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위험한 소유 (174/199)


174화. 위험한 소유
2022.09.02.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와 하늘을 통해 은밀히 황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녀로서는 일단 에드조프를 제대로 만날 생각이었다.


‘대화는 안 통하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여기서 그만 끝내게 해야 해. 그래야 그나마 피해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어.’

에드조프가 무릎 꿇으면, 키르케 그 여자도 그만둘 테고.

황실은 이미 권위가 실추됐으니, 이후엔 다섯 공작가와 함께 의논하여 제국민에게서 다시 신뢰를 되찾아 와야 했다.


‘비밀이 밝혀지기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전부 밝혀졌으니까. 에드조프도 어쩌면 포기했을지도 모르지.’

“대공 전하, 일단 에드조프부터 찾아야겠어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쭉 가도록 해요. 내가 경비병과 만나지 못하도록, 손을 쓸 테니까.”

아멜리아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대공 전하는 같이 안 가시나요?”

분명, 같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흩어져서 찾는 게 빠를 겁니다.”

그 말을 하면서 이클리트는 조금 치미는 숨을 눌렀다.


“개인적인 감정은 접어두고, 얼른 이 일을 해결해야 하니까.”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말을 의심 않고 믿었다.


“알겠어요. 그럼 나는 여기로 갈게요.”

“조심해요.”

“대공 전하도요.”

아멜리아가 먼저 걸음을 옮겼고, 이클리트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며 이성을 붙들었다.

그녀를 혼자 보내고 싶지 않지만.

특히나 에드조프와 단둘이 만나게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그는 따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이클리트는 냉랭한 시선으로 반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클로에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

아스란이 클로에를 처음 만난 건, 여행으로 갔던 시간의 숲 근처였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여인.

아스란은 곧장 클로에를 거둬서 치료해줬고, 의식을 되찾은 클로에는 파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환하게 말했다.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 너머, 푸른 하늘을 담고 있었던 여인.

세상에 모든 하늘빛을 지닌 채, 웃고 있던 그 여인에게 아스란은 한순간 매료당한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저기, 괜찮으신가요? 제가 무슨 무례한 말이라도…….’


‘아니. 아니다. 네가 너무 어여뻐서.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다시 스치는 미소가 아스란은 세상에 전부가 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첫눈에 반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장로회의 완강한 반대에도, 몰락한 후작의 양녀로 만들어 황후로 곁에 둘 만큼.

이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몰랐지만.

몰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제 곁에 그녀가 있는 게 중요했으니까.

오히려 과거가 아무것도 없다면, 지금부터 하나하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되니까.

가장 귀하고 또 귀한 황후로.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제 곁에 이름이 새겨지도록.

오직 자신만의 여인으로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런 그녀가 수인이라니.

그것도 수왕이라니.
 


‘절대 내 곁을 떠나지 마, 클로에. 그댈 위해 가장 강한 황제가 될 거야. 누구라도 내게서 그댈 빼앗아가려고 한다면, 결단코 가만두지 않아. 넌 내 거야. 오롯이 내 것이야.’


‘떠나지 않아요.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서, 강한 황제가 되어주세요.’

 
그렇게 말했으면서.


“내게 강한 황제가 되어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처음부터 날 이용한 건가?”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아스란은 입안이 뜨겁게 타올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스란과 달리, 클로에는 지독히도 덤덤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대와 목적이 같았을 뿐이지.”

목적. 고작, 목적이라고?

클로에의 무심할 정도로 싸늘한 반응에 아스란의 머릿속이 점점 더 격하게 뛰어올랐다.


“목적이 같다고? 그럼 그대도 날 위해서 시간의 숲을 열려고 한 건가?”

“…….”

“난 그댈 위해서였어. 시간의 숲을 가져서, 누구보다 강하고 완벽한 황제가 되어 그댈 지키려고 했다고.”

그래, 자신은 오직 클로에를 위해서였다.

태생도 알 수 없는 황후 따위, 호시탐탐 끌어내려는 이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먼저 숨을 거둔 뒤에 그녀를 해할지도 모르니까.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그런 강한 황제가 되어야만, 그런 황제의 이름으로 그녀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대를 위해서. 누구도 내게서 그대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그래서 강한 황제가 되려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왜. 왜 날 배신한 거지? 왜 내게 강한 황제가 되어달라고 한 거야? 대체 왜!”

서늘한 눈빛으로 아스란을 응시하던 클로에가 나직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도 말했지.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해 강한 황제가 되라고. 그대가 스스로의 나약함을 숨기고자, 강한 황제에 집착하여 그 욕망과 탐욕에 삼켜지는 것이 안타까웠지. 그래서 겉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강한 황제가 되길 바랐는데.”

“……뭐?”

“황제가 황제답지 못하면, 주변이 불행해지니까.”

아스란은 떨리는 턱 끝에 힘을 꽉 주었다.


“그대의 넘치는 탐욕과 욕망을 날 위해서라고 말하지 마. 날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댄 시간의 숲을 원했잖아. 그렇지 않으면 날 시간의 숲에서 발견했을 리가 없어.”

아스란이 시간의 숲에서 클로에를 발견한 이유는 여행을 핑계로 시간의 숲을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 이 숲을, 어떻게든 그는 손에 넣고 싶었으니까.

이 숲만 손에 넣으면, 솔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이름을 남기게 될 테니.

아스란은 그저 그런 황제로 역사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 단 하나의 태양으로 남겨지길 욕망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대와 나 사이엔 순수한 감정은 없었어.”

서로의 만남에 단 한 점의 감정도 없었다고 말하는 클로에를 보면서, 들끓었던 아스란의 머릿속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갔다.


“단 한 번도. 날 사랑한 적 없었다고?”

“애초에 사랑으로 만나지 않았는데.”

시종일관 덤덤하던 클로에는 순간, 살짝 어그러진 어조가 튀어 올랐다.


“그럼 그대는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사랑을 떠올리나?”

클로에의 날개가 아스란의 눈앞에 거대한 모습으로 움직였다.

인간들이 괴물이라 부르는 그 모습, 그대로.


“그대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날 택할 수 있어? 황제가, 수인을 황후로 삼을 수 있냔 말이다.”

일순, 아스란의 눈빛이 잘게 흔들리면서 멈칫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클로에는 냉소를 지었다.


“난 내 목적을 위해. 그대는 그대의 목적을 위해서였을 뿐.”

클로에는 점점 더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읊조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함께 지난 시간에 대한 연민으로 경고하지. 시간의 숲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정령의 힘은 자연 그 자체. 그걸 함부로 탐하지 마. 그대가 아무리 탐하고자 해도, 한낱 인간인 그대는 진짜 태양이 될 수 없어.”

한순간 헝클어졌던 클로에의 감정을 아스란은 읽지 못했다.

그저 드러난 진실에 처음엔 좌절했고, 심장이 찢어질 듯 절망했으나 이젠 증오와 분노만이 뒤엉켰다.

어느새 아스란의 표정이 완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채, 입꼬리를 비릿하게 추켜올렸다.


“아니. 오히려 더 가져야겠어. 이클리트, 그놈이 내 아들이라면 더더욱.”

“아스란.”

“수왕의 피가 섞였으니, 완벽한 열쇠겠지. 가장 특별한 수인이겠지. 그래서 그대도 숨기고 있던 진실을 드러낸 거 아닌가? 하지만 이클리트는 내 것이기도 해. 내 피가 섞인, 내 것.”

“끝까지, 아들이 아니군.”

“아니, 내 아들이야. 그래. 짐의 피가 섞였는데, 고작 하찮은 수인은 말이 안 되지. 수왕 정도는 되어줘야지.”

아스란의 안광이 점점 더 사납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간의 숲을 가져서, 솔라의 유일무이한 황제가 될 것이다.”

뒤틀린 소유욕이 그의 표정에 들러붙은 채, 어그러졌다.

클로에는 그 모습에 눈동자가 더욱 나직이 흔들렸다.


“기어이 끝을 보겠다는 건가? 시간의 숲을 포기하지 않겠다?”

“클로에, 그대가 날 이용한 게 아니야. 감히 누가 날 이용한다는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그댈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니 가져야지. 전부, 가져야 맞는 거지.”

“폐하, 폐하!”

그때, 멀리서 아스란을 찾는 에리얼의 목소리가 울렸다.


“폐하, 지금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는 보고가…… 크, 클로에 황후 폐하! 아니. 아, 아니…….”

아스란에게 가까이 다가온 에리얼은 클로에의 모습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클로에는 에리얼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고, 아스란은 복도가 울릴 만큼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하하!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니. 정말로 움직였다니! 녀석이구나. 정말로 녀석이 열쇠이기에 반응한 거구나. 역시. 태양신은 나의 편이군.”

아스란은 클로에를 무섭게 내려 보며 말했다.


“난 내 욕망을 완성하도록 하지. 단 하나의 태양. 그 태양이 짐이 될 것이다. 나는 한낱 인간이 아닐 테니까.”

“마지막 기회였는데. 내려놓을 기회를, 준 것이었는데.”

클로에는 습윤하게 떨리는 시선을 내리깔며, 더욱 거센 바람과 함께 서서히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스란은 순간 분노하던 눈동자 위로 다급함이 스치며, 그녀를 잡으려고 했으나 이를 악물고서 시선을 돌렸다.


‘전부를 가지는 것에, 그대 또한 포함이야. 그댈 지하실에 가두는 한이 있더라도, 놓치지 않을 거야.’

“폐하. 대체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 왜…….”

“군대를 소집하라.”

아스란은 에리얼의 말을 무시한 채, 명령했다.

그 말에 에리얼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군대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더냐? 그렇다면 프리메도 알게 됐을 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먼저 차지해야지. 아니, 프리메는 가지지 못해. 열쇠가 우리 손에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세스가 황자를 인질로 삼아야겠군. 세스가 황자는 어디 있지?”

“하, 하지만 폐하. 이는 너무 위험합니다. 황실의 금기가 밝혀졌다고 들었습니다. 모두가 폐하께 해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지금 황실의 권위가 추락했는데, 여기서 군대까지 일으키면!”

“어차피 언젠가 밝혀졌을 일이다. 하지만 짐이 시간의 숲을 가지면 전부 해결될 일이야.”

그때, 가장 거슬리는 목소리가 아스란의 위태로운 이성을 건드렸다.


“폐하, 폐하!”

아스란에게 달려온 장로회는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체 광장에서의 일은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정말로 수인과 얽혀 계신 것입니까?”

“수인 사이에서 아이를 낳다니…… 이 무슨 망측한! 대체 바스티얀 대공 전하는 무엇입니까? 정말 괴물입니까?”

“폐하, 대체 클로에 황후는!”

“시끄럽군.”

“폐하?”

아스란은 냉랭한 시선으로 복도에 장식된 검 하나를 꺼냈다.


“예전부터 그대들은 너무 시끄러워. 미치게, 시끄럽다고!”

 
휙-!
 


“폐, 폐하!”

아스란은 장로회 중 한 사람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장로회와 에리얼은 섬뜩한 살기 앞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아스란은 피가 튀어 오른 얼굴을 닦으며, 더 언성을 높였다.


“짐이 황제다. 짐이 이 나라의 태양이란 말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짐에게 틀렸다는 거지? 날 무너뜨리겠다고? 망가져? 내가?!”

그는 여전히 칼자루에 힘을 준 채, 에리얼을 바라보았다.


“에리얼, 당장 군대를 소집해서 이클리트를 잡아. 그놈을 끌고, 시간의 숲을 침략한다. 안 되면 피오레 공작이라도 잡아. 그년을 잡아 죽여서라도 이클리트를 내 눈앞에 끌고 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때, 아스란의 앞으로 이클리트가 걸어왔다.

아스란은 이클리트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오, 내 아들.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이 짐의 피로 만들어진 나의 완벽한 아들아.”

처음으로 아스란의 입에서 이클리트를 향한 소름 끼치는 애정과 함께, 내 아들이라는 말이 잇새 사이로 눌려 나왔다.


 

***

아멜리아는 일단 에드조프가 머무는 별궁으로 움직였다.

황궁 안이 워낙 소란스러워서, 오히려 이쪽 경비가 허술한 듯했다.


‘광장은 여전히 싸우고 있을 거야.’

더한 희생을 막기 위해선, 에드조프가 순순히 물러나야 하는데.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멜리아는 손에 쥔 리볼버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경비가 허술해도, 역시 황궁이지.’

뒤에서 점점 다가오는 스산한 느낌.

아멜리아는 짧게 숨을 삼키며 곧장 총구를 겨눴다.

그런데 총구 앞에 서 있는 이는 에드조프였다.


“에드, 조프?”

그 순간, 에드조프가 그대로 아멜리아를 끌어안았다.


“지금 뭐 하는!”

“……제발 날 다시 사랑해.”

위태로운 한마디에 아멜리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대가 없으면 이제,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에드조프는 넋을 잃은 눈동자를 띤 채, 온몸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