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감정의 빈틈
(180/199)
180화. 감정의 빈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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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화. 감정의 빈틈
2022.09.23.
이클리트는 아이를 불편해하면서도, 보호하며 걷고 있었다.
바닥에 돌무더기가 많이 깔려있자, 아이의 발밑을 살피며 짧게 읊조렸다.
“아래, 조심.”
아이는 이클리트의 목소리에 움찔하면서도 조심조심 걸어갔다.
그러다가 공방 안이 점점 캄캄해지자, 아이의 걸음이 주춤거렸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한숨을 삼키며, 사방으로 반딧불 같은 램프를 띄웠다.
아이는 갑자기 환해진 주변에 신기해하면서도 얼른 표정을 감춘 채, 종종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아이가 발을 헛디디자 그가 곧장 손을 잡아주었다.
“조심해.”
아이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이클리트의 손을 놓으려고 했지만, 이클리트는 아이의 손을 계속 잡고서 앞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이 모습을 전부 지켜보던 아멜리아는 내내 뭔가 신기하고, 이상한 감정이 감돌았다.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네.’
대공 전하와 아이라…….
사실 막연하게 상상으로도 잘 그려지지 않았던 부분이 살짝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저분이 아빠가 되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저렇게 서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으로 아이를 지켜주지 않을까.
‘이미 저분은 저렇게 준비가 되셨어.’
그는 그때, 아이가 무섭다고 했다.
자신의 존재로 상처받을까 봐.
자신이 그 아이를 아프게 할까 봐.
너무 낯설고, 무섭다고.
하지만 결국, 그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이 천천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아이도 그러지 않을까.
예전엔 낯설었던 감정이, 이젠 그에게 익숙해져서.
그가 모르는 사이에 저렇게 자연스럽게 베풀고 있었으니까.
‘이젠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 너무 잘 해내실 텐데…….’
벅차면서도, 음울한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나와 저분의 아이. 우리, 아이…….’
이젠 그녀에게 그 단어가 낯설고 무서워서, 차마 내뱉지 못한 채 입안에서만 가득 차올랐다.
요즘 들어 자신의 몸이 새롭게 이상했다.
예전처럼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진 않았지만, 속이 시끄러웠고 뭔가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점점 더 빠르게 심장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욕심내지 말자.’
모두를 지키고, 대공 전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딱, 거기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이 허락되기를…….
‘그래. 다른 건 욕심 내지 말자.’
흔들리는 마음을 독하게 붙잡은 아멜리아는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아이를 응시했다.
과연, 저 아이로 키르케를 흔들 수 있을까.
아이는 이름을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아니, 말 자체를 하지 못했으니까.
‘저 아이도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아이 역시 생의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
***
앞장서서 걸어가던 이클리트가 낯익은 감각을 느끼며, 공방에 조그맣게 위치한 문 앞에 섰다.
이클리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뭔가 익숙한 풍경에 저도 모르게 읊조렸다.
“이 지하실, 황궁에 있는 것과 비슷하네요.”
이클리트도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같을 겁니다. 이 아래로 반인반수의 기운이 강하니까.”
이클리트가 먼저 조심스럽게 내려갔고, 아멜리아가 아이의 손을 잡고서 그 뒤를 따랐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피부에 닿는 공기가 점점 섬뜩하게 들러붙었다.
마침내 지하실에 다다른 이클리트가 캄캄한 어둠 속에 불꽃을 밝혔고, 어둠에 가려진 끔찍한 진실이 그들의 눈에 고스란히 박혔다.
아멜리아는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철창에 갇혀 있는 반인반수들.
으르렁거리면서 이성을 잃었거나, 어떤 건 인간의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기도 했다.
전부 밀주에 지배당한 채,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저 무기라는 도구로 존재하는 이들.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잔인한 광경에 아멜리아는 자꾸만 시야가 멍해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클리트 역시 무거운 숨을 꾹 눌렀다.
처음, 자신에게 늑대들을 빌려줬을 때.
이런 곳이 있겠거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한 곳이었다.
아니,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황궁의 지하실도 이런 분위기에, 이런 용도였으니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아멜리아는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 그녀의 뒤로 몸을 숨기자, 상황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에게 다가가 냉정해진 어조로 말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었잖아요? 조금이라도 이들을 빨리 구해주려고 우리가 온 거고.”
“그렇죠.”
“그러니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죠. 오히려 이런 건 빨리 없애버려야 해요.”
아멜리아는 곧장 리볼버 두 자루를 쥐고서, 마탄을 장전했다.
엄청난 위력의 불의 마탄이 리볼버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준비됐죠?”
이클리트가 아이를 조금 더 뒤로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습니다.”
아멜리아는 심호흡을 삼키고서 총구를 겨누었다.
‘작전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은 그냥 죄다.’
“부숴버려야 해.”
쾅-! 콰쾅-!
총구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지면서, 아멜리아는 이 지하실 전체를 완전히 파괴할 작정으로 마탄을 쏘아 올렸다.
철창이 형체도 남지 않을 만큼 완전히 무너지고.
반인반수들이 전부 흥분한 모습으로 뛰쳐나왔지만, 이클리트의 기운에 눌려 이들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아멜리아는 마지막으로 지하실의 벽도 손쉽게 뚫어버렸다.
아래로 내려가기에 지하실인 줄 알았더니, 뚫린 벽 너머엔 곧장 어두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클리트의 기운에 눌렸던 반인반수들은 죄다 그쪽으로 도주했고, 이클리트는 날개를 펼치고서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마을로 가지 않도록 막아보겠습니다.”
“부탁해요.”
이클리트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숲속 너머로 또 다른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티어들이 반인반수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인 듯했다.
아멜리아는 완전히 무너진 지하실을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는 여전히 아멜리아의 뒤에 꼭 숨어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제야 아이의 손을 다시금 잡았다.
“괜찮아. 저들이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준 거야. 너무 무서워하지 마.”
아이는 아멜리아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조금 더 세게 아멜리아의 손을 잡아보았다.
‘그나저나 왜 세인트가 보이지 않는 거지?’
이곳에 오면 세인트도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저들처럼 갇혀 있는 모습조차 없었다.
‘대체 세인트는 어디에…….’
“아주 제대로 일을 저질렀군.”
그때, 아멜리아를 향한 싸늘한 목소리에 그녀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키르케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 키르케.”
보자마자 시야에 선득하게 파고드는 뱀의 형상.
아멜리아는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키르케는 스르르 걸음을 옮기면서, 이곳을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처음엔 네가 나타나서 참 좋았는데. 너로 인해 에드조프가 각성하고, 이클리트가 흔들렸으니까. 두 사람의 약점이 고작 너 같은 년이라서, 이용하기 쉽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갈수록, 참 거슬려. 아니 귀찮아.”
키르케는 겁도 없이 아멜리아 혼자 있는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짓을 하고 혼자 있으면, 내가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아멜리아는 살기를 드러내는 키르케 앞에 의연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만나고 싶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마나를 좀 다루는 인간이라고 해도, 하등한 인간 따위가 수인에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키르케의 그림자에서 튀어 오른 뱀이 그대로 아멜리아를 공격하려고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멜리아의 앞으로 숨어 있던 아이가 튀어나왔다.
“안 돼!”
아멜리아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아이를 붙잡으려는 순간, 뱀이 먼저 움직임을 멈췄다.
키르케는 눈앞에 나타난 아이의 모습에 온몸이 굳어졌다.
아멜리아도 그런 키르케의 변화에 떨리는 숨을 삼켰다.
‘설마. 알아보는 건가?’
“……세실?”
아멜리아의 바람 끝에 키르케가 홀린 듯 그 이름을 읊조렸다.
저 꼬마가 세실일 리가 없는데.
그런데 마치 세실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어린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어떻게. 내 앞에…….’
설마, 갑자기 말도 안 되게 느껴졌던 세실의 기운이, 이 꼬마라는 건가?
“세실이 그쪽의 여동생인가?”
아멜리아가 한마디를 내뱉자, 키르케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날 선 감정으로 악을 질렀다.
“그 더러운 인간의 입으로 우리 세실 이름을 담지 마!”
“딸이야.”
“……뭐?”
말도 안 되는 한마디에 키르케의 눈동자가 얼어붙고 말았다.
아멜리아는 끝까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아이, 그 세실의 딸이라고.”
얼어붙었던 키르케의 이성이 서슬 퍼런 분노 앞에 쩍쩍 갈라져 갔다.
“말도 안 돼. 어디서 그런 더러운 수작을! 그 아이는 죽었어. 분명 이 손으로 뱀을 보내 죽였다고. 게다가 그 아이가 살아있어도 저런 아이의 모습일 리 없지! 감히 누굴 이딴 수법으로 속이려고 들어!”
“당신이 보낸 뱀에게 물려도 이렇게 살아남았어. 하지만 몸에 그 독한 독이 남아서, 이렇게 자라지 못하고 평생 아이의 모습에 머물러있지. 하지만 이것도 한계야. 곧, 심장이 멈출 거야.”
저년의 악랄한 혓바닥에 놀아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키르케는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왜. 왜 자꾸 발목을 붙잡는 건지!
“자라지 못하니까,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고. 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외로운 모습으로, 이 아이는 마지막까지 고통스럽게 죽을 거라고.”
벨반에게서 받은 편지에 적힌 것은 아이의 비밀이었다.
그것도 생과 관련된 비밀.
이클리트도 편지 내용을 확인하면서 아멜리아의 방법에 머뭇거렸었다.
‘키르케 그 여자가 죽이려고 했는데. 과연 마음이 움직이겠습니까?’
‘복수의 시작이 여동생 때문이라면. 조금이라도 망설일 거예요. 단 한 순간이라도 망설이면 성공이죠. 마음의 빈틈은, 그 찰나로 무너지는 거니까.’
키르케, 그녀만이라도 이 폭주를 멈추면.
조금은 피해를 줄일 테니까.
아멜리아는 가능하면 계속 막아내는 방법을 찾고 싶었으니까.
마구 흔들리던 키르케의 눈동자가 일순 멎으면서, 이내 날카로운 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그런 거에 흔들릴 것 같아서, 그 아이를 데려온 건가? 어차피 죽이려고 했던 아이. 뒤늦게 죽으면 죽는 거지. 저 아이가 살아 있어도 세실이 아니야. 세실은 죽었어. 오히려 세실이 증오하는 아이일 뿐. 끔찍한 부산물일 뿐이야!”
키르케는 애써 아이를 외면한 채, 독한 말을 쏟아냈다.
“어차피 전쟁은 벌어져. 시간의 숲을 인간이 차지하든, 누가 차지하든. 정령의 분노를 이번엔 절대 막지 못해!”
“그렇게 되면 전부 다 끝장이야. 복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겠다는 거야?”
“네년이 뭘 알아! 맞아. 반인반수를 네가 다 풀어줬다고 생각하겠지? 착각하지 마. 네가 아끼는 그 흰 녀석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
불안한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 키르케의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인트, 어디 있어.”
“더는 네가 알던 녀석이 아닐 거야. 녀석이 널 쓰러뜨릴 가장 완벽한 무기가 되겠지.”
“세인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키르케가 또다시 뱀을 풀어놓았다.
아멜리아는 키르케의 뱀을 향해 마탄을 쏘면서, 이내 키르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탕-!
예상외로 마탄이 키르케의 어깨를 쉽게 꿰뚫었다.
“읍!”
하지만 키르케는 이상할 정도로 아멜리아를 제대로 공격하지 못한 채,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안 보는 척해도, 자꾸만 그녀의 시선이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도 어느새 키르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자꾸만 세실과 겹쳐 보이는 시선 앞에, 키르케가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아멜리아!”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들리자, 키르케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아멜리아는 그런 키르케를 뒤쫓지 않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래도 조금은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아멜리아!”
어느새 아멜리아의 앞으로 달려온 이클리트가 곧장 그녀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친 곳 없어요?”
“난 괜찮아요. 반인반수들은요?”
“티어들이 제압하고 있어서, 마을로 가는 건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워낙 밀주로 오래 지배당해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계속 이렇게 막는 건 무리겠죠.”
“키르케를 만난 모양입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뜻대로 안 된 것 같고.”
“그렇긴 한데…… 어? 아이가…….”
분명 곁에 있었던 아이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