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반드시, 살아남아라
(182/199)
182화. 반드시, 살아남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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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반드시, 살아남아라
2022.09.30.
망설임 없이 심장을 깨부수는 칼날.
키르케는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조프는 칼자루를 꽉 움켜쥔 채, 그대로 단검을 뽑았다.
피 묻은 칼날 아래, 그보다 더 많은 피를 쏟으며 키르케가 제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키르케의 옆에 있던 사역마의 모습도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녀의 점멸하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에드조프는 피 묻는 칼날을 무심히 털어내며 메마른 입술을 벌렸다.
“널 해치지 못할 줄 알았나? 설마 네가 날 낳아서? 너 같은 도구를 내 어미라고 여길 줄 알았어?”
“훗.”
순간, 키르케의 짧은 웃음에 에드조프가 멈칫했다.
“왜 웃지?”
“대공 전하의 입에서, 어미라는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저 또한 잊고 있었거든요. 내가 당신을 낳았다는 사실도.”
키르케의 말에 에드조프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키르케는 입가에 번진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도 낯선 단어였고,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던 말이었다.
애초에, 어머니가 되고자 하지 않았기에.
그래도 딱 하나, 바란다면.
키르케는 자꾸만 헝클어지는 호흡을 겨우 가다듬고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 듯한 말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내 복수의 완성은, 당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
“나는. 당신에게 복종하는 무기였을 뿐. 나를 휘둘러, 반드시. 반드시 황제가 되십시오.”
굳어졌던 에드조프의 동공이 잘게 떨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커졌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나?”
삶의 미련이나, 배신이나 절망 따위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 앞에 에드조프는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애초에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 손으로 세실을 죽이고, 에드조프와 이클리트의 운명을 뒤틀면서 악착같이 걸어온 이 길 끝에, 복수의 완성은 있었으나 자신이 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이 아이는 아니다.
“반드시, 원하는 걸 전부 가지셔서…… 살아남으세요.”
앞서 말하는 그녀의 복수보다, 살아남으라는 말이 에드조프의 귓가에 더 강하게 내리꽂혔다.
아무도 그에게 하지 않았던 말이니까.
감히 너 같은 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넌 가짜일 뿐이라고.
이제라도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솔라의 황제만이, 당신의 자리입니다.”
키르케는 진심으로 에드조프가 솔라의 황제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테니까. 살아, 남았으면 하니까…….’
에드조프는 외면하려고 해도 자꾸만 심장께를 건드리는 그 감정에, 잔뜩 억눌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당연하지.”
“그 사역마가. 대공 전하를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줄 겁니다.”
에드조프가 키르케를 향해 등을 보였다.
몸통이 불투명해진 뱀이 그런 에드조프에게로 스르르 다가가서는, 그에게로 스며들면서 사라졌다.
에드조프는 몹시 뜨거운 무언가가 피를 타고 빠르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뱀이 품고 있었던 독이 그에게로 전해진 듯했다.
뜨거웠던 감각은 점점 안온한 온기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양팔 가득 안아주는 것 같은 부드러운 느낌에 에드조프는 점점 눈가가 붉어졌지만, 끝내 외면한 걸음을 다시 돌리지 않았다.
그저, 이 말 한마디.
“난 반드시 솔라의 황제가 될 거다. 내가 원하는 전부를 가질 테고, 그렇게 살아남아 역사에 새겨질 테지.”
“…….”
“넌, 복수를 이루게 될 거다.”
에드조프가 키르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한마디에 키르케의 눈동자가 습윤하게 떨렸다.
‘그거면. 됐지. 그거면, 됐어.’
에드조프는 그렇게 키르케에게서 멀어졌고, 키르케는 차가운 바닥에 누운 채 하늘을 응시했다.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분하거나, 비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가진 전부를, 저 아이에게 주었어. 그걸로 충분하지.’
그래. 정말로 충분했고, 묘하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체 뭘까, 이 느낌은.
이 이상한 감정은.
설마 한순간.
‘나는 어미였나.’
키르케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마지막 눈꺼풀을 내려놓으려는 찰나.
갑자기 온몸으로 오싹한 기분이 파고들면서, 키르케가 번쩍 눈을 떴다.
태초부터 너무 당연했다는 듯, 자신을 지배했던 자.
그녀의 시선 끝에 클로에가 서 있었다.
“……수왕, 폐하…….”
클로에는 다 죽어가는 키르케를 무심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아가. 너희 뱀의 일족은 끝까지 비극을 자초하는구나.”
한껏 긴장했던 키르케는 풀어진 입매로 속삭였다.
“폐하의 짓입니까? 세실의 그 딸. 그 딸을 찾아오신 분이. 생각해보니, 아멜리아 그 계집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 아이를 구한 것만으로는 네 죄가 사라지지 않을 거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 복수는, 아직 끝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어느새 키르케는 표정 가득 조소를 짓고서 클로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썩, 행복한 마지막은 아니시겠지요. 나만큼. 아스란 그놈도 꼭, 비참하게 죽을 테고.”
키르케의 비아냥에 클로에의 미간이 어두운 그림자를 이뤘다.
“폐하께서도, 폐하가 원하시는 걸 위해 움직였듯,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도, 제 선택은 같을 테니까.”
“…….”
“정말 거짓말처럼, 괜찮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키르케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클로에는 그런 키르케에게 다가와서 차마 감지 못한 눈을 감겨주었다.
사실 클로에로서도 키르케가 마지막에 에드조프를 위한 선택을 할 줄 몰랐다.
“키르케만 죽으면, 전부 해결될 줄 알았는데. 결국 그 마지막 독이 에드조프에게 넘어가다니.”
키르케가 만들고 있었던 그 최후의 무기는 결국 완성될 것이고, 그로 인해 피오레 공작은 또 힘들어질 것이다.
정말로 모든 걸 다 잃은 에드조프는 이제 끝까지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진짜에 얽매이지 말고. 이 저주받은 이 황실에도 연연하지 않은 채, 이제라도 자유롭게 살아.’
“그 충고는 결국 닿지 못한 채 바스러지겠군.”
이미 없어진 남의 증오로 인해, 자신의 삶을 망치지 않길 바랐는데.
모두가 무사하길 바라는 건 이제 욕심이 된 듯했다.
에드조프와 이클리트.
두 아이는 마지막에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클로에는 시간의 숲이 보이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공기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인간의 군대가 몰려가고 있으니, 정령의 마지막 경고가 세상을 한 번 흔들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키르케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짧게 읊조렸다.
“나도 너와 같은 선택을 할지도.”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는 키르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날아가던 이클리트가 멈칫하더니 이내 지상으로 내려왔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땅으로 내려온 아멜리아가 걱정스럽게 이클리트를 바라보자, 이클리트는 그녀를 안은 손에 여전히 힘을 준 채,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뭔가가 옵니다.”
“예?”
이클리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더니 거대한 뱀이 아이를 물고 있었다.
“지금 무슨!”
아멜리아는 뱀이 아이를 공격한 줄 알고,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곧장 장총을 장전했다. 하지만 뱀은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물고 있던 아이를 놓아주고서 그대로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미동 없는 아이의 모습에 다급하게 달려왔다.
아이는 제자리에서 두 뺨 가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클리트의 눈동자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어디 다친 거니? 많이 아파? 설마 키르케, 아니. 조금 전에 봤던 여자가 널 데려간 거야? 대체 너한테 뭐라고 한 거야?”
아멜리아는 일단 겉으로는 다친 곳이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몰라서 아이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아이를 다독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이상했다.
‘데려갔다면 납치인데. 왜 뱀이 다시 데려온 거지?’
“주, 죽어가요…….”
순간, 아이의 한마디에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동시에 놀랐다.
“너, 지금 말을…….”
아이는 작은 손으로 아멜리아를 잡아당기면서 마침내 제대로 말을 내뱉었다.
“사, 살려주세요. 우리 엄마, 아니에요? 제발, 살려 주세요…….”
엄마라니. 설마 키르케를 말하는 건가?
살려달라는 건, 도대체…….
이클리트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서 키르케의 기척이 느껴진 방향으로 바람을 보냈다.
그곳에서 여전히 그녀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키르케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요?”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키르케가 있는 방향으로 다시 달려가자, 이미 숨을 거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키르케를 보다가 다시금 아이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혈색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게다가 말을 하는 걸 보면.
‘키르케가 결국, 이 아이를 살린 건가.’
이클리트는 죽은 키르케를 살피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아멜리아는 아이를 잠시 홀로 남겨 두고서, 이클리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정말로 죽은 건가요?”
“칼이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대체 누가…….”
“바람에 또 다른 뱀이 섞여 있습니다.”
또 다른 뱀이라는 말에 아멜리아는 날카로운 숨을 내뱉었다.
“에드조프…….”
이클리트는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에드조프는 제 안에 사역마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공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음산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시커먼 어둠 속, 퍼렇게 감도는 안광만을 빛내며 갇혀 있는 낯익은 반인반수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세인트였다.
하지만 에드조프가 알고 있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이 거대한 동굴 전체가 가득 찰 만큼, 압도적인 몸집이 보였다.
에드조프는 이 어마어마한 기운에 압도당한 채, 헛숨을 내쉬었다.
“이거 뭐야. 정말 그 녀석 맞는 거야?”
그가 천천히 한 발자국을 내딛자, 갑자기 세인트가 반응해서는 그대로 철창에 몸을 부딪쳤다.
쿵-!
주변의 공기가 흔들릴 만큼, 엄청난 진동과 함께 살을 파고드는 살기가 뼛속까지 느껴졌다.
“크으으으윽!”
완전히 이성을 잃은 눈동자엔 오직 피를 갈구하는 광기만이 전부였다.
처음엔 멈칫했던 에드조프도 점점 입꼬리를 비릿하게 추켜올렸다.
“네가 이렇게 변했구나. 그래. 이런 널 휘두르면, 아멜리아가 많이 아파할까. 다시 날 증오할까. 오롯이 날 향한 그 시커먼 감정을 원해.”
에드조프는 세인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에게 스몄던 사역마가 세인트를 휘감으며 마지막 독을 주입했다.
역할을 다한 키르케의 사역마가 완전히 사라지고, 에드조프는 한 줌의 연기로 사라지는 그 모습에 살짝 이를 악물고서 숨을 삼켰다.
마침내 온전히 에드조프의 손안에 들어온 세인트가 자신을 막고 있던 철창을 부순 채, 그의 앞에 몸을 엎드렸다.
에드조프는 그런 세인트 위로 가볍게 올라타고선 나직이 읊조렸다.
“가자, 시간의 숲으로. 누군가의 무덤이 될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