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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화. 폐하께 드리는 특별한 선물 (173/199)


173화. 폐하께 드리는 특별한 선물
2022.08.29.



 
반인반수를 막기 위해 이클리트와 아멜리아가 나서자, 이사나와 아이냑이 그들의 앞을 막았다.


“이사나 경?”

아멜리아가 멈칫했고, 이클리트는 서늘한 눈빛을 띠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인사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가주님.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가주님은 황궁으로 가세요. 에드조프와 키르케 그 여자를 막아야 합니다. 이 이상 희생자 없이, 여기서 끝을 봐야 하니까.”

아이냑은 품에서 익숙한 검은 물체를 꺼냈다.

그건 반인반수를 제어할 수 있게 만들었던 우리였다.


“여기 있는 반인반수도 더는 다치지 않게, 그들의 지배에서 풀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속 제압하고 있지만, 이들이 황도로 아예 넘어가 버리면, 죽이지 않고 막는 데 한계에 다다를 겁니다.”

아멜리아는 이사나와 아이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을 부탁할게요.”

이클리트는 곧장 아멜리아를 품에 안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멜리아는 긴장 섞인 시선으로 이클리트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을 주었다.


‘키르케와 에드조프를 멈추게 해야 해.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쳐선 안 돼.’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반인반수 무리에 세인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안 보이는 게 다행인 거겠지? 그런 거겠지? 부디 무사해야 할 텐데…….’

이클리트는 떨고 있는 아멜리아의 손을 말없이 잡아주었다.

그 안온한 온기에 순식간에 떨림이 사그라졌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흘렸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갑자기 웃는 겁니까? 물론 그대가 웃어서 나는 좋지만.”

“예전에 제가 대공 전하에게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대공 전하를 안아주는 이 온기에 익숙해졌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오히려 대공 전하의 온기가 내게 물들었나 봐요. 내가 익숙해져 버렸어. 없으면 너무 추울 만큼.”

“그대 덕분에 생긴 온기니까, 온전히 그대의 것입니다.”

이클리트의 말에 또다시 미소가 스치다가 문득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돌아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날 부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어.’

어째서일까.


“대공 전하.”

“불편합니까? 사람을 데리고 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아니요. 그건 아니고…….”

이클리트가 아멜리아를 빤히 응시하고, 그 눈빛을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잘못은 그들이 한 것이니. 그대가 바라는 대로, 그들이 죗값을 받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야죠.”

아멜리아는 지금과 상관없는 생각은 일단 뒤로 미뤘다.

***

아스란은 미친 사람처럼 황궁으로 들이닥쳐서는 그대로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클로에! 클로에 어디 있어! 클로에!”

악을 쓰는 아스란의 앞으로 에리얼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달려와선 그대로 무릎 꿇었다.


“화, 황제 폐하…….”

아스란은 광기가 서린 안광으로 에리얼을 노려보며 읊조렸다.


“클로에는 어디 있나.”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아스란이 에리얼의 목을 조르며 비명을 질렀다.

에리얼은 아스란의 손아귀에서 숨을 헐떡이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송구, 송구합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지금 행방불명이신…… 으윽!”

행방불명이라는 말에 아스란의 눈빛이 얼어붙으며, 이내 에리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웃기지 마! 행방불명이라니. 클로에. 그래. 짐의 침실로 간 거야. 예전처럼 기억이 돌아와서, 그래서 날 찾으러 간 거야!”

“폐하!”

아스란은 무서운 속도로 침실로 들이닥쳤다. 그런데 침실 탁자에 놓인 뭔가가 그의 시야에 박혔다.

그는 성난 눈빛으로 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탁자에는 아멜리아의 글씨로 쪽지가 놓여 있었다.

-폐하께서 제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그때 약속했었던 특별한 선물을 드립니다.-


“피오레, 그 계집년이 뭘 준다는 거지?”

아스란은 쪽지 아래 있는 책 한 권을 펼쳤다.

책에 그려진 건 아멜리아가 보낸 수왕의 초상화.

초상화를 보자마자, 아스란의 숨이 가슴께에서 턱 하고 막혔다.

부서질 듯 흔들리는 그의 눈빛에 클로에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클로에를 닮은 것이 아니라 똑같았다.

게다가 불현듯 다른 누군가의 얼굴도 겹쳐 보였다.


“……이클리트…….”

무심코 내뱉은 이름 하나에 아스란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아니야. 말도 안 돼…… 클로에는 인간이야. 그 괴물이 내 아들일 리가, 내 아들일 리가 없어!”

아스란은 들고 있던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막힌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년이 무슨 수를 쓴 거야. 그 괴물 놈이랑 짜고 짐을 기만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다시금 침실을 빠져나와서는 이 넓은 황궁을 마구 뛰어다니며, 클로에를 찾기 시작했다.


“클로에! 클로에!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어서 나와. 제발, 클로에!”

클로에를 만나야 한다.

그녀를 만나야, 이 말도 안 되는 끔찍한 농락이 거짓임이 밝혀질 것이다.

감히 황제를 가지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피오레 공작도, 루베르 그놈들도. 전부. 전부 가만두지 않을 테니!


“클로에! 클로에!”

어쩐지 섬뜩한 적막이 감도는 복도를 마구 가로지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스란은 환희 섞인 시선으로 곧장 고개를 돌렸다.


“클로에?”

하지만 아스란의 표정이 금방 사나워졌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키르케였다.


“네가 여기 왜…… 아니지. 키르케, 그래. 넌 알겠지. 에드조프의 유모니까. 클로에의 곁에도 있었으니까.”

아스란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키르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외쳤다.


“에드조프가 반인반수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말도 안 되지. 내 아들이야. 그렇지? 클로에는. 클로에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풉!”

순간, 어울리지 않게 터져 나온 키르케의 웃음에 아스란은 굳어진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감히 짐의 말을 비웃는 것인가? 네년이 죽고 싶은 거야!”

“이렇게 웃기는데,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습니까?”

“뭐?”

키르케는 자신을 붙잡은 아스란의 손을 도리어 더 세게 붙잡고서 확 끌어당겼다.

아스란은 희번덕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키르케의 눈빛이 기분 나빠서,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으나 어쩐지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도 모르십니까?”

“뭐?”

“아젠 백작, 그자는 그래도 빨리 눈치챘는데. 나와 바스티안 대공 전하께서 닮았다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스란은 움직임을 멈추고서, 멍청하게 되뇌었다.


“누가, 누굴 닮았다고?”

“처음엔 눈치챘었잖아. 아이가 네놈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태양이 깃든 아이, 제국의 번영? 웃기는 소리지.”

키르케는 정신을 못 차리는 아스란을 더욱 몰아세웠다.


“아젠 백작은 세실과 내가 닮았다는 것도 알아차리던데. 네놈이 모르면 어떡해.”

비웃음이 가득하던 키르케의 목소리가 점점 사나워지면서, 그녀의 눈빛이 빠르게 휘몰아쳤다.

그 모습에 아스란은 절로 온몸이 떨려왔다.

희번덕하던 눈동자가 점차 피처럼 물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동공이 일자로 쭉 찢어지면서 아스란의 얼굴을 그어 내리듯,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너는. 너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잿빛 머리카락 사이로, 소름 끼치는 뱀의 비늘이 피부 대신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키르케는 입꼬리를 귀밑까지 쭉 추켜올리며, 온기 한 점 없는 어조로 외쳤다.


“네놈이 죽였으면서. 네놈이 얼굴조차 모르면 어떡하지? 뱀의 일족을 안았는데, 왜 네가 만든 그 열쇠가 뱀이 아닐까. 왜 그조차 의심하지 않는 거지? 아니지. 그래. 애초에 기억조차 못 하겠지. 네놈이 누굴 끔찍하고 비참하게 망쳤는지!”

키르케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뱀으로 변해서는 그대로 아스란의 온몸을 꽉 옭아맸다.

아스란은 몸부림조차 치지 않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 키르케를 응시했다.


“설마, 그때 그 수인이 살아있었나?”

“네가 죽인 그때 그 수인의 언니다.”

“그 괴물의 언니라고?”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아스란의 말에 키르케는 또다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세실의 얼굴은커녕, 세실이 뱀의 수인인 것조차 저놈은 몰랐던 거다.

얼굴을 가리고, 팔과 다리를 묶은 채 아이만 갖게 했으니까.

정말로 철저히 이용하고 버린 거다.

하긴, 가장 알아야 할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니, 곁에 숨어들기는 쉬웠다.

쉬우면서도, 증오가 치밀었고.

그 증오를 매 순간, 순간 곱씹고 삼키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네가 만들었던 세실의 아이는 내가 죽였어. 그리고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아이가 이클리트, 네가 그토록 아끼고 아꼈던 황후와의 아이다. 진짜 네 피가 섞인 네 아들.”

아스란은 키르케가 내뱉는 진실에 공허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하하하하! 복수랍시고,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그 괴물이 내 아들일 리가 없지. 내 아들은 에드조프…….”

“에드조프는 내 아들이지. 뱀의 피를 이어받은 내 아들.”

아스란은 뱀이라는 말에, 에드조프에게서 보았던 그 끔찍한 뱀의 비늘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내 아들이 아니라고.’

키르케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아스란에게 스르르 다가와서는 손톱을 길게 뻗으며, 그의 뺨을 긁어내렸다.


“하지만 이렇게 원하고 있으니. 네가 죽고 난 뒤, 네 뒤를 이어 진짜 아들로 만들어줄게. 비록 일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이 사실을 아는 전부를 죽여 버리면 되니까.”

끊임없이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아스란의 머릿속으로 자꾸만 아멜리아가 보낸 그 초상화가 박혔다.

그 초상화가 정말로 클로에라면.

클로에가 낳은 아이가 정말로 이클리트, 그놈이라면.


“……정말로 클로에가. 클로에가…….”

아스란이 미처 내뱉지 못할 말을 키르케가 희열에 찬 어조로 속삭였다.


“네놈은 황후가 사실 수인이었다는 사실에 미치겠구나. 나도 그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야.”

키르케의 한마디에 아스란은 순간 눈이라도 먼 것처럼, 앞이 아득해졌다.


“멍청한 아스란. 넌 네가 수인을 이용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완전히 수인에게 농락당한 거야.”

키르케는 마치 죽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아스란의 모습에 혀를 차며 손짓했다.

그러자 아스란을 묶고 있던 뱀들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이걸로 안 돼.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없어. 절대 이대로 죽지 마.”

“클로에가, 그럴 리가. 클로에. 클로에가…….”

아스란은 끊임없이 클로에를 읊조렸다.

키르케는 그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고작 슬퍼하지 마. 고통스러워해야 해. 네가 가진 전부를 잃고, 아주 끔찍하게 파멸해야 한다고!”

그녀는 아스란이 이런 식으로 무너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고작 이런 식으로는!


“좀 더 깊이 새겨. 네가 사랑한 계집도 수인이라는 사실을. 네가 그토록 학대하며 망가뜨린 이가 네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네가 너를 망치고 있었다는 이 사실을!”

하지만 넋을 놓았던 아스란이 일순 차가운 시선으로 고개를 들어 키르케를 응시했다.

키르케는 공허하게 부딪힌 아스란의 눈빛에 멈칫했다.


“그 괴물이 정말 내 아들이라면. 그 특별한 힘은 결국, 온전히 내 것이라는 거군. 진짜, 내 것.”

“……뭐?”

아스란은 말없이 등을 보였다.

키르케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그의 입에서 어긋난 말을 되뇌었다.


“진짜, 내 것이라니…….”

  

***

아스란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서, 클로에는 어디 간 거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설마, 가버린 거야? 내 곁을 완전히 떠난 거야?’

“……나와. 내 앞에 나와서 얘기해. 제대로 나와서 얘기하란 말이야!”

엉망으로 튀어 오르는 날 것의 절규 앞에, 괴괴한 바람 소리가 뒤섞였다.

아스란은 마구 흔들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클로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것도 초상화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를 알지만,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낯선 그 모습으로.


 
아스란은 갑자기 허한 웃음이 마구 나오다가, 그토록 울부짖었던 이름을 정작 이번엔 부르지 않은 채 말했다.


“감히 날 이용한 건가?”

클로에는 아스란을 향한 무심한 시선 끝에, 닫혀 있던 입술을 싸늘하게 달싹였다.


“그대와 목적이 같았을 뿐이지. 시간의 숲을 수인에게 되돌려주는 것. 그게 수왕인 나의 의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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