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나를 변하게 한 것
(185/199)
185화. 나를 변하게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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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나를 변하게 한 것
2022.10.10.
이미 서로의 방아쇠가 당겨진 상황에서 평화롭게 전쟁을 막기는 틀렸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온몸으로 총알을 막아내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아멜리아는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그런 이클리트와 달리, 이미 결정을 내린 알렉드라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비정했다.
하지만 알렉드라로서도 엄청난 각오이자, 결단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반인반수인 이클리트를, 가장 유력한 차기 황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미래를 걸어보려고 하는 것이니까.
이클리트 역시 그런 알렉드라의 무거운 의지를 읽고선, 어쩌면 이미 결론에 당도했으면서.
차마 망설이며 마침표를 찍지 못했던 선택에 끝을 내렸다.
이클리트는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알렉드라와 그 뒤에 있는 카마리를 비롯해 다른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단 하나다. 평범하게 사는 것.”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소박하면서도 가장 절실한 욕심에 심장이 저릿했다.
“남들이 우러러보고, 대단하게 여기는 그런 특별한 단 하나의 태양 같은 건, 관심 없다. 내게 특별하고 중요한 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단 하나를 지켜내는 것이니.”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말고 다른 이에게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이 모습이 여전히 너무 낯설고, 두렵고, 무서웠지만.
더는 피하지 않았다.
행여 항상 진심이 억눌러 있었기에, 어설픈 말에 이 진심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봐.
이클리트는 한마디, 한마디를 최선을 다해 고르고 고르며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치로 힘을 주었다.
“나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이의 웃음이 그친 절망과도 같은 세상을 살고 싶지 않기에. 그래서 지키고 싶다. 평범하게.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고자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면 기꺼이.”
모두를 응시하던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한순간 오롯이 아멜리아를 향했다.
“결사 항전하여 지켜내고 싶다.”
그 강하고 뜨거운 결연함 앞에 아릿하던 아멜리아의 심장도 쿵 소리를 내며 거세게 뛰어올랐다.
‘그래. 싸워야 한다면, 이젠 망설이지 말아야 해. 지키고 싶으니까. 정말로 간절히, 지키고 싶으니까.’
알렉드라는 이클리트의 결정을 받드는 의미로 자신의 세이버를 이클리트 앞에 꽂고서, 기사로서 무릎을 꿇고 고개 숙였다.
그러자 지켜보던 기사들도 알렉드라의 뒤로 맹약의 예를 갖췄다.
“클리오 대공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이클리트를 보면서, 아멜리아는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다 괜찮아.’
그는 스스로 황제의 길을 택했다.
예전처럼 그녀가 원해서 그 길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저들을 지키고자.
루베르와 반인반수와 수인과 제국민을 정말로 지키고 싶어서.
황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
아멜리아와 이클리트가 단둘이 서로 마주했다.
오늘 밤은 달 없는 밤, 가장 어두운 밤이 시작될 테고, 이들은 아스란을 막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갑옷을 제대로 입혀주고서, 이번엔 목검이 아닌 진검에 간절한 바람을 담아 입을 맞췄다.
“부디 제 바람이 이 검에 제대로 깃들기를. 한쪽 날은 적을 베고, 한쪽 날은 대공 전하를 지켜주며, 승리로 이끌기를…….”
“내겐 그대가 준 쪽지도 있으니까. 그대의 수호가 항상 나와 함께할 겁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클리트는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멜리아를 다독였다.
아멜리아 역시 불안감을 지워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런 결정하실 줄 몰랐어요.”
이클리트는 상체를 그녀 쪽으로 숙이면서, 시선을 가만히 마주했다.
“날 변하게 한 건 그대입니다.”
“…….”
“그대가 소중해진 만큼, 다른 이들도 소중해졌으니까. 또 그들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으니까.”
“대공 전하…….”
“그것들이 망가지고, 부서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다면, 지켜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당신이 내게 가르쳐주고 채워줬잖아요.”
“내가 너무 무리하게 한 건 아니겠죠?”
“전혀. 나는 바뀐 내가 좋습니다. 정말로, 좋아요.”
그냥 둘러대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편안해 보이는 표정에 아멜리아 역시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젠 정말로 자신이 사라져도, 이분은 괜찮을 거라고.
물론 많이 아플 테지만, 그런 이분이 그대로 쓰러지지 않게 위로해주고 일으켜줄 사람이 생겼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괜찮을 거야.’
“더는 외롭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외로움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이젠 정말 그렇게 됐어요.”
이클리트는 칼자루를 움켜쥔 손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더는 외로워지기 싫어서, 정말로 지키기 위해 싸울 겁니다.”
“나도 당신을 지킬게요. 나와 당신이 함께,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이클리트와 잠시 멀어진 아멜리아는 그녀 역시 티어의 제복을 갖춰 입고서, 어머니의 은빛 총을 허리춤에 채웠다.
그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칼렌이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가주님, 준비됐습니다.”
“그래.”
아멜리아는 묵직한 숨을 깊이 삼키고서, 두근거리는 심장을 강하게 붙들었다.
이제부터 그녀는 티어들 앞에 출정식을 해야 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있는 이들에게,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도 가주가 해야 할 의무였다.
그녀는 허리와 발끝에 힘을 준 채, 티어들 앞에 완강한 표정으로 섰다. 그리고 피오레의 장총을 들고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져버린 태양을 아쉬워 말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여 새로운 태양을 뜨게 할 테니. 새로운 태양이 우리의 승리를 오직 영광으로 비출 것이다.”
이건 피오레 가주로서 해야 할 말.
그리고 이건.
“부디 다들 무사히. 무사히 내일 다시 만나자.”
함께하는 동료로서 가장 간곡한 바람이었다.
“예, 가주님!”
“존명!”
“존명!”
마침내 달 없는 밤은 찾아오고, 이들은 이 어둠을 제대로 밝혀줄 태양을 찾고자 그렇게 움직였다.
***
숲의 경계 밖에서 이클리트와 아멜리아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이 짙은 밤에도 뿌연 안개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자, 살짝 신기한 눈빛을 지었다.
“이 안개 너머가 시간의 숲인가요?”
“그럴 겁니다. 저도 들어보기만 했을 뿐, 이렇게 가까이 와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긴장이 느껴졌다.
하긴, 그는 기분이 남다를 것이다.
시간의 숲과 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악연과도 같은 끈으로 얽혀 있으니.
‘이분이 열쇠라면, 대체 어떻게 시간의 숲을 열 수 있다는 걸까?’
하지만 뭔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오싹해져서 아멜리아는 더 깊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열쇠가 되는 일은 없을 거니까. 이 숲은 열리면 안 되는 거니까.’
“이쪽으로 들어가면 숲의 경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간의 숲 근처로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경계 안에서 아스란은 진지를 치고 있었다.
일단 이들 전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양쪽으로 아스란의 진지로 좁혀들어 황제군을 제압할 작정이었다.
황제군을 얼추 제압하면, 알렉드라가 다섯 공작가의 대표로서 전하지 못한 간언을 아스란에게 올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간언이 틀어지게 되면, 이클리트가 앞서서 아스란을 무력으로 제압해야 했다.
그렇게 아스란을 솔라리스로 데려가서, 다섯 공작가와 함께 심판을 걸쳐야 하니까.
이미 아스란이 지은 죄가 크기에, 신성회와 장로회까지 합심한다면 황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진 않을 것이다.
프리메와의 관계는 이후 세스가 황자와 다시 얘기할 작정이었다.
물론 아멜리아는 알렉드라의 간언이 아스란에게 통하길 간절히 바랐다.
‘이게 실패하면, 황제군과 부딪히면서 반드시 피를 보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아멜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스란 폐하를 직접 손으로 끌어내리고, 심판을 받게 되면. 자칫, 제국을 혼란스럽게 만든 죄가 가중되어 단두대에 오를 수도 있어요.”
이클리트는 아멜리아의 말뜻을 꿰뚫었다.
아무리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이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혈육이다.
그런 혈육을 그의 손으로 끌어내어,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부,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클리트의 결단에 아멜리아 역시 더는 묻지 않았다.
‘아스란 황제의 죄가 심판받게 되면, 에드조프의 죄 또한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돼. 함께 추락하겠지.’
차라리 그렇게 함께 죗값을 받게 하는 게 제일 좋았지만, 문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에드조프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게다가 키르케가 말한 세인트의 행방은 대체…….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손을 잡고서 그대로 숲의 경계로 들어가려는 찰나, 뜻밖의 존재가 그들 앞을 막았다.
“화, 황후 폐하…….”
아멜리아의 떨리는 목소리 끝에 클로에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황후가 아닌 수인, 아니 수왕 클로에였다.
이클리트는 순식간에 표정이 경직되면서, 아멜리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클로에는 어쩐지 두려움 섞인 시선을 감추며, 이클리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준비됐니? 이쪽으로 들어가면 온전한 정령의 땅인 숲의 영역이다. 돌이킬 수 없게 돼.”
“그 준비는, 저만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클로에의 알 수 없는 질문을 마치 다 아는 듯 답하는 이클리트의 모습에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에 대한 준비라는 거죠?”
하지만 클로에는 오직 이클리트만을 응시했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상황이 바뀌다니…….”
이클리트의 불안한 속삭임 끝에 클로에는 이제야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수왕이 아닌 다른 눈빛을 띠었다.
“조금 더 곁에서 버텨달라고. 그 부탁을 너무나도 잘 들어줬는데, 내가 정말 미안해요. 더 힘들게 만들어서.”
“네?”
이클리트는 금방이라도 아멜리아를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전부 제가. 제가 감당하기로 했잖……!”
쿵-!
그때, 땅이 무너지듯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다.
그토록 세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의 손아귀의 힘이 제멋대로 풀리면서 아멜리아를 놓치고 말았다.
“아멜리아!”
아멜리아도 곧장 이클리트의 손을 다시 잡으려고 했으나,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더니, 온몸이 굳어진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지?’
이클리트도 아멜리아를 따라서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무심히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클리트는 그녀의 녹안을 보자마자 사나워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누구냐.”
그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움찔했다.
‘누구냐니. 나잖아. 저예요. 뭐야. 왜, 왜 말이 안 나와? 갑자기 내 몸이 왜…….’
“열쇠가 도착했구나. 하지만 여기서 열리면, 숲이 다시 더럽혀진다.”
그때, 너무나도 낯선 목소리가 아멜리아의 잇새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녀는 피가 차게 식으면서 떨리는 숨을 삼켰다.
‘뭔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어…….’
뭔가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와서는, 아멜리아를 대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