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시작된 경고 (186/199)


186화. 시작된 경고
2022.10.14.



“열쇠가 도착했구나. 하지만 여기서 열리면, 숲이 다시 더럽혀진다.”

아멜리아의 입을 빌린 목소리가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아스란은 하늘에 떠 있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그 옆에 까맣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이클리트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드디어 녀석이 이곳으로 왔구나. 나의 열쇠가 왔어.” 

프리메 군사들도 열쇠가 도착했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허공에 떠 있는 여자를 주시했다.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열쇠라니.”

“대체 저 여자는 누구지?”

“저 여자가 열쇠인가?”

아멜리아를 알아본 세스가의 눈빛이 굳어졌다.


‘피오레 공작이 대체 왜…….’

 


“가, 가주님…….”

카마리와 칼렌은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심지어 다른 쪽 숲의 경계에 있던 이사나와 아이냑, 다른 루베르도 이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아멜리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뭔가 묘하게 이질적이라는 걸 느꼈다.


‘가주님이 말씀하시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령의 목소리다.”

그때, 이사나의 곁으로 소냐가 걸어왔다.

이사나는 소냐의 한마디에 흠칫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정령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소냐는 아련한 시선으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다고 여겼는데, 이 자가 전 국왕 폐하의 아들이었다니.

하필이면 이런 순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소냐는 그리움과 반가움을 뒤로 한 채,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마지막 경고다.”

다른 루베르도 소냐의 말을 듣고선 두려워진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경고라면, 정령이 이미 깨어났다는 겁니까?”

“열쇠가 가까워졌으니, 그들은 이미 깨어났지. 그래서 마지막 경고를 하는 거다. 숲을 다시금 더럽힌다면, 이제 두 번의 경고는 없을 것이라고.”

소냐는 아멜리아와 함께 있는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더없이 안타까운 시선을 띠었다.


“가주님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거다.”

결국은 저 두 사람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이다.

지난날, 수왕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마도 대공 전하는 그 길을 가게 되겠지.’

 

***



“열쇠는 인간과 수인의 사랑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 열쇠가 만들어지면, 두 종족이 화합하게 될 거라 여겼는데. 우리가 미련하고 어리석었다.”

아멜리아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 이제야 깨달았다.


‘내 몸에 정령이 들어온 거야.’

게다가 이들이 하는 말이 너무나도 의미심장하여, 자꾸만 섬뜩한 오한이 서렸다.


“그렇기에, 열쇠의 시작이자 끝인 이 여자를 우린 없앨 것이다. 열쇠가, 열쇠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하도록.”

아멜리아가 아닌 이의 말을 듣고 있던 이클리트는 아멜리아를 해치겠다는 말에 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지고 말았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그녀를 해한다는 거지? 정령이든, 태양신이든,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해.”

이클리트의 검은 날개가 점점 거대해지면서, 그의 눈동자가 피에 잠긴 듯, 섬뜩하게 변했다.

그가 분노하면 분노할수록, 하늘 위로 음습한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며, 천지가 뒤틀리며 굉음을 토해냈다.

아멜리아는 정령들의 속삭임에 이클리트가 열쇠가 된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텅 빈 달을 남기니, 반드시 해를 피워라.

찬란한 태양이 달을 비춰, 달 없는 밤을 깨우리라.

그리하면 정령이 춤추며 반드시 숲이 열리리라.-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 남겼던 문구.

그 문구의 진정한 의미 역시 알 것 같았다.


‘태양은 인간, 달은 수인. 태양이 텅 빈 달을 비춰, 어둠을 깨운다는 건. 대공 전하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채워진 거구나. 열쇠가 된 거야.’

열쇠의 시작이자 끝이 자신이라면.


‘정령은 나를 없애서, 대공 전하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는 거야.’

그렇게 되면 시간의 숲은 영원히 봉인될 테니까.


‘안 돼. 제발 그만둬…… 저분을 더는 아프게 하지 마. 더는 상처 입히지 말라고!’

그 순간, 정령이 아닌 또 다른 목소리가 아멜리아에게 닿았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버텨줘요.-

  


‘황후, 폐하?’

또 한 번 버텨달라니. 대체 무슨 의미지?

하지만 정령에게 애원하고 싶어도.

대공 전하께 그러지 말라고 외치고 싶어도.

여전히 목소리는 빼앗겼고,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점점 시커먼 어둠에 먹히듯, 변해가는 이클리트의 모습을 괴롭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 여자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굳이 우리가 크게 손 될 필요도 없겠군.”

갑자기 아멜리아의 가슴에 피어 있던 제비꽃이 가시 꽃으로 변해서는 가시덤불로 실체가 되어 아멜리아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날카로운 가시가 그녀의 하얀 살결을 찢고, 박히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눈물 같은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서서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목소리가 떨렸다.


“안 돼…… 그러지 마. 그녀를 다치게 하지 마. 그녀를 아프게 하지 마!”

 

 
이클리트가 손을 뻗어 아멜리아를 붙잡고자 했다.

하지만 거대한 바람이 칼날이 되어 이클리트를 후려쳤다.

그런데도 이클리트는 물러서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더더욱 손을 뻗었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어느새 그의 몸도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아멜리아만이 전부였다.

그녀의 상처가 그의 상처였고, 그녀의 고통이 그의 고통의 전부였다.

정령은 결국, 아멜리아를 시간의 숲 너머 안개 속으로 끌고 갔다.


“안 돼! 기다려!”

이클리트가 곧장 그녀를 쫓아갔으나, 순식간에 눈앞에서 아멜리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시선으로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이내 점점 숨 쉴 수 없는 분노가 그를 내리눌렀다.


“아멜리아!”

잇새 사이로 억눌린 그녀의 이름 하나가 어둠 속에 바스러지며, 이내 메마른 그의 웃음이 주변을 폐허로 만들었다.


“정령, 너희가 이 세상을 그런 식으로 지키고자 한다면. 나는 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이클리트는 온몸으로 시간의 숲을 뒤덮고 있던 안개를 깨부수고서 순식간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깨부순 안개의 잔해가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사방으로 깔리더니, 또 한 번의 지진과 함께 지형이 거대한 미로가 되어 숲의 경계에 있던 모두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

지진과 촘촘하게 깔린 안개 때문에 아스란과 황제군도 혼란 속에 흩어지고 말았다.

에리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서, 아스란을 지키며 나머지 황제군에게 외쳤다.


“지금부터 무조건 황제 폐하를 보호해야 한다!”

“예!”

“대체 이게 무슨…….”

에리얼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스란은 이러다가 프리메에게 선수를 빼앗길까 봐,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어쩌면 이 안개, 시간의 숲이 열린 걸지도 몰라. 그 녀석이 그 계집을 구하고자 자신도 모르게 열쇠의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고.’

혹여 프리메에게 빼앗길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시간의 숲을 먼저 차지해야 했다.

그는 상황을 살피고자 하는 황제군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뭐 하고 있는 것이냐. 정신 차리고, 시간의 숲 방향을 먼저 파악해. 우리가 먼저 숲으로 간다.”

“숲으로 가다니요, 폐하. 이 상황에서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큰일이 날지 모릅니다.”

확신할 수 없었으나,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은 정령이 벌인 일일인지도 모른다고 에리얼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령의 분노를 사서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아스란은 황명을 꺾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으면서, 겁에 질려 멈칫하다가 숲을 빼앗기면? 그렇다면 여기 있는 네놈들 전부 내 손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폐하…….”

“당장 움직여.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의 숲을 가져야겠으니까.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아스란의 불같은 황명에 기사들은 횃불을 들고서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횃불에도 안개가 워낙 두터워서, 빛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한 채, 괴괴한 적막과 어둠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스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기사들도 허공을 휘휘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선두에 선 기사가 걸음을 멈칫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바로 뒤에 있던 기사가 긴장한 어조로 묻자, 괜스레 횃불을 흔들면서 말했다.


“뭔가 앞에 있는 것 같은데?”

“뭐가 있다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아니야. 뭐가 있어.”

기사는 다른 손에 칼자루를 쥐고서 조금 더 횃불을 흔들었다.


“저기 봐. 뭔가가 움직이는…… 악!”

“폐하!”

기사의 비명에 에리얼이 곧장 아스란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스란은 굳어진 표정으로 눈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을 응시했다.

갑자기 땅에서 뭔가 붉은빛을 띠는 식물 줄기가 뻗어 나와서는 기사를 옥죄며, 숨통을 끊어놓고 있었다.

분명 겉보기엔 식물인데,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는 게 보기에도 징그럽고 끔찍했다.


“저, 저게 대체 뭐야…….”

기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런데 이쪽뿐만 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사람의 비명이 들리고 있었다.

***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 식충 식물에 사람들이 붙잡히거나, 잡아먹히면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사나는 장총으로, 루베르, 아이냑은 검으로 이것들을 베어내면서 루베르를 구하고 있었지만, 끝도 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이사나는 블러드 아이리스로 지내면서, 별별 곳을 다 돌아다녀봤지만, 이렇게 사람 잡아먹는 식물은 처음이었다.


“대체 이 괴물 같은 건 뭐야.”

“사령초, 페스티스다.”

소냐의 말에 이사나는 굳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령초?”

소냐는 그녀답지 않게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시간의 숲을 차지하고자 여기서 숱한 전쟁이 벌어졌고, 수많은 인간이 죽었다. 그 증오와 욕망의 시체를 양분 삼아 태어난 것이 저 사령초, 페스티스지. 인간들 때문에 태어났으니, 당연히 인간을 다시 탐할 수밖에.”

“하. 그런 것도 있었나? 난 처음 보는데.”

“정령들이 풀어놓은 거다.”

“이게 말로 듣던 그 경고입니까?”

“이건 시작에 불과해.”

“이게 시작이라니. 본편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네요?”

괜스레 웃으며 말해봤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특히, 마지막에 안개 속으로 끌려갔던 아멜리아의 모습과 역시나 함께 사라진 이클리트의 모습이 이사나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가주님이 잘못되시면. 정령이 아니라 대공 전하 때문에 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령이 바라는 게 그건가?

그때, 또 한 번 지진이 크게 일어나면서 소냐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소냐 님!”

가까이에 있던 이사나가 소냐를 밀쳤으나, 쏟아지는 토사에 그는 그대로 휘말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아이냑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전하, 전하!”

 

***



“폐, 폐하. 일단 여기서 피하셔야 합니다!”

에리얼은 아스란을 먼저 보호하고자 했으나, 아스란은 이를 악물고서, 기사들을 사지로 내몰고선 다시금 숲을 향해 달렸다.


‘갑자기 저런 괴물 같은 것들이 나타나다니. 자꾸 뭐가 이렇게 방해하는 거야!’

 
쿵-!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진에 지반이 약해지면서, 땅이 갈라졌다.

뒤에서 에리얼이 아스란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앞으로 계속 가시면 위험하십니다. 일단 전력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기다리다가 빼앗기면. 내 것을 빼앗기면!”

“폐하, 폐하!”

아스란은 광분한 시선으로 걱정하는 에리얼을 뒤로 한 채, 계속해서 숲을 향해 달렸다.

가까운 듯, 좁혀지지 않은 채.

숲의 모습이 환상처럼 아스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분명 숲이 열렸어. 열린 거야. 내가 먼저 가야 해. 반드시 내가 먼저 차지해야!’

불현듯,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아스란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란은 헛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고작, 이런 거로 내가 포기할 것 같으냐? 내 주변 전부를 없앤다고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아? 나는 어리석고 나약한 그놈과 달라. 내게 중요한 건 오직 나 자신뿐이야. 그러니 짐이 가질 것이다, 이 숲을. 그 힘을. 온전히 빛나는 단 하나의 태양이 될 것이야!”

전부를 가져야, 그 전부에 원하는 단 하나도 얻을 수 있을 테니!

그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아스란의 눈앞으로 숲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안개에 가려졌던 시간의 숲이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것.

그는 잠시 멍하니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내 동공에 희열이 감돌면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숲이. 열렸어. 그래. 열쇠가 통한 거야. 그런 거였어. 숲이, 숲이 나를 선택한 거야! 나를!”

멈칫했던 걸음이 점점 빨라지면서, 그대로 숲으로 뛰어들려는 찰나,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클로에가 거대한 날개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스란은 클로에의 모습에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다가, 이내 비릿한 냉소를 지었다.


“왜 또 나타난 거지? 숲이 내 앞에서 열리니까, 두려워진 건가? 그대도 봤겠지. 숲이 날 택한 것을!”

클로에는 섬뜩하리만큼 싸늘한 표정으로 여전히 걸음을 비켜주지 않았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것은 시간의 숲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아스란의 눈먼 광기를 막으며 읊조렸다.


“이제, 그만해. 제발 지금이라도 멈춰, 아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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