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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화. 진짜가 되기 위해 (177/199)


177화. 진짜가 되기 위해
2022.09.12.


수인의 애정은 각인과 같다.

생을 쏟아내어서 하는 사랑이기에.

각인은 죽어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죽여서라도 갖겠다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클리트와 에드조프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격하게 부딪히며, 날 선 공기를 일으켰다.

그때, 멀리서 황실 근위대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이클리트는 말없이 아멜리아를 안고서 그대로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 눈앞에서 그녀를 데려가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니면 둘 다 죽든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말.

에드조프는 냉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만약 내가 죽더라도, 네놈 역시 같이 지옥으로 떨어져야지.”

어느새 에드조프의 앞으로 황실 근위대가 우르르 몰려와서는 곧장 검을 드리웠다.

에드조프의 모습은 여전히 뱀의 비늘이 덮여 있는 모습이었다.


“순순히 우리와 같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기사단장의 말에 에드조프의 미간이 사납게 굳어졌다.


“무례하게 뭐 하는 것이지? 일개 기사 따위가 감히 이 제국의 황자인 내게 검을 드리우고 한다는 말이, 그딴 건방진 말투라고?”

기사들은 잔뜩 긴장한 시선으로 에드조프에게 겨눈 검을 거두지 않았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에 점점 안광이 섬뜩하게 변하면서 외쳤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 감히 뭐 하는 짓이냐고 묻잖아!”

“괴물을 사냥하는 거지.”

그때, 잔인한 목소리가 에드조프의 귓가에 꽂혔다.

근위대 너머, 아스란이 냉랭한 표정을 띤 채 에드조프에게 걸어왔다.

에드조프는 그런 아스란의 모습에 순간 멈칫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아바마마…….”

일부러 더 힘주어 아바마마라고 읊조렸으나, 아스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괴물 따위가 감히 아바마마라니.”

냉정한 한마디가 에드조프를 사정없이 베어냈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생각보다 크게 아프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짐작하고 각오했었으니까.


‘내가 가짜라는 게 드러나면, 가장 먼저, 가장 비정하게 날 버릴 거라 생각했었지.’

진짜 아들이었을 때도, 항상 벼랑 끝에서 언제 어떻게 이 등을 떠밀지 몰랐으니.

아스란은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에드조프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 짐의 고귀한 핏줄을 이은 황자가 왜 그렇게 멍청할까. 왜 그렇게 덜떨어질까. 어찌 이리도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하나, 하나. 비수처럼 박히는 목소리에 에드조프는 살갗이 파일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짐과 하나도 닮지 않았던 그 모습. 그래. 그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짐이 어리석었지. 잠시 눈이 멀었던 거야.”

아스란은 혀를 차며 읊조렸다.


“복수에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

겨우 참고 있던 에드조프는 그 한마디에 숨 쉴 수 없을 만큼, 증오가 가슴을 눌렀다.


“그런 괴물 주제에 아닌 척, 발칙하게 이 자리를 탐내다니.”

“……저는 한 번도 폐하의 아들이 아닌 적 없었습니다.”

짓눌린 목소리가 스산하게 번졌다.

아스란은 그런 에드조프의 한마디에 조소를 띠었다.


“하!”

에드조프는 어느새 아스란을 똑바로 응시하며 더더욱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니. 저는 폐하의 뒤를 이어 황위를, 이 솔라를 가질 것입니다.”

“죽기 전에 무슨 발악이든 못 할까.”

아스란이 손짓하자, 기사들이 에드조프를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에드조프는 그런 기사들을 향해 팔에 휘감겨 있던 뱀의 팔찌를 보였다. 그러자 팔찌가 순식간에 뱀으로 변해서는 기사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악!”

기사들은 그 모습에 파리하게 질린 표정으로 주춤했다.


“역시 그 핏줄이군. 뱀 새끼.”

“이 힘을 쓰게 만든 건 폐하이십니다. 저는 이제 잃을 것이 없으니 말입니다.”

어느새 뱀이 에드조프를 휘감으며 그를 보호했다.


 


“폐하께서 그러셨지요. 빼앗기지 말라고. 반드시, 황제가 되라고.”

“…….”

“예. 저는 반드시 황제가 될 겁니다. 승자만이 진짜가 될 테니까. 나를 아는 모두를 죽여서, 제가 진짜가 될 겁니다.”

“나 역시 살려두지 않겠다는 경고로 들리는군.”

“좋으실 대로 들으십시오.”

에드조프는 그대로 등을 보인 채 달렸다.

그가 풀어놓은 뱀 때문에 기사들은 사라지는 에드조프를 쫓을 수가 없었다.

아스란은 그런 에드조프의 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뭐든 꿈틀거려봐야지. 결국엔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

황궁을 빠져나온 에드조프는 그 길로 공방을 향해 달렸다.


‘먼저 다섯 공작가 가주 전원을 없애야지.’

어차피 그들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 지금의 가주를 전부 죽여서 새로운 가주를 세워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는 정당성을 갖춘 완벽한 황제가 되고 싶었으니까.


‘황제도 죽여야 해. 내 앞을 막는 모두를 죽여야만 해.’

더는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제 자신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으니까.
 


‘복수에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괴물.’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자신이 사실은 반인반수였다는 사실만큼이나 그를 괴롭게 했던 거니까.

사랑 따윈 없이.

애정도, 무엇도 없이 그저 사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더 사랑받고자 꾸미고, 더 관심받고자 하고, 더 존경받고자 했다.

완벽함에 더 집착하지 않으면, 가짜라는 게 티가 날 것 같아서.

그런데 그게 전부 부질없고, 헛된 짓이었다고 말하듯.

자꾸만 그놈과 운명이 뒤바뀌어간다.

이클리트도 원래 똑같아야 하는데.

자신과 달리 그놈은 점점 채워지고 있고, 자신은 점점 비어가고 있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내가 진짜가 될 수 있어. 내가 황제가 되면. 솔라의 황제가 되면!”

공방에 당도한 에드조프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처음, 키르케에게 이끌려 이곳에 왔을 때는 너무 소름 끼치고 기분이 더러웠는데, 이젠 아니었다.

이제 이것만이 자신의 무기니까.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줄 최후의 무기.

에드조프는 공방의 지하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그곳엔 키르케가 에드조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 전하.”

에드조프는 키르케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그렸다.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

그는 반인반수가 갇혀 있는 철창 안을 훑어보았다.

처음 왔을 때보단, 철창 안이 다소 비어 있었다.


“광장에 푼 녀석들은 많이 죽었을 테지. 하지만 괜찮아. 필요하면 더 만들면 되잖아. 아니, 더 만들어야 해.”

에드조프는 어느새 밀주를 꽉 움켜쥐며, 선득한 어조로 말했다.


“오직 나를 위한 완벽한 군대를 세워야 하니까. 아, 맞아. 아니면 그걸 쓰면 되잖아. 그렇지?”

에드조프가 키르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희열에 찬 눈빛으로 속삭였다.


“이들 중 최고의 무기가 있다고 그랬었지. 어디 있지? 그걸 가져와.”

키르케는 그 말에 살짝 머뭇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미완성입니다. 워낙 사나워진 놈이라, 자칫 잘못 다루면 대공 전하께서 목숨을 잃으실 겁니다.”

“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지? 그걸 쓰지 않으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너도 바라는 거잖아. 솔라를 우리가 손에 넣는 거.”

“물론입니다.”

사실, 이렇게 시기가 당겨질 줄 몰랐다.

아직은 불안정한 상태라, 좀 더 독으로 정신 지배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독이 부족했다.


‘밀주를 만드는 것은 뱀의 일족의 독이다. 그런데 그 독이…….’

키르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독이 거의 바닥나고 있음을 느꼈다.

피부가 더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독을 전부 빼앗기면, 그녀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어. 복수를 완성할 수 있다면.’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아주 완벽한 무기를 대공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그 무기를 이용해서 시간의 숲을 차지하십시오.”

키르케의 말에 에드조프는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의 숲?”

“숲이 움직였습니다.”

“결국 열쇠가 이클리트였군.”

“모두가 그 숲을 노릴 겁니다.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차지하셔야 합니다. 숲을 가진 자가 마법을 가질 테니. 그곳에서 복수를 완성하십시오.”

아스란이 가장 원하는 것을 빼앗아야 한다.

그게 시간의 숲이다.

클로에가 수왕인 이상, 아마 그 숲을 더럽히려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겠지.

수왕은 아스란을 이용하면서까지, 그 숲을 지키고자 했으니까.

키르케는 떨리는 미소를 지으며, 에드조프를 응시했다.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군. 하지만 전부 내가 끌어안고 가야 할 일이지.’

그녀의 복수 완성은 에드조프가 솔라의 황제가 되는 것.

수인은 절대 섣불리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수왕이라면 더더욱.

그러니 에드조프가 황제가 된다면,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복수의 끝이 파멸이고, 수왕의 손에 단죄되어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아스란과 함께, 내가 나락으로 떨어질 거다.’

에드조프는 까만 어둠에 먹히고 있는 달을 응시했다.

곧, 달 없는 밤이 찾아온다.

감춰 있던 모든 어둠이 깨어나는 그 날, 자신도 끝을 볼 것이다.


‘황제가 되어 아멜리아, 그대가 나의 황후가 되던가. 아니면 죽어서라도 내 이름 옆에 새겨지던가.’

“나는 절대 널 이클리트에게 빼앗기지 않을 테니.”

 

***

아멜리아를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간 이클리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는 손은 여전히 풀지 않은 채, 긴장했던 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멜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을 돌려서는 손목을 보여주었다.

이클리트는 부어 있는 그녀의 손목에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세게 잡았던지. 이거 빼고는 뭐, 괜찮아요. 아! 목도 조금 붓기는 했는데. 이것도 뭐…….”

그는 일순 분노가 치밀었지만, 가까스로 삼키며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따뜻한 온기가 퍼지면서, 에드조프 때문에 느꼈던 그 순간의 두려움과 기분 나쁜 감각이 삽시간에 사그라졌다.

아멜리아는 그의 손길에 살짝 얼굴을 기대면서, 나직이 말했다.


“나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대공 전하도 말해줘요. 다친 곳 없어요?”

“없습니다.”

“정말이죠?”

“정말 없습니다.”

“잠깐, 고개 숙여 봐요.”

아멜리아가 가까이 손짓하자, 이클리트가 상체를 완전히 굽혀서 아멜리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이클리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얼굴의 여기저기를 살피며 속삭였다.


“얼굴은 다친 곳 없네요. 다른 곳도 괜찮은 것 같고…….”

이클리트는 이제야 겨우 웃으며, 그녀의 손바닥을 잡고서 깊이 입을 맞췄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러네요. 이제야 좀 웃네요.”

아멜리아 역시 그를 따라 웃었다.

그녀에게 에드조프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괜히 신경 쓸 것도 없었다.

이클리트도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안도했다.


“자, 그럼. 황궁에서 대체 어딜 가셨던 거예요? 게다가 우리 아직 황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안 돼요. 에드조프는 아마 끝까지 갈 작정인 듯하니, 황제 폐하라도 만나야…….”

“황제가 군대를 일으킬 겁니다.”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숲을 건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끝입니다.”

“대공 전하께서 그걸 어떻게…….”

“만났으니까요.”

이클리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으로 속삭였다.


“황후, 아니, 어머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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