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막아내는 역할 (179/199)


179화. 막아내는 역할
2022.09.19.



 
알렉드라는 이클리트에게 예를 갖춘 채, 황궁에 첩자로 숨어두었던 기사가 가져온 정보를 전부 말해주었다.

귀족들과 더불어 루시아와 헤이츨도 겨울 궁에 갇혔다는 얘기.

솔라리스 제국민들도 솔라리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얘기.

이는 황궁에서 벌어진 사건이 솔라 전역으로 퍼지는 걸 막겠다는 황제의 뜻이었다.


“군대가 곧 시간의 숲으로 향할 것입니다. 루베르와 수인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폐하의 방법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니, 막아야 할 일입니다. 이러다 전쟁이 벌어지면, 예전처럼 솔라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길 겁니다.”

알렉드라의 무거운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많이 다치는 건 위가 아닌 아래다.

제국민의 삶이 더 피폐해질 것이다.

알렉드라는 다시금 이클리트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제 나름대로 시간의 숲으로 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폐하께 아닌 건 아니라고 간언을 드려야 합니다.”

알렉드라의 말에 이클리트는 복잡한 표정을 띤 채, 아직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이 이 나라의 황자로서 판단하고 움직여도 되는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말이다.


“피오레 공은 피오레 공의 선택을 하시오. 여기도 안전하진 않겠지만, 머물 수 있게 도와주겠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편으로 움직이는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알렉드라는 마지막엔 예전처럼 싸늘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그저 빚을 갚는 것뿐이니.”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포르티셰 공.”

알렉드라는 다시 한번 이클리트에게 고개를 숙인 뒤, 걸음을 뒤로 돌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알렉드라와 이클리트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묘하게 가슴이 술렁였다.

말투는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알렉드라의 눈빛과 태도는 분명 달라졌다.

대공 전하께서 반인반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데.

이분을 대공으로 불러주고, 예우를 다했으니까.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깍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게다가 말은 같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뜻이 같아.’

아스란 황제를 막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전쟁만큼은 안 될 일이었다.

***

포르티셰 공작가의 저택으로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마미와 카마리, 카힐로가 반겨주었다.


“가주님!”

마미가 아멜리아에게 달려오자, 아멜리아는 마미를 다독이며 다들 무사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했다.

카마리는 아멜리아에게 고개 숙이며, 광장에서의 임무 보고를 했다.


“제국민들 대부분은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탈출시키셨고, 루베르와 아이냑은 이사나 경이 광장에서 데리고 빠져나갔습니다. 다들 큰 부상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다행이네요.”

“그리고 이사나 경은, 세스가 황자 전하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멜리아는 뜻밖의 말에 멈칫하다가, 이내 상황을 파악하곤 눈빛이 잘게 떨렸다.


‘시간의 숲이 움직였으니, 황제가 세스가 황자를 볼모로 잡으려고 했겠구나.’

“저기, 가주님. 케이트 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아멜리아는 케이트라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케이트가? 그럼 외조부님은? 무사하신 거지? 그렇지?”

“무사하십니다.”

그때, 아멜리아에게로 케이트가 걸어왔다.

아멜리아는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케이트! 내가 여기 온다는 걸 알았구나.”

“포르티셰 공작 각하께서 피오레 공작령에 미리 대비하라고 정보를 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공작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지민들은 다 무사하지?”

“예. 다들 의연하게 공작 각하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쪽은 걱정 마십시오. 폐하의 무리한 판단에 흔들릴 피오레가 아닙니다.”

아멜리아는 케이트의 말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외조부님께서는? 같이 오신 거 아니야?”

“솔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에, 따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보다 먼저 만나보셔야 할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

케이트와 아멜리아의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이클리트는 아이라는 말에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후, 케이트가 겁에 질린 여자 아이 한 명을 데려왔다.

아이를 보자마자 이클리트의 표정이 얼어붙으면서, 아멜리아의 앞으로 나섰다.


“저 아이는 대체 뭐지?”

“대공 전하?”

아멜리아는 갑자기 바짝 경계하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뱀의 기운이 느껴진다.”

“뱀이라니…… 그럼 수인이라고요?”

아멜리아는 굳어진 시선으로 더더욱 겁에 질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뱀이라니.

뱀의 일족은 거의 다 사라졌다고 했잖아.

케이트는 아이의 손을 조금 더 꽉 쥐고서 입을 열었다.


“전 공작 각하께서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이 아이, 키르케 동생의 아이라고.”

그 한마디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아멜리아는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여러 번 깜빡였다.


‘키르케 동생의 아이라면. 그럼 황제의 피가 섞인 반인반수라는 거잖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하지만 대체 왜 저런 아이의 모습이지?’

그 아이가 맞는다면, 이클리트와 동갑이어야 했다.

하지만 저 어린 모습은 아무리 많게 봐도 10대의 모습이었다.

이클리트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케이트의 뒤로 슬금슬금 모습을 감추고 있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케이트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아멜리아에게 건넸다.


“이것도 남기셨습니다. 가주님께 꼭 도움이 되길 바란다면서.”

“…….”

“전 공작 각하께서는 가주님이 가시는 길을 믿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가주님만의 길을, 잃지 말고 가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아멜리아는 서둘러 벨반의 편지를 펼쳤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편지를 꽉 쥐고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눈에 띄게 몸을 흠칫했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이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이게 내가 원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아멜리아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의 속삭임에 아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여전히 얼굴을 감췄다.


“내가 널 도와줄게.”

“…….”

“마미, 이 아이를 데려가서 좀 챙겨줘.”

“예? 하, 하지만…….”

마미는 뱀의 일족이라는 말에 머뭇거렸다.

분명 아멜리아의 편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괜찮아. 얼른 아이를 데려가.”

마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케이트에게서 아이를 받았다.

이클리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한 채, 아멜리아에게 읊조렸다.


“저 아이가 키르케, 그 여자를 흔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죠. 그리고 저 아이,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아멜리아는 다시금 편지에 눈을 옮겼다.

편지에는 저 아이에 대한 비밀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일이 잘 풀리면, 에드조프에게도 치명적일 테고. 일단은 키르케부터 만나야 할 텐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칼렌이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칼렌 경?”

“가주님을 뵙고자 하는 놈이 있습니다.”

“놈이라고요?”

칼렌이 데려온 자는 피오레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슈란의 동료였다.


“저자가 여긴 왜…….”

그는 아멜리아를 향해 무릎을 꿇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예전에 밀주의 본거지가 기억나면 말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기억 난 건가?”

“예전에 슈란이 스쳐 지나가듯 말한 적 있었는데, 아무래도 거기 같습니다. 솔라리스에서 멀지 않은 황실 소유 숲에 생뚱맞은 무기 공방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무기 공방?”

아멜리아는 뭔가 의심스러운 장소를 되뇌었다.

만약, 밀주가 거기서 시작된 거라면.

밀주에 지배당하고 있는 반인반수가 거기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갑자기 그걸 왜 말해주는 거지?”

이클리트가 냉랭한 어조로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가주님의 지하실에 갇혀 있을 수도 없고. 솔라에서 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데. 그건 싫습니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해도, 정당한 죗값을 받고 살아서 가족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이들조차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눈빛을 주고받고서, 시간의 숲에 관한 얘기를 입에 담았다.


“칼렌 경, 지금 모을 수 있는 블러드 아이리스는 죄다 모아줘요.”

“황궁에 있는 티어들은 전부 발이 묶여 있어서, 당장 모을 수 있는 인원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티어들은 저격수잖아요. 많은 수가 아니더라도, 실력으로 전력이 될 겁니다. 우리 티어들을 믿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공방을 폭파해서 반인반수를 해방하는 작전을 할 겁니다.”

그 공방에 정말로 반인반수들이 있다면, 세인트와 그들을 풀어줘야 했다.

설령 시간의 숲에서 황제와 더불어 에드조프와도 맞부딪힌다고 해도, 반인반수가 없어야 그 희생이 줄 테니까.


“그리고 우린 곧바로 시간의 숲으로 갑니다.”

아멜리아의 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마리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


“전쟁인 겁니까?”

“아니요. 우린 최대한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할 겁니다. 또다시 시간의 숲 때문에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면, 이번엔 정령들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애당초 시간의 숲을 봉인한 건, 정령의 경고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없어요.”

“두 번째 경고가 없다는 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아멜리아는 잠시 말을 아꼈고, 길게 말하지 않아도 카마리와 칼렌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

아멜리아의 시선이 카마리, 카힐로와 함께 있는 이클리트에게 향했다.

정령에 대한 경고는 수왕인 클로에가 말해줬다고 했다.

이클리트를 그 지하실에서 꺼내준 것도 그녀였다고.


‘서로 만나서 무슨 대화를 했을까. 그래도 친어머니와 친아들로 처음 만난 건데.’

자신이 진실을 말해주기 전부터,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더 깊이 묻지 못했다.

그때, 머릿속이 쿵 하고 울리면서 속이 이상했다.


“뭐지? 욱!”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픈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가주님?”

때마침 아이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들어온 마미가 아멜리아를 발견하고서 달려갔다.

이클리트 역시 창백해진 표정으로 곧장 그녀를 당겨 안았다.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 겁니까?”

 

 
이클리트가 두려운 시선으로 아멜리아의 심장 쪽을 살폈다.

아멜리아는 그런 이클리트를 진정시켰다.


“아니에요. 그쪽이 아니라…… 조금 피곤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정말 괜찮아요.”

“하지만!”

“정말 아니에요. 아프면 대공 전하께 내가 다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그렇죠?”

“그렇긴 한데…….”

이클리트는 여전히 불안을 떨쳐내지 못한 채, 아멜리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정말 괜찮아요. 봐요. 지금은 엄청 멀쩡하잖아요. 우리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지금 바로 공방으로 가야…….”

공방이라는 말에 이클리트는 굳어진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의자에 앉혔다.


“대공 전하?”

“당장은 안 됩니다. 지금은 쉬어야 해요.”

“하지만 쉴 틈이 어디 있어요. 지금도 황제 폐하는 움직이고 계실 텐데…….”

“당신 몸, 생각 안 하는 겁니까? 이러다가 쓰러져도 괜찮아?”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워지자, 아멜리아를 멈칫했다.


“어제 뭘 먹었죠?”

“어제는…….”

“오늘은 뭘 먹었습니까? 아니. 요즘 뭘 먹기는 하는 겁니까?”

아멜리아는 생각을 더듬으며, 저도 모르게 우물쭈물 답했다.


“그게, 계속 속이 안 좋아서…….”

“마미.”

이클리트가 마미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마미가 곧장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곧장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마미는 조급해하는 아멜리아에게 말했다.


“가주님, 일단 뭘 드시고 움직이세요. 체력이 있어야 지킬 힘도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가주님의 이런 것들을 챙겨드리는 게 의무예요. 제 의무도 생각해주세요.”

“마미…….”

“다들 제국을 구하는 그런 큰일에 신경 쓰고 계시지만, 제겐 가주님이 제국이니까.”

울컥거림을 겨우 누르고 있는 마미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마미.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어. 대공 전하께도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이클리트는 가만히 아멜리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내가 있잖아요.”

“…….”

“그대 앞에, 그대와 있잖아. 나한테 기대. 지금은, 기대도 돼.”

아멜리아는 든든하게 번지는 이클리트의 속삭임에 엷은 미소를 띠며, 이 조급한 마음과 무게를 조금 내려놓았다.

***

휴식을 취한 뒤,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그 공방이라는 곳에 당도했다.

무기 공방이라는데, 특별히 손님을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클리트는 공방 주변으로 스산하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나직이 읊조렸다.


“반인반수의 기운이 많이 느껴집니다.”

“여기가 맞긴 한 모양이네요.”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입구로 향했다.

굳게 닫혀 있는 문.

아멜리아는 장총으로 순식간에 문을 뚫어버렸다.


“그럼, 갈까요?”

이클리트는 자연스럽게 아멜리아의 뒤를 지키며, 데려온 아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

쿵-!

키르케는 온몸으로 파고드는 진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지? 누가 들어온 건가?”

사나워진 표정으로 걸음을 옮긴 키르케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코끝을 파고드는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


“……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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