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결국, 이런 미친 짓
(181/199)
181화. 결국, 이런 미친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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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화. 결국, 이런 미친 짓
2022.09.26.
어깨가 마탄에 꿰뚫린 키르케는 미어져 나오는 신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았으면 금방 허물을 벗어서 치료하면 됐는데.
이젠 그 정도도 힘들 만큼, 그녀의 힘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그 빌어먹을 계집! 곱게 죽이지 않을 거다. 아주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럽게 죽일 테다!”
키르케는 이를 바득바득 갈고서 지금 상황을 더듬었다.
도망친 반인반수를 찾아야 하는데.
다시 그만큼 만들 시간도 부족했지만, 독도 부족했다.
만들고 있는 그 최후의 무기를 완성할 독도 부족했으니…….
“으윽!”
키르케는 이가 부서질 정도로 악물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애써 세실의 딸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때, 비틀거리는 키르케의 앞으로 에드조프가 나타났다.
에드조프는 피투성이의 키르케를 보며 눈빛이 싸늘해졌다.
다친 그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방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무기들은!”
오직 반인반수가 잘못됐을까 봐.
그것이 더 문제였다.
키르케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서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에드조프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아멜리아가 알아냈을 리 없어. 이클리트, 그 새끼가 알아낸 거지. 대체 정보가 어디서 샌 거야!”
“아무래도 한눈판 사이에 헌터들에게서 정보가 나간 모양입니다.”
“그럼 반인반수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무기도 없이 어떻게 시간의 숲으로 간다는 거야!”
에드조프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직 그 마지막 무기는 남아있는 거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른 녀석들을 만들어내면 되잖아!”
“다시 만들기엔 밀주가 부족합니다. 게다가 그 무기는. 마지막을 완성할 독이 부족하고요.”
“뭐라고?”
키르케는 하는 수 없이 에드조프에게 독이 부족한 상황을 모두 말해주었다.
“그 독은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지?”
“뱀의 일족이 필요합니다.”
에드조프는 키르케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내가 있잖아. 나도 그 빌어먹을 피가 섞였다며!”
차마 제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었으나, 키르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뱀의 힘이 약해서, 독이 없으십니다.”
“그럼 더 남아 있는 일족은 없나?”
키르케가 고개를 가로젓자, 에드조프는 잇새 사이로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럼. 이제 어쩔 셈이지?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시 무기를 내 앞에 가져와야 할 거 아니야!”
그때, 에드조프의 시선이 키르케의 어깨 너머에서 멈췄다.
“저 꼬마는 뭐야?”
그의 한마디에 키르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면서 저도 모르게 이성을 잃고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시선 앞에 세실의 딸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에드조프는 뭔가 처음 보는 키르케의 반응에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아는 꼬마인가?”
“그게!”
에드조프는 키르케를 지나쳐서는 파랗게 질린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뒷걸음질 쳤으나, 에드조프가 아이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일순, 아이가 휘청거리면서 그 바람에 얼굴의 반을 가렸던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얼핏 본 아이의 얼굴에 에드조프는 멈칫하다가 아예 아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으윽!”
“이게 뭐야.”
아이의 얼굴에 뱀의 비늘이 듬성듬성 보였다.
“뱀의 일족이 없다더니, 여기 있잖아.”
키르케는 다급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에드조프의 손을 붙잡았다.
“이, 이 아이는 뱀의 일족이 아닙니다. 반인반수입니다.”
에드조프는 계속 뭔가 이상한 키르케의 반응을 눈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독이 없다?”
“없습니다.”
“그래? 근데 왜 난 있을 것 같지?”
“대공 전하!”
“달 없는 밤이 아닌데, 이렇게 뱀의 모습을 유지하는 걸 보면 인간보단 그쪽의 피가 더 진하다는 거잖아.”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이쪽도 모르는 일이지. 그러니까 확인하는 수밖에.”
에드조프는 아이를 키르케에게 치우듯 던지며 싸늘하게 말했다.
“죽여.”
그 한마디에 키르케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대, 대공 전하…….”
키르케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죽여서 독을 한 번 뽑아봐.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 정도는 확인할 수 있잖아?”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지하실 곳곳에서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클리트가 바람을 일으켜 아이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바람에서도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대체 어디 간 거지?”
“밖으로 나가볼까요?”
이클리트의 제안에 아멜리아가 뚫린 벽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바깥에선 반인반수의 포효와 함께 여전히 밀주에 취한 그들이 날뛰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바람의 마탄을 장전하고서, 이번엔 장총을 들어 올렸다.
“일단 땅에 죄다 묻어버릴까요? 혹시라도 아이가 바깥으로 나간 거라면 더 위험할 테니까.”
아멜리아는 저들의 움직임이라도 대충 묶어보려고 했다.
“이건 내가 할게요.”
이클리트는 딛고 있는 땅을 조금씩 흔들리게 했다.
그러다가 반인반수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그곳을 그대로 무너뜨리려는 순간.
갑자기 공중에서 무언가가 툭 날아오더니, 그대로 반인반수의 머리 위로 떨어져서는 거대한 우리가 그들을 제압했다.
이클리트는 재빨리 아멜리아를 보호했고, 아멜리아는 낯익은 우리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였다.
“저건 마법 도구?”
“가주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라니와 루베르가 달려오고 있었다.
“라니…… 다들…….”
아멜리아의 앞으로 달려온 라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환하게 웃었다.
“가주님! 대공 전하! 늦어서 죄송해요.”
“어떻게, 다들…… 아니. 괜찮은 거야? 광장에서 다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멜리아가 곧장 그들을 걱정하자, 루베르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세요.”
“응?”
“언젠가, 우리의 힘을 오직 피오레를 위해 쓰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주님, 우리가 필요하면 말해주세요.’
‘비록 미흡하긴 하지만, 공작 각하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그건…….”
“루베르 가주께서는 세스가 황자 전하와 시간의 숲으로 가고 계십니다.”
그들의 말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냑과 이사나는 시간의 숲이 최후의 결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역시 수인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해선, 시간의 숲을 아스란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아니, 그 숲은 온전히 정령의 것이어야 했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다짐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주님을 돕는 것도 그 움직임에 한 부분이지요.”
“그러니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가주님을 도와서, 같이 싸우겠습니다.”
그들의 굳은 의지가 고스란히 아멜리아에게 전해졌다.
게다가 라니와의 오해도 풀린 듯, 라니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알았어. 그럼 뒤를 부탁해.”
“걱정 마세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반인반수를 이들에게 맡긴 뒤, 다시 아이를 찾아 나섰다.
“대체 어디 갔을까요? 설마 키르케가 데려갔을까요?”
이클리트는 곧장 사방으로 바람을 보내서는 키르케의 기척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느끼고선, 그대로 아멜리아를 안고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쪽입니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를 꼭 붙들고서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제발, 무사해야 하는데…….’
***
“뭐 하는 거지. 얼른 죽이라니까?”
에드조프는 자신의 명령에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붙잡고 있는 키르케를 보며 헛웃음을 띠었다.
“뭐야. 왜 죽이지 못하는 거야. 대체 그 꼬마 정체가 뭐야? 네년이랑 무슨 관계인 거야. 설마, 숨겨둔 딸이라도 되는 건가?”
“대공 전하. 사실, 이 아이는…….”
“잠깐.”
아이를 유심히 보던 에드조프의 눈매가 사납게 꿈틀거리면서, 보다 가까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겁에 질린 채, 얼굴을 감추려고 했으나 에드조프가 억지로 아이의 턱을 부서져라 움켜쥔 채, 눈을 마주했다.
“대공 전하!”
키르케가 아이를 감추려고 했지만, 에드조프는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힘을 주며, 아이의 얼굴 위로 시선을 무섭게 그어 내렸다.
그리고 점점 에드조프의 동공이 일그러졌다.
자꾸만, 누군가가 겹쳐서 떠올랐다.
“황제를. 닮았어.”
에드조프의 한마디에 키르케가 날 선 숨을 삼켰다.
“대체 이 아이 뭐야. 이 기분 나쁜 아이 누구야!”
“……세실의 딸입니다.”
“세실? 세실이라니…….”
에드조프는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설마, 황제에게 잡혔던 그…… 살아 있었다고? 죽였다며.”
“살아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살아 있었습니다.”
에드조프는 다시금 아이를 보다가 이내 입꼬리를 짙게 추켜올렸다.
“하, 하하하하하! 그래. 살아 있었다고. 원래는 네가 내 자리에 있었어야 했구나.”
아이는 어떻게든 에드조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렸다.
하지만 에드조프는 점점 더 손에 힘을 준 채, 악에 받친 어조로 외쳤다.
“원래는 네가 여기에!”
“대공 전하. 지금은 아무 상관 없는 아이입니다. 어차피 지금 죽어가고 있고…….”
“그럼 뭐가 문제야. 지금 죽이면 되겠네.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
에드조프가 아이의 목을 비틀어버릴 듯, 세게 움켜쥐자 아이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발버둥 쳤다.
“으으으윽!”
그 흔한 비명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 채.
그렇게 아이의 숨이 끊어지려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키르케의 뱀이 에드조프를 밀어냈다.
에드조프는 조소를 띠며, 제 앞을 막아선 키르케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지? 감히 날 공격한 건가? 그 아이가 아니라 나를?”
“잠깐만 기다려 달…….”
짝-!
에드조프는 키르케를 거칠게 후려쳤다.
바닥에 쓰러진 키르케가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에드조프가 다친 그녀의 어깨를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흐으윽!”
그의 손가락이 키르케의 살결을 무자비하게 파고들면서,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에 머리가 멍해졌다.
에드조프는 그런 키르케를 무심히 응시하며 선득하게 읊조렸다.
“예전에도 그랬지. 너와 난 하나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내 명령에 넌 오롯이 복종할 뿐이라고.”
“대, 대공…….”
“넌 나한테 그저 사용당하는 거야. 그놈들과 똑같은 도구일 뿐이라고. 그런데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당장 저걸 죽여. 죽이고 그 무기를 가져오란 말이야!”
키르케는 고통을 삼키며, 핏발 서린 눈동자로 에드조프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저는. 당신의 도구입니다. 그러니. 더 제대로, 사용당하겠습니다.”
그녀는 순간 독해진 눈동자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뱀이 아이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피하려고 했으나, 뱀이 아이를 휘감고서 그대로 목덜미를 물어버렸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아이를 휘감은 뱀의 몸이 사정없이 꿀렁거리면서, 뭔가를 빨아 당기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의 몸이 축 늘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뱀이 다시금 키르케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죽였다고 여긴 아이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생기가 도는 낯빛인 듯했다.
“뭐야. 왜 살아 있는 거야!”
에드조프가 아이에게 가려고 했으나, 키르케가 에드조프의 손목을 붙잡았다.
“무슨 짓이지?”
하지만 키르케는 더 세게 에드조프를 붙잡았고, 또 다른 뱀이 아이를 휘감더니 순식간에 아이와 함께 사라졌다.
키르케는 사라지는 아이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저 아이를 그녀가 살렸다.
저 아이를 해치는 독을 전부 빨아 당겼으니까.
‘그 여자라면, 살리겠지.’
아멜리아, 그년의 계획대로 왜 자신이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세실. 난 또 널 못 죽이겠어. 또, 못 죽이겠다고…….’
처음 세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을 때.
정말이지 심장이 끊어지는 고통이었다.
그런데 죽였다고 생각했던 세실의 아이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세실이 아니라고 여겨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세실과 너무 닮은 저 아이를, 또 죽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살아. 어떻게든 살았으면, 끝까지 한번 살아 봐.’
“네년이 정말 미친 거야? 뭐 하는 짓이냐고 묻잖아!”
습윤하게 흔들리던 키르케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으며, 냉한 어조를 띠었다.
“그 아이의 독은 전부 제 분신과 같은 이 사역마가 가지고 있습니다.”
에드조프는 키르케 옆에 붙어 있는 거대한 뱀을 응시했다.
“그래서?”
“이 사역마의 독을 쓰려면, 사역마와 한 몸인 저를 죽여야 합니다.”
그 말에 에드조프의 눈매가 휘늘어졌다.
“널 죽여야, 그 독을 쓸 수 있단 말이지? 뭐야. 그럼 당연히.”
에드조프는 품에 있던 단검으로 순식간에 키르케의 가슴을 찔러버렸다.
“죽어야지. 날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