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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화. 의미 없는 고백 (175/199)


175화. 의미 없는 고백
2022.09.05.



 
알렉드라가 기사들을 이끌고 광장에서 제국민들을 피신시키고 있을 때.

뒤에서 카마리와 칼렌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격수인 칼렌으로선 이런 단거리 전투가 몸에 상당히 무리를 주고 있었다.

일단 마탄으로 반인반수들의 발을 묶은 다음, 단검으로 제압하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하아. 진작 검술도 좀 배워둘 걸 그랬네.”

하지만 그는 힘든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카마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순간, 달려드는 늑대의 공격에 칼렌은 이를 악물고서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커서 단검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아직 마탄을 만드는 건 무리인데…….’

결국 늑대의 거대한 앞발이 칼렌의 어깨를 꿰뚫으려는 찰나, 섬뜩한 바람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늑대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하아, 하아…….”

칼렌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단장님…….”

이사나는 무거운 시선으로 칼렌을 보며 짧게 읊조렸다.


“가주님께 못 들었나? 이제 블러드 아이리스 단장이 아니라고 말이야.”

그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는 미안하다.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아니, 블러드 아이리스 전체에 미안해.”

진심이 묻어나는 자책에, 칼렌은 곧장 몸을 바로 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처음엔 믿을 수 없었고, 단장님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칼렌은 사방에서 싸우고 있는 루베르의 모습과 그런 루베르를 지키기 위해 직접 단상에 올랐던 이사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듣지 않아도, 이미 눈으로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달라진 건 그저 단장님이 누굴 지키려고 하는지, 그게 달라졌을 뿐. 단장님은 단장님이십니다.”

뜻밖의 말에 이사나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지키려고 하는 마음은 똑같지 않으십니까.”

이사나는 입꼬리가 나직이 흐트러지면서, 겨우 숨을 다잡고서 속삭였다.


“그렇게 이해해준다면, 고맙다.”

“여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단장이 없으면 부단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곳도, 피오레도 걱정하지 않아. 칼렌 경, 너 정도면 이제 단장으로서도 충분하니까.”

칼렌은 이사나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부디 단장님도 더는 이곳에 마음 쓰지 말고, 그가 택한 길에만 집중하길 바랐다.


‘그래. 이제 단장님은 우리 곁에 없어. 계속 이분에게 기댈 수 없다고.’

칼렌은 스스로 이사나와 멀어져서는 다시금 단검과 장총을 손에 꽉 쥐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카힐로가 칼렌의 뒤를 봐주었다.


“카힐로 경? 여기 계셔도 되는 겁니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 아수라장에 누가 날 보겠나? 게다가 황제도 도망치고 없는데.”

“하긴 그렇죠.”

“대공 전하께 해가 될까 봐 숨어 있었는데, 아주 아수라장이군.”

“두 분 다 황궁으로 가셨습니다.”

카힐로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를 떠올리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다 알게 되신 건가. 하긴. 전 카르티아 공작 각하께서 그러셨지. 언젠가 알게 될 거라고. 아니, 알아야만 한다고.’

예전엔 이클리트, 그분이 홀로 감당해야 할 진실의 무게가 두려웠지만, 카힐로는 이제 걱정하지 않았다.

더는 그분이 혼자가 아니기에.

그분은 이제 절대로 죽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내 할 일을 해야지.’

카힐로는 제대로 칼자루를 고쳐 잡고서, 묵묵히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이클리트와 아멜리아, 두 분이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믿고, 지켜보는 일이었다.

***

연발까진 아니더라도, 무리하게 총을 쏘던 이사나가 결국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섰다.


“하. 역시 가주님이 아니라서 좀 힘드네.”

그때, 카마리가 이사나의 뒤로 검을 휘두르며 짧게 속삭였다.


“역시 약해빠졌군.”

아무렇지 않게 나타난 카마리의 모습에 이사나는 멈칫하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언제 한번 제대로 강한 모습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걱정할 모습만 보여주네요.”

“걱정이라도 할 수 있게, 제대로 살아만 있으십시오.”

순간, 이사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제 뒤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이사나는 꾹 참고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평소와 같은 이사나의 목소리에 칼자루를 쥔 카마리의 손끝이 붉게 떨렸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옵니까?”

“그러게요. 이 상황에 얼굴이 먼저 들어오네. 아픈 데 없는지, 괜찮은지, 잘 지냈는지. 뭐, 그런 소소한 거.”

카마리는 정신 차리려고 하면서도, 자꾸만 의지와 달리 심장이 익숙한 울림으로 두근거렸다.

결국,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미쳤네. 이 상황에 당신 말에 반응하는 걸 보니.”

“역시 카마리 경은 솔직하네요.”

“수작 아닌 거 아는데, 나는 아직 정리가 좀 덜 됐으니까. 그런 말 쉽게 하지 마십시오.”

“…….”

“같이 있는 것도 아직은 무리니까, 나는 앞에서 싸우겠습니다. 이사나 경은 뒤에서 싸워요. 당신과 내가 지켜야할 것이 다르긴 하지만, 지금은 같은 것 같으니까.”

“…….”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이사나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카마리가 앞으로 뛰어갔다.

이사나는 그런 카마리에게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카마리 경은 너무 솔직해.”

그는 카마리를 보면서 헷갈렸던 감정의 이름을 점점 알 것도 같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멍청했고, 어리석었다는 것도.

하지만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당신한테 들키지 않아서, 다행일지도 몰라.’

여전히 이사나는 자신의 희생을 가장 앞에 두고 있었으니까.

이사나는 어렵사리 카마리에게서 눈을 뗀 채, 점점 더 아수라장인 광장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대로 계속 막는 건 진짜 한계인데…….”

황궁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그쪽에서 먼저 해결이 나야 할 것 같은데.

그때, 그런 이사나의 시야로 세스가 황자가 보였다.


‘세스가 황자 전하께서 여긴 왜?’

황제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나?

아니면,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인 건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다시. 날 사랑해줘…….”

아멜리아는 곧장 에드조프의 손을 뿌리쳤다.

에드조프는 휘청이면서도, 끝까지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어지럽게 뒤엉킨 머리카락 너머, 두려움이 가득한 눈동자와 그 아래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뱀의 비늘이 덮여 있었다.

아멜리아는 말없이 그런 그를 응시했고, 에드조프도 아멜리아에겐 광장에서처럼 악을 쓰며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그대는 내 모습에 괴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거잖아. 놀라고, 경악하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겉모습만 보고 괴물이라고 하진 않죠.”

“그래, 그대는 다 이해해주니까…….”

“당신이 그런 모습이라서 놀란 게 아니라, 정말이었구나 싶어서 놀란 거지.”

에드조프는 어쩐지 다른 의미로 자신을 향한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다는 것을 느끼곤, 제자리에 멈춰 섰다.


“황궁에 사는 뱀 두 마리. 그중 한 마리가 당신이었다는 거. 그래서 그때 밀주를 무서워했다는 거. 아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죠? 당신이 황후 폐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

에드조프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아멜리아의 반응에 떨리던 시선이 멎었다.


“키르케, 그 여자의 아들이라는 것도 알았으면서. 당신도 반인반수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다 알고도 진짜인 척, 대공 전하를 괴물로 낙인찍었던 건가? 그분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혹시, 어쩌면 그도 이번 일에 피해자일지도 모른다고 아주 잠깐 생각한 적 있었다.

하지만 아닌 거다.

그는 알고도 아닌 척.

오히려 같은 반인반수를 무기처럼 지배하고 이용한 거다.


“다른 게 놀란 게 아니라. 그 뻔뻔하고 추악한 모습에 놀란 거야. 그 겉모습이 괴물 같은 게 아니라. 그 본심이 소름 끼치게 괴물 같은 거라고!”

아멜리아의 말에 에드조프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대는 참, 많은 걸 알고 있었군.”

“어차피 다 밝혀졌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그만둬.”

“다 밝혀졌으니까, 더 그만둘 수 없지. 아멜리아. 이렇게는 생각해보지 않은 거야? 애초에 다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더 미칠 것 같았던 내 심정을?”

에드조프는 제 얼굴에서 만져지는 뱀의 비늘을 금방이라도 뜯어내고 싶은 심정으로, 튀어 오르는 감정을 내뱉었다.


“난 내가 진짜인 줄 알았어. 내가 진짜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처음 이 모습을 보고, 내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알아? 사실은 내가 가짜였다니. 그 녀석이 진짜고, 내가 가짜였다니! 이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전부를 잃는 걸까? 그런 거야?”

딛고 있던 땅이 사라지면서, 온몸이 끝도 없는 밑바닥으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공포를 꾸역꾸역 삼키면서.


“이 황궁에서 난 단 한 순간도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들킬까 봐, 무서웠고. 죽을 만큼 외로웠어. 항상 내 자리를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완벽한 황자의 모습을 만들어야 했다고!”

언제나 강박처럼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모습도.

완벽한 황자의 모습 아래, 숨겨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진짜에 연연했던 건가. 진짜 황자라고. 진짜 황태자라고. 황위에 집착하던 모습도, 황제가 되어야지 그 권력 아래 완벽하게 감출 수 있을 테니까.’

대공 전하를 괴물이라고 더더욱 몰아세웠던 것도.


‘대공 전하의 정체를 들키지 말아야, 자신이 끝까지 진짜가 될 테니.’

“그런데 녀석도 괴물이었다니. 나와 같았어. 나와 같은 괴물이었다고!”

에드조프는 괴괴한 냉소를 그리다가, 애처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맞아, 아멜리아. 나도 이클리트와 같아. 그런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지? 왜 그 녀석은 이해해주는 거지? 왜 그 녀석을 사랑하는 거야? 왜 그 녀석은 외로워지지 않는 거냐고!”

아멜리아가 밀쳐낸 거리를 에드조프가 다시금 좁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를 그저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녀 앞에 선 에드조프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멜리아에게 닿은 그의 눈동자에 뒤틀린 열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대에게 상처 준 건 인정해. 그땐 깨닫지 못했어. 모든 게 내 것이 아닐 때, 맞아. 너만은 내 것이었는데. 내게 유일했었는데. 오롯이 나만 바라보던 눈빛이었는데…….”

에드조프의 손길이 아멜리아의 눈매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한때, 이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솟았다.

생기 따위 없이, 죽어가던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소름이 끼쳤으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얼굴을 보면, 단숨에 환해지면서.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걸 알았지만,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어두운 밤에만 만나도.


‘무섭지 않나요?’


‘전혀요. 대공 전하께서 곁에 계시는걸요.’

언제나 그 다정하고 안온한 온기가 올곧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게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유일하게 가졌던 온기였음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니야. 늦지 않았어. 넌 날 잊지 못했어. 너에게도 내가 유일해.’

“아멜리아, 넌 날 사랑했어. 날 사랑했다고. 넌 내 것이잖아. 너만은 내 것이 되어야 하잖아!”

에드조프는 더더욱 애타게 아멜리아를 붙들고서 눈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가지 마. 이클리트에게 가지 마.”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듯, 에드조프의 숨결이 점점 더 아멜리아에게로 들러붙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해. 이렇게 원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대는 내 사랑을 받기만 하면 돼. 너에게 특별한 건 나야. 나 하나면 된다고.”

 

 
절절하게 읊조려지는 고백.

아니, 이건 고백이 아닌 폭력일 뿐이다.


“당신은 정말 끝까지 달라지지 않아.”

높낮이조차 없는 그녀의 덤덤한 어조에 에드조프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날 당신 소유라고 생각하는구나. 당신이 아는 사랑은, 이런 것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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