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불참이 명분인 것 같아서 수상했다.
“그 계집이 루베르 장로를 이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지. 게다가 그 새끼의 부하도 함께 있고 말이야. 피오레 공작이 아니라, 위장해서 침범할 거야. 그때 반드시 다시 잡아야 해.”
이참에 아멜리아, 그 계집에게도 확실히 일러둘 필요가 있었다.
더는 겁도 없이 나대지 말라고.
피오레 공작이 아닌 이상,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려도 아무 문제 없는 계집일 뿐이니까.
‘자꾸 내 일에 방해가 되면, 독이 묻은 드레스가 아니라 아예 그 입에 독을 쑤셔 넣어버리는 수가 있어.’
“포르티셰 공에게도 소홀함 없이 철저히 감시하라고 해. 단, 이클리트를 포르티셰 공이 발견해선 안 된다. 내 말뜻, 알지?”
“물론입니다, 폐하.”
에리얼은 아스란의 신경이 온통 처형식에 쏠려 있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진 황후 폐하의 부재를 모르시니. 부디 바스티얀 대공 전하께서 하루라도 빨리 황후 폐하를 찾으셔야 할 텐데…….’
***
마침내 처형식이 열리는 당일이 밝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늘은 청아했고, 햇살은 부드러웠다.
이 화창한 하늘 아래, 몇 명의 목숨이 끊어질지 알 수 없었다.
광장으로 몰려드는 제국민들의 표정 역시 심상치 않았다.
누구도 이 화창한 날씨를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어울리지 않는 스산함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우르르 걸어가는 제국민들 사이로, 갈색 로브를 입은 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카마리와 칼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뒤, 곧장 흩어져서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
수석 시녀들이 분주하게 에드조프의 의복을 챙겨주고 있었다.
이번 의복은 평소 입는 것과 달랐다.
“대공 전하, 벨트를 두르겠습니다.”
“대공 전하, 카렌듈라 휘장을 장식하겠습니다.”
황태자로서, 아스란 다음으로 태양신의 가호를 받은 의복을 정식으로 갖춰 입을 수 있었다.
새하얀 프록코트엔 황금으로 수놓아진 장식이 우아했고,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휘장 아래 태양을 장식한 보석이 화려했다.
어깨에서부터 기품 있게 떨어지는 망토는 결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이 강렬하게 눈에 닿았다.
머리 장식 하나에도 신경 쓸 만큼, 에드조프에게 오늘은 중요했다.
그는 오늘 아스란과 함께 처형대에 올라, 아스란 대신 처형의 시작을 알리는 황금 종을 울리는 임무를 맡았다.
모두에게 솔라의 유일한 차기 계승자임을 확실하게 알리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다섯 공작가에게 선택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대공 전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폐하께서는?”
“곧 광장으로 출발하실 것입니다.”
“그럼 나도 서둘러야지.”
에드조프는 넘치는 희열을 겨우 누른 채, 방을 나섰다.
선대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진 복도를 지나가는 그의 걸음이 예전과 달랐다.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다. 황궁도, 황좌도, 솔라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뿐이야.”
***
신성회 대신관이 물러나고, 예비 대신관을 맡게 된 미야가 신녀와 신관들을 이끌고 죄인을 만나기 위해 광장에 먼저 당도했다.
죄인들은 이 광장 아래에 자리 잡은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시간이 되면 단두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단두대에 오르기 전, 신성회 사제는 죄인을 태양신의 이름 아래 참회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의식을 치렀다.
새하얀 로브를 쓴 미야와 사제들이 당도하자, 포르티셰 공작가 기사들이 그 앞을 막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서부터는 신원을 확인한 뒤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미야는 먼저 로브를 벗고서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대신관인 내 얼굴로는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겁니까? 아니면 아직 예비 대신관이어서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까?”
“오해십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제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피기엔 시간이 없습니다. 신원 확인은 저 하나로 끝내주시지요. 저희가 설마하니 폐하를 배신하겠습니까?”
기사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괜히 신성회의 노여움을 사면 기분이 찜찜했기에 몸을 비켜섰다.
“대신관 님의 얼굴로도 충분하십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감사합니다.”
미야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다른 사제들이 의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사제들이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지고, 단 한 명이 미야의 곁에 남아 있었다.
미야는 걸어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싸늘한 어조로 읊조렸다.
“이걸로 큰 빚 하나는 갚은 겁니다.”
그러자 미야의 뒤를 따르던 사제가 그녀를 앞지르며 읊조렸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미야를 대신해서 죄인들의 방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갑자기 들어온 낯선 이의 모습에 경계하던 아이냑과 카힐로는 로브를 벗자, 스르르 쏟아지는 보랏빛 머리카락에 눈을 크게 떴다.
“가, 가주님…….”
카힐로의 목소리 끝에 아멜리아가 서 있었다.
아이냑은 어쩐지 음울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대체 여길 어떻게?”
“설명은 나중에. 시간 없어요. 얼른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아멜리아가 카힐로에게 하얀 로브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이냑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아멜리아를 밀어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저는 여기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아이냑…….”
“저자만 데리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더는 루베르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루베르와 얽히면, 피오레 공작가도 살아남기 어려울 겁니다.”
아이냑의 입에서 새어 나온 섬뜩한 말에 아멜리아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사나 경을 만난 건가? 대체 이사나 경과 뭘 하려는 거야!”
아멜리아는 자꾸만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아이냑을 똑바로 붙잡고 눈을 마주했다.
“설마 정말 반군이 될 셈이야? 반란을 일으키면, 루베르가 더 많이 다칠 거야. 더 많이 희생될 거라고!”
“그러지 않아도 루베르는 다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죄 없이 더 많이 죽을 테고!”
아이냑의 악다문 잇새에서 울분이 느껴졌다.
그토록 우직하고, 굳건했던 아이냑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냑…….”
“그러니 이젠 우리가 우리 손에 피를 묻혀 지켜야겠습니다. 그러다 죽는다면 차라리 명예로울 것입니다.”
아이냑은 어느새 결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이 무섭도록 잔인한 결의 앞에, 아멜리아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주님을 믿었고, 저희에게 보여주신 호의와 신뢰가 거짓이 아님을 압니다. 그래서 정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가주님께 더 피해 주고 싶지 않습니다. 떠나십시오.”
아이냑은 카힐로를 보며, 아멜리아를 데리고 나갈 것을 눈짓했다.
“이 이상은 가주님도 솔라의 귀족으로서 저희에게 방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아무리 가주님이라도 결국 가주님은 솔라 제국민이고, 우린 루베르니까.”
같은 솔라 제국민이 아닌, 자신들은 루베르라고.
아이냑은 완고한 선을 긋고서, 아멜리아에게 완전히 등을 보였다.
“가주님.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카힐로가 아멜리아에게 다가왔고, 그녀도 결국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적극적으로 아이냑을 말리고, 저 위험한 뜻을 굽히게 할 수 없었다.
‘내가 저들에게 한 약속을. 그 맹약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포기 하지 않을 거예요.”
떠나기 전, 아멜리아는 이 말만큼은 아이냑에게 하고 싶었다.
“희생 위에 쓰이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니까. 난 내 가족과 내 친구와 이웃의 죽음을 마음 아프게 기억하며, 그 목숨 위에 살아가지 않았으면 해요. 사실 전부, 살고 싶잖아요.”
아멜리아가 카힐로와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아이냑은 주먹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
아멜리아와 카힐로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대공 전하께서 여기 계십니까?”
“나와 함께 있어요. 그분도 카힐로 경을 구하려고 노력하고 계시고요.”
카힐로는 아멜리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황제 폐하께 붙잡히셨다고 들어서 걱정했었는데…….”
“그래서 지금은 모습을 감추고 있어요. 카힐로 경이 필요해요. 부디 대공 전하를 지켜줘요.”
“가주님께서는?”
“나는 처형식에 남아서 할 일이 있어요.”
아이냑이 반군으로 뜻을 굳혔고, 함께 탈출하지 않았다면.
이사나와 다른 루베르가 이 광장으로 온다는 얘기다.
‘설마 여기서 일을 벌이는 걸까?’
어찌 되었든, 솔라와 루베르 간에 죄 없는 피가 난무하게 될 거다.
그들이 잘못한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들이 희생되어야 하는 거지?
저들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
그저 평범하게 하루하루,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피로 물든 평화는 안 돼.’
조금이라도 희생을 막기 위해선, 이들을 저렇게 싸우게 만든 원인을 없애야 한다.
‘피를 흘려야 한다면 저들이 아니라 그들이 흘려야지. 에드조프. 키르케!’
모두가 모여 있는 광장.
게다가 에드조프와 아스란도 이 자리에 함께할 거다.
어쩌면, 이번이 기회일 것이다.
‘모든 진실을 폭로해야 해.’
당장 증거가 없어서 완벽하게 궁지에 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처형식은 엉망이 될 테고, 에드조프를 뒤흔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폐하께 보낸 선물이 도움이 될지도 몰라.’
아멜리아는 아이냑만큼 뭔가 결심한 눈빛으로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치켜 묶고서, 서둘러 광장을 향해 달렸다.
이사나보다 늦어선 안 된다.
그들이 반군을 일으키기 전에 성공해야만 한다!
***
이사나가 말을 타고 숲속을 쉼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를 주변으로 땅은 울렸고, 나무와 풀숲은 마치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검은 깃털이 떨어졌고, 이사나는 흠칫하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하늘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고, 이사나는 곧장 그것을 낚아챘다.
그건 알 수 없는 열쇠 하나였다.
이사나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검은 독수리가 순식간에 하늘에서 사라졌다.
“클리오 대공…….”
그때, 또 다른 루베르가 이사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사나는 그 열쇠를 품에 숨긴 채, 다시 고삐를 쥐고서 외쳤다.
“다시 모두 진격한다!”
이사나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숲속 곳곳에 숨어 있던 루베르들이 전부 움직이면서, 고요했던 숲을 깨우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처형식이 열리는 광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