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187/199)


187화. 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2022.10.17.



 


“이제, 그만해.”

클로에는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아스란을 막아섰다.


“시간의 숲이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건, 시간이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것처럼. 그 숲도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욕심내어 탐할수록, 세상의 규칙이 무너진다고. 그러니, 제발 지금이라도 그만둬.”

이제 와 그만두라는 클로에의 말에 아스란은 비릿한 냉소를 그렸다.


“고작 그런 틀에 박힌 말로 날 막겠다고? 왜. 숲이 날 택해서 화난 건가? 내가 저 숲을 차지할까 봐? 그대가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당신 눈에 보이는 저건 숲이 아니야. 환각이다.”

클로에의 등 뒤로, 아스란의 눈엔 숲이 열린 것처럼 보였으나, 서슬 퍼런 바람만이 괴괴하게 맴도는 절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정령이 당신에게만 환각을 보여주고 있는 거야. 멈추지 않으면, 당신은 나락으로 추락할 거야.”

아스란은 클로에의 말에 다시 한번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눈에 나락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간절히 바라던 숲이 그를 이끌고 있을 뿐.

하지만 설령 클로에의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멈출 수는 없었다.


‘숲을 차지하거나,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지.’

가장 높은 곳을 탐한 자가 결국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면, 추락 말고는 다른 길은 없었으니.

클로에는 어쩐지 그 속이 훤히 읽히는 듯한 아스란의 표정에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때문에 이클리트가 괴로워하고 있어. 그래도 당신과 나의 아이인데. 지금까지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그 아이를 고통스럽게 했잖아.”

“…….”

“태어난 순간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아이에게 이제 겨우 생긴 단 하나를 잃게 할 수는 없어.”

“갑자기 어머니라도 되겠다고? 그래서 나보고 아버지가 되라고?”

아스란은 헛숨을 내쉬며 싸늘한 눈빛으로 클로에를 노려보았다.


“그대도 나와 똑같잖아. 나처럼 저 숲 때문에 날 만난 거잖아. 날 이용했다며. 날 이용해서 그 아일 가졌다며. 마치 날 사랑이라도 해서 우리가 평범한 부부처럼. 어미와 아비가 된 것처럼. 그 아이를 가진 것처럼 말하지 마!”

아스란은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미어져 나오면서, 자꾸만 다른 시선으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그런 말을 이제 와 한들 무슨 소용이지?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어. 그대가 알잖아. 그대의 뒤가 벼랑 끝이라며. 그 몇 마디로 멈추기엔 끝까지 와버렸다고! 이클리트, 그 녀석이 날 아버지로 인정할까? 그댈 어머니로 인정할 것 같아?”

아스란의 날 선 말이 클로에의 심장이 깊이 박혀 들면서, 결국 가까스로 쥐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 역시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는 정말로 끝까지 욕심을 부렸구나. 그때도, 지금도. 이 남자 앞에 나는 자꾸만 약해져서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자꾸만 쥐려고 했구나.’

무언가를 놓아버린 클로에의 손아귀로 뭔가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스란도 그 뭔가를 보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럼 난 끝까지 그대를 막겠다. 수왕으로서, 그리고 마지막 그 아이를 위한 속죄로써.”

클로에는 검을 빼 들었다.

날카롭고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검이 잔뜩 벼리어진 채, 아스란을 향해 망설임 없이 이를 드러냈다.

그 모습에 아스란도 클로에를 향해 검을 들었다.


“그대 역시 내 목숨을 취해서라도 저 숲을 원하는군.”

황제도 정식 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지켜야 하기에 검술을 배웠다.

특히 아스란은 자신이 직접 전쟁터에 나갔던 경험이 있는 만큼, 역대 황제 중에서도 검술이 빼어났다.


“차라리 이게 나아. 한때는 그대에게 이용당하고, 휘말리며 미친놈이 된 적도 있었지만, 이젠 아니야.”

아스란은 칼자루를 더욱더 세게 쥐며, 자기 자신을 향해 조금이라도 흔들릴 빈틈이 없도록, 꽉꽉 눌러 말했다.


“이용당하지 않아. 더는 그댈 사랑했던 마음도 없어.”

클로에 역시 얼어붙은 눈동자로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마지막으로 내뱉었다.


“그렇다면 마음껏 휘둘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그댈 죽일 테니.”

 
쿵-!

클로에가 굉음을 내며 검을 휘둘렀고, 아스란은 곧장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하지만 엄청난 힘이 격동하면서, 아스란은 절로 온몸을 떨었다.

가까이에서 제대로 맞부딪혀보니, 더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알던, 과거의 그녀가 아니라고.

아스란은 그 사실에 또 한 번 심장이 철렁이면서, 힘을 주어 검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검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허공을 찢고, 가르며 팽팽한 공기를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검과 검이 부딪힐수록, 두 사람의 거리가 물리적으로나마 가까워지고 있었다.

클로에의 정체가 드러나고, 아스란이 배신당했다고 여긴 이후, 단 한 번도 이 정도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챙-!

검날이 뒤엉키며, 그 너머로 클로에와 아스란의 눈동자가 뒤엉켰다.

내뱉는 호흡이 느껴질 만큼.

서로의 눈동자에서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아스란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쓴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가까워지는군.”

“헛소리.”

차가운 한마디가 스쳤으나, 아스란은 클로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토록 흔들리지 못하게 꽉꽉 매어둔 틈이 헐거워지면서, 심장이 저릿하게 꿈틀거렸다.

지금 그의 눈앞에 여인은, 그때의 여인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 제 시야를 사로잡고, 매혹해 지금에 이르게 했던 그 여인.

이런 말도 안 되는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반응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자신에게 독약과도 같은 여인.


‘미쳤군.’

한껏 이를 악물고서 칼자루에 힘을 주려는 찰나, 아스란의 동공이 멈칫했다.

기분 탓인가.

클로에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힘을 주려고 악다문 입술 역시 묘하게 떨림이 느껴졌다.

어쩐지 뭔가를 꾹꾹 누르면서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지 않았다.

그래, 낯설지 않을 수밖에.


‘지금 당신의 모습과 내가 같을까. 하지만 왜?’

그 생각이 들자마자, 칼자루를 쥔 그의 손아귀에서 자꾸만 힘이 빠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 배신당했다는 감정에 빠져서 제대로 듣질 못했는데.

굳이.
 


‘그대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날 택할 수 있어? 황제가, 수인을 황후로 삼을 수 있냔 말이다.’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그건, 진심으로 했던 질문이었나.’

클로에는 갑자기 검에 힘이 빠진 것을 느끼곤,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제대로 검을 들어. 감히 나와 검을 겨누고 있으면서 방심하는 것이냐!”

클로에의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면서, 그녀의 투명한 검날이 제대로 아스란의 팔을 스치며 날에 피가 맺혀 흘렀다.

아스란은 순간 튀어 오르는 신음을 삼키며,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나선 거대한 날개를 드러낸 클로에를 응시했다.

그녀는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아스란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말했지. 난 그대를 죽일 수 있다고.”

공기에 뒤섞인 힘의 차이가 제대로 느껴졌다.

아스란은 그녀의 말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다는 걸 느끼며, 떨리는 숨을 삼켰다.


‘수왕과 인간. 그 힘의 차이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지. 죽일 거였다면, 진작 죽였어야지.’

그대도 나도, 더는 헛된 희망을 붙들고 있어선 안 되지.

아스란은 목소리에 한껏 칼을 품고서 읊조렸다.


“난 그댈 죽이지 않아.”

“뭐?”

“난 애당초 그댈 살려서 내 곁에 둘 생각이었으니까.”

아스란은 입꼬리를 길게 추켜올리며, 눈동자를 더욱 번뜩였다.


“내가 저 숲을 가져서, 이 대륙의 단 하나의 태양이 되면. 그댈 박제라도 해서 곁에 둘 거야. 그게 그대에게 하는 내 복수이자, 그렇게라도 해서 널 가지면 되잖아.”

“아스란…….”

“난 내 모든 지위를 버리지 않아. 오히려 다 가지면 되잖아. 다 가져서 더 강해지면, 그댈 가질 수 있잖아. 황제가 수인을 황후로 삼는다고 내게 손가락질하지 못하게. 누구도 그댈 가진다고 뭐라고 하지 못하게. 처음부터 그걸 위해 더 강한 황제가 되고자 했으니까!”

클로에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지금 그는, 그때 자신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 아무 소용없는, 무의미한 답을.


“그러니 그대가 날 멈추게 하고 싶다면, 반드시 날 죽여야 해.”

아스란이 다시금 검을 들었고, 클로에 역시 맞서 싸웠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의 힘의 균형이 팽팽했다.

아스란은 조금씩, 환각으로 만들어진 숲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클로에는 그렇게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아스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거긴 숲이 아니라고 했잖아. 거기로 가면 죽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날 죽인다고. 죽여야 끝난다고.”

그때, 아스란이 맨손으로 클로에의 칼날을 움켜쥐었다.

클로에는 그 모습에 흠칫하면서 검을 빼려고 했지만, 아스란의 손바닥에 칼날이 더 박히기만 했다.


“뭐 하는 거야.”

아스란은 헐떡이는 숨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절대 여기서 멈추지 못해. 갖고 싶으니까…….”

“하아…….”

“그대가 바라는 대로, 마음이 강한 황제가 되질 못했으니까. 저걸 가져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고 싶은 것을. 잃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내가 이토록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어.”

“아스란…….”

“하지만 그대는, 이 숲이 지켜지길 바라니까. 이 숲을 탐하고자 하는 내가, 사라져야지.”

바들거리는 그의 손가락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여기서 이 검을 놓치면, 그는 그대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순간, 뜻밖의 말이 클로에의 귓가에 읊조려졌다.


“정말로 날, 사랑한 적 없었나?”

그때도 물었던 말.

이번에도 클로에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란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때는 분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진심을.

흔들리는 눈가에 자꾸만 서리는 저 알 수 없는 물기가 눈에 보였으니.


“내가 수왕인 그대의 약점이었군. 그대를 자꾸만 약하게 만드는. 그래서 더더욱, 나는 없어져야 하는군.”

클로에는 단 한마디도, 아니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가 없었다.

입 밖으로 뭔가를 내뱉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나약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강한 힘에 집착할 테고. 그대는 그런 나로 인해 계속 흔들릴 테니…….”

아스란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듣지 못 할 말을 속삭였다.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제대로 강한 황제가 되지 못해서…….’

“하…….”

클로에가 잡을 새도 없이, 그는 검날을 쥐고 있던 손을 그대로 놓은 채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녀는 그제야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약하게 만들었던 말을 외쳤다.


“아스란…… 아스란!”

클로에도 함께 절벽으로 몸을 날렸다.

겨우 눌렀던 이름을 내뱉고 나니,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당신을, 사랑만 하고 싶었다.’

이 마음이 문제이자, 죄의 시작이었다.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숲을 다시 되돌리고자, 정말로 지쳐서 쓰러졌을 때.

아스란을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부러 그를 만나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네가 너무 어여뻐서. 아니, 그게 아니라······.’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던 인간의 사내가 예쁘다는 말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신기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수왕이었던 그녀는 수인들의 지배자로서, 누구도 그녀의 앞에서 그런 날 것의 표정을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까.

결국, 첫눈에 사로잡혔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처가 깊어 보이시는데, 일단 저와 가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잡았던 손이 너무 따뜻해서.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댔던 순간이라.

부부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수왕의 의무를 잊고, 아이를 가지고 행복에 들떴는데.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있을 수도 없는 마음을 품어서, 그 나약한 마음이 죄가 되고 말았다.

그는 힘에 대한 욕망과 갈망에 사로잡혀 뒤틀렸고, 그런 그를 돌이켜보려고 하다가 결국, 다른 이들까지 괴롭게 만들고 말았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만들어진 관계였으니.

진짜가 되고자 하니, 균열이 일어나 무너질 수밖에.


‘나와 그의 욕심에 세실을. 키르케를. 이클리트를. 에드조프를.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다.’

절벽 아래, 클로에는 날개를 접고서 발을 디뎠다.

차가운 바닥에 이미 숨을 거둔 아스란의 뜨거운 피가 그녀의 맨발에 닿아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아스란에게 다가가서는 그제야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러니 이런 결말은 차마 슬퍼하지도 말아야 할 속죄였다.

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클로에는 고이기만 했던 눈물을 조심스럽게 떨구며 고개 숙였다.


“나는 끝까지 내 의무를 다하고, 나 또한 죗값을 받도록 할 것이다. 이제 전부 다, 내가 마무리할 테니…….”

잘 가, 아스란.

우린 다음 생에도 절대. 절대 만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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