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황제의 폭주
(178/199)
178화. 황제의 폭주
(178/199)
178화. 황제의 폭주
2022.09.16.
광장에서 날뛰던 반인반수들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멈칫하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져서 스스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들을 제압하던 카마리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저들이 갑자기 왜…….”
카마리에게 카힐로와 칼렌이 다가왔다.
“갑자기 후퇴하는 것 같죠?”
칼렌의 말에 카힐로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저들의 지배자가 명령을 내린 것 같은데.”
아이냑이 그들에게 다가오면서 말했고, 이사나는 눈으로 카마리의 상태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키르케, 그 여자겠지. 일단 슬슬 한계여서 다행이긴 한데, 좋은 일인지, 아닌지…….”
그때, 멀리서 황실 기사단이 이제야 몰려오고 있었다.
카마리는 굳어진 표정으로 이사나에게 외쳤다.
“다들 숨어계십시오. 들키면 귀찮아집니다.”
이사나를 포함해서 카힐로와 아이냑이 몸을 숨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마리와 칼렌의 앞으로 황실 기사들이 에워쌌다.
카마리는 싸늘한 표정으로 제 앞에 있는 단장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 와 지원군입니까?”
하지만 단장은 사무적인 어조로 짧게 답했다.
“세스가 황자 전하를 찾고 있다.”
“세스가 황자 전하를 여기서 왜 찾으십니까? 함께 도망치신 거 아니었습니까?”
카마리가 일부러 도망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자, 단장이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숨을 삼키며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카마리는 더더욱 날카로운 숨을 내뱉었다.
“하? 같이 수습하는 게 아니라, 이대로 간다고?”
칼렌도 카마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선 불만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는 정말 끝까지 제국민을 버리는 건가.
대체 곤두박질친 황실의 권위는 어떻게 수습하려는 거지?
그때, 숨어 있던 이사나가 카마리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저들이 멀리 가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머릿속엔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걸?”
“대체 왜 세스가 황자 전하를 찾는 걸까요.”
“찾는 게 아니라, 잡으려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마리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이사나는 대답 대신 갑자기 뒤돌아서서 달렸다.
“이사나 경?”
이사나는 광장 지하 수로에 숨어 있던 세스가를 찾아냈다.
뒤따라왔던 카마리는 뜻밖의 장소에 있는 세스가의 모습에 당황했다.
“화, 황자 전하. 대체 여기 왜…….”
세스가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밉지 않게 이사나를 노려봤다.
“이야, 이사나 경. 눈도 빠르네. 이왕이면 내가 여기서 나온 뒤에 좀 찾아주지. 모양 빠지게.”
“황궁에서 세스가 황자 전하를 찾고 계시던데, 왜 저들이 잡으려고 하는 겁니까?”
이사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자, 세스가도 장난기를 빼고서 말했다.
“시간의 숲이 움직인 걸 양국에서 알았어.”
그 말에 카마리와 이사나의 표정이 함께 굳어졌다.
“움직였다니…….”
카마리가 저도 모르게 되뇌자, 세스가도 복잡해진 상황에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숲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야. 열쇠가 나타났다는 의미지.”
“열쇠라면…….”
이사나는 곧장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황제는 나를 인질 삼아서 프리메를 견제하려고 들 거야. 곧 프리메에서도 날 구출하기 위해 움직일 테지.”
“프리메가 은밀히 군사적으로 움직이면…….”
카마리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세스가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지. 특히나 시간의 숲을 양국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 특히 솔라 황제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잖아? 실추된 황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의 숲을 차지하려고 할 거야.”
전쟁.
그저 내뱉는 것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이 바뀌고 있었다.
***
급하게 황궁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회의가 본궁인 여름 궁이 아닌 겨울 궁에서 이뤄진다는 전갈을 받았다.
겨울 궁 홀에는 귀족들과 신성회까지 모여 있어서 북적북적했다.
여기에 다섯 공작가인 루시아와 헤이츨도 참석해 있었다.
물론 아멜리아와 알렉드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성회의 대신관인 미야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아는 몹시 냉랭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황좌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솔라를 흔들고 있었을 줄이야.”
헤이츨은 자신이 기록한 역사를 훑어보며 무거운 숨을 쉬었다.
“이 사태가 솔라리스 밖으로 나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시간문제겠죠. 황제가 제국민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인데. 신뢰가 완전히 깨지고 말 거야.”
“헤스틴 공.”
“다섯 공작가로서 황제를 막아야죠.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런데 왜 겨울 궁일까요. 그것도 신성회와 다른 귀족들까지 죄다 불러 모아서.”
게다가 장로회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의아했다.
분명 이번 사태에 장로회가 가장 분개하고 있을 텐데 말이다.
“지난번처럼 모아놓고 사과나 해서 될 일이 아닐 텐데.”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그때,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끊기면서 아스란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스란의 뒤로 황실 기사단이 우르르 홀 안으로 몰려왔다.
귀족들은 그 모습에 불안한 표정으로 숨을 꾹 눌렀다.
루시아는 이 상황에 홀로 가장 여유롭게 황좌에 앉은 아스란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스란은 귀족들을 쭉 훑어보다가, 루시아와 헤이츨에 시선이 머물렀다.
“포르티셰 공이 보이지 않는군.”
살벌한 침묵을 아스란이 먼저 깨뜨렸다.
루시아는 경직된 표정으로 아스란의 앞으로 나섰다.
“포르티셰 공은 광장의 일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역시 포르티셰 공이군. 믿음직스러워.”
아스란의 말 같지도 않은 말에, 루시아는 자꾸만 분노가 치밀었다.
“그 수습은 폐하께서 하셔야 했습니다. 대체 바스티얀 대공 전하에 관한 건 무엇이며, 폐하께서 수인을 이용했다는 건 다 무엇입니까?”
루시아는 가까스로 감정을 고르고 골라, 아스란에게서 직접 진실을 원했다.
귀족들도 루시아의 뒤에 서서 이번 사태에 정확한 해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스란은 이토록 엄청난 사태에도 태연하게 말을 내뱉었다.
“바스티얀은 더 이상 대공이 아니다. 황실과 어떤 관련도 없는 한낱 짐승일 뿐.”
“그럼 바스티얀 대공마저 폐하를 속였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짐이 금기를 일으킨 건 사실이다.”
아무렇지 않게 나온 한마디에 귀족들은 날카로운 숨을 삼키며,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부 솔라를 위한 일이다. 이번 일에 제국민을 끌어들인 것도 아니고, 그저 수인. 그 짐승들을 이용했을 뿐인데, 대체 뭐가 잘못이지?”
“하아…….”
루시아는 적어도 아스란이 고개 숙이는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뻔뻔하게 나오는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의 숲을 차지해야 프리메에게서 이길 수 있다. 그 숲을 여는 열쇠가 특별한 수인이라면. 당연히 한 제국의 황제로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나.”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것이기에.
되도록 흘러가는 역사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던 헤이츨도 더는 참지 못하고서 앞으로 나섰다.
“폐하, 아무리 그래도 제국민 전부를 속이신 겁니다. 이건 기만입니다. 제국민들은 더는 황실을 믿지 않을 테고, 제국민이 등 돌린 제국은 역사에 남을 수 없음입니다.”
아스란은 헤이츨의 말에 싸늘한 눈초리를 띠었다.
“카르티아 공은 감히 짐을 협박하는 것인가?”
“폐하!”
“짐은 솔라를 위해 한 일이다. 짐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엄벌을 내릴 수밖에. 하지만 결국은 짐의 뜻이 옳았다고 할 것이다. 역사가 그리 기억할 거야. 왜냐면 솔라는 이제 단 하나의 태양이 되어 빛날 테니.”
“그게, 무슨…….”
“짐이 그대들을 부른 이유는 시간의 숲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헤이츨은 시간의 숲이 움직였다는 말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짐은 군대를 일으켜 시간의 숲으로 갈 것이다.”
군대라니!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귓가로 뚝, 떨어지면서 다들 현실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군대를 일으킨다는 건,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황도 제국민들이 수인 때문에 불안하다면 당분간 솔라리스를 봉쇄하고, 중앙청 기사들이 철저히 보호할 것이다.”
“중앙청 기사들이 황도 제국민을 보호하다니. 그건 감금이지 않습니까!”
루시아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언성을 높였으나, 아스란은 조소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금이라니. 짐의 이름 아래 보호하는 것이다. 곧 무장한 군대가 시간의 숲으로 향할 텐데, 짐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황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지.”
아스란은 공포에 질려 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겐 특별한 수인이자, 숲의 열쇠가 존재한다. 짐의 아들인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이 숲의 열쇠다.”
“여, 열쇠라고?”
“클리오 대공이?”
“정말로 시간의 숲을 연다는 거야?”
현실감 없던 귀족들은 열쇠라는 말에 닫혀 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짐을 믿어라. 시간의 숲은 솔라의 것이 될 테니. 솔라가 단 하나의 태양으로 이 대륙에 떠오를 것이다.”
루시아와 헤이츨은 똑같은 생각으로 표정이 굳어졌다.
전쟁이라니. 그건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열쇠가 솔라에 있다고 해도,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 그리고 그 희생은 고스란히 제국민의 몫이 될 것이다.
루시아와 헤이츨은 앞다투어 아스란 앞에 무릎 꿇었다.
“다섯 공작가로서, 헤스틴 가문과 카르티아 가문은 이번 폐하의 황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철회해주십시오.”
“지금은 제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무너진 명예를 세우셔야 합니다!”
루시아에 이어 헤이츨이 완강한 어조로 말했으나, 아스란은 냉한 표정을 띠었다.
“무너진 명예라니. 짐의 말이 곧 솔라가 가야 할 길인데. 다섯 공작가라고 하나, 감히 짐의 앞을 막는 것인가?”
“폐하!”
“그대들도 피오레 공작처럼 반역을 꿈꾸는가.”
순간, 루시아는 자신이 뭔가를 잘못 들었나, 싶었다.
“피오레 공작이, 반역이라니요?”
아스란은 서슬 퍼런 어조를 지었다.
“광장에서 루베르를 돕는 피오레 공작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루베르는 황명을 어기고, 반역을 일으킨 반군이다. 다섯 공작가에 더는 루베르는 없을 것이다. 피오레 공작가는 지금부터 황실에서 철저히 관리할 것이고, 현 피오레 공작은 체포할 것이다.”
아스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황실 기사단이 홀 안의 입구를 봉쇄했다.
“짐은 그대들의 안위도 걱정하고 있으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전부 황궁에 머물면서 황실의 보호를 받도록 하라.”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 역시 감금이다.
그것도 다섯 공작가 중 두 가문의 가주를 붙잡다니.
아스란은 지금 솔라를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 귀족들의 손과 발을 묶어두려는 속셈이다.
게다가 수도인 솔라리스를 막아버리면, 이번 사태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테니.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것도 모르는 제국민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장로회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건, 이미 황제가 손을 써둔 것이다.
‘황제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쳐버리고 말았어.’
루시아는 이를 악물고서 헤이츨에게 읊조렸다.
“아멜리아가 황제에게 붙잡혀선 절대로 안 돼요. 그렇게 되면 클리오 대공 전하의 폭주를 아무도 막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이 사실을 전해줄 방법이 없는데…….”
그때, 입구 쪽에서 사태를 살피던 황실 기사단 중 한 명이 은밀히 모습을 감췄다.
***
알렉드라 덕분에 광장에서 제국민들은 전부 피했으나, 그 피해 규모가 작지 않았다.
광장에 있었던 다른 이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일단 클로에 황후의 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저택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이클리트가 먼저 깨닫고서 아멜리아의 손을 잡았다.
“잠시.”
“왜 그러세요?”
저만치 저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황실 기사단이 저택을 뒤지고 있는 소리였다.
“샅샅이 찾아라! 피오레 공작이 없다면, 피오레 가문 사람이라도 찾아야 한다!”
“예!”
아멜리아는 저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깨닫고서 헛숨을 삼켰다.
“설마 황제가 날 찾는 걸까요?”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불안한가 봅니다. 시간의 숲을 빼앗길까 봐.”
“네?”
순간, 이클리트의 눈빛이 무섭게 변하면서 아멜리아를 품에 안으며 검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검을 막을 막아선 이는 기사였다.
“누구냐.”
이클리트의 서늘한 어조에 기사는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재빨리 검을 내렸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저는 포르티셰 공작 각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아멜리아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포르티셰 공의 명이라니?”
“클리오 대공 전하와 피오레 공작 각하를 포르티셰 공작령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들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포르티셰 공작령?”
이클리트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자, 기사는 다시금 움찔하며 말을 이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피오레 공작 각하의 체포령을 내리셨습니다.”
이클리트는 그 말에 날 선 숨을 눌렀다.
일단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포르티셰 공작령으로 움직였다.
이미 연락을 받은 알렉드라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르티셰 공…….”
알렉드라는 아멜리아를 뒤로한 채, 서늘한 표정으로 이클리트에게 다가왔다.
이클리트는 그런 알렉드라를 말없이 응시했다.
둘 사이로 괴괴한 공기가 흘렀다.
이런 신경전을 할 시간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아멜리아가 나서려는 찰나.
무려 알렉드라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클리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