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188/199)
188화.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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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화.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
2022.10.21.
알렉드라는 하늘에 떠올랐던 아멜리아와 이클리트의 모습에 표정이 굳어졌다.
게다가 분명 아멜리아의 목소리지만, 아멜리아가 아닌 말까지…….
‘아무래도 계획했던 작전은 실패할 것 같군.’
그는 곧장 냉정을 되찾고서, 하늘에 시선을 빼앗긴 기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정신 차리고, 우리라도 먼저 황제의 진지로 진입해야 한다.”
알렉드라는 기사들의 사기를 다시 한번 제대로 다잡았다.
“다들 저 광경에 넋이 나가 있을 테니, 우린 이걸 노려야 한다. 숲의 경계 안으로 진격한다!”
그의 힘 있는 목소리에 기사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서 칼자루를 다시 고쳐 쥐었다.
“예, 가주님!”
하지만 숲의 경계에 진입하자마자, 지진과 함께 자욱한 안개에 그들의 발이 완전히 묶여버리고 말았다.
알렉드라는 캄캄해진 사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식물이 깨어나 기사들을 공격하자, 먼저 세이버를 들고서 선두에 섰다.
“다들 물러서지 마라! 절대로 여기서 무너져선 안 돼!”
하지만 시야 확보가 안 되는 상황에서, 정보가 전혀 없는 저런 괴물과 계속해서 싸우다 보니 힘에 밀리기 시작했다.
알렉드라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황제군과 제대로 맞서보기도 전에 아까운 목숨이 희생당할 것이다.’
전쟁에서 죽는 건 기사들에게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인 자신이 그런 나약한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까지 선두에서 지켜내야만 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예, 가주!”
알렉드라는 한쪽 팔이 부상당했기에, 다른 팔로 누구보다 세이버를 강하게 휘두르며, 지친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지휘관이 먼저 힘든 모습을 보이는 건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 알렉드라의 기세에, 지쳤던 기사들도 다시금 사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알렉드라의 발밑이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치솟은 식물이 알렉드라의 몸을 죄었다.
“가주님!”
“가까이 오지 마! 대형 유지해!”
알렉드라는 기사들이 괜히 휘말릴까 봐, 밀어내고서 알아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한쪽 팔에 힘을 주지 못하니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젠장!’
게다가 대체 어떻게 되먹은 괴물인지, 다친 팔을 귀신같이 알고서는 그쪽만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 팔을 내어주면 빠져나올 수는 있겠군.’
알렉드라는 심호흡을 하고서, 세이버를 쥐고 식물에 붙잡힌 팔 한쪽을 잘라내려는 순간.
펑-!
‘뭐지?’
갑자기 폭약처럼 뭔가가 터지면서,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빛 때문에 그토록 날뛰던 식물들이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빛이 어찌나 강렬한지,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이들의 눈도 멀어버릴 것 같았다.
알렉드라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서 빛이 멎길 기다렸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알렉드라와 기사들은 곧장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알렉드라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너희는…….”
그들 앞에 나타난 이들은 바로 루베르였다.
루베르의 선홍빛 눈동자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용기 내어 불투명한 수정을 알렉드라에게 보였다.
“저것들은 사령초 페스티스라고, 이 광물이 만들어내는 빛을 싫어합니다. 이게 이 주변에 널려 있는 거라서, 이렇게 사방을 더 캄캄하게 해두는 겁니다.”
“…….”
“저희가 마법 도구로 이 빛을 더 증폭시킬 겁니다. 그러니 대공 전하께서는 어서 가셔서 피오레 공작 각하를 도와주십시오.”
알렉드라는 이들의 말에 멈칫했다.
“……도와주는 건가? 왜? 나는 너희를…….”
“여기선 서로 돕고 도와야죠. 살아서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좀처럼 쉽지 않은 생각이다.
자신은 루베르를 배척했고, 이들을 포르티셰 영지에 가두기도했다.
저주받은 이방인.
끔찍한 선홍빛 눈동자.
그들과 자신들은 전혀 다르다고, 항상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이걸 던지면 빛이 증폭될 겁니다.”
“정확히 그놈을 향해서 던지십시오.”
“부디 무사히 빠져나가십시오.”
기사들과 루베르가 섞이니, 이들도 똑같았다.
그저 생김새만 다를 뿐.
똑같이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내일과 태양 또한 자신들과 같았다.
그때, 미처 파악 못 한 페스티스가 순식간에 루베르를 덮쳤다.
“악!”
다른 기사가 나설 새도 없이, 알렉드라의 날 선 검이 페스티스의 머리를 정확히 베어내며 루베르를 지켰다.
루베르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크게 뜨고서 입술을 달싹였다.
“고, 고맙습니다. 대공 전하…….”
알렉드라는 무심히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같이 여기서 나가도록 하지.”
“예? 하, 하지만…….”
“피오레 공작에게 같이 가도록 해. 같이. 이 순간을 극복해야 하니. 같이, 내일을 맞이해야 하니까.”
알렉드라는 입안이 썼다.
자신이 그 여자, 아니 피오레 공작과 같은 얘기를 하게 될 줄이야.
하긴. 클리오 대공을 택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인정한 것이다.
자신이 틀렸다고.
‘내가, 틀렸었다고.’
***
“일어나. 일어나라고. 뭐 하는 거야. 제발. 일어나라니까!”
이사나는 무의식중에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마구 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엔 잡음처럼 들리던 목소리가 점점 절박하고, 절실하게 심장 위로 쿵쿵 내려앉았다.
이토록 자신을 걱정해서 죽을 것 같은 목소리는 오랜만이었다.
그래, 아바마마와 형님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이사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나직이 곡선을 그렸다.
‘빨리, 보고 싶네…….’
이사나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면서 일어나라고 마구 외치고 있는 카마리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지진에 휘말려서 순간 기절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필이면 그녀의 앞인 걸까?
“이사나 경! 이사나 경! 눈 좀 뜨라고, 이사나 경!”
거의 가슴뼈가 부서질 정도로 누르고 있는 카마리의 모습에 이사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카, 카마리 경. 그렇게 누르면 멀쩡한 사람도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은데요?”
카마리는 그제야 눈을 번쩍 뜨고서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이사나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제대로 움직이는 그를 보고서야 떨리는 숨을 삼키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하. 역시 약해빠져서는.”
말은 그렇게 날카롭게 내뱉어도, 그녀의 눈가에 뭔가가 반짝이는 것까지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이사나도 너무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러곤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하하. 미안해요. 진짜 내가 너무 약했네. 고작 이런 지진에 정신을 잃어버리고.”
그는 제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카마리에게 조금 시간을 주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카마리 경은 괜찮아요? 아니 그보단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왜 여기 있는 거고, 여긴 어디예요?”
감정을 수습한 카마리도 평소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 역시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 알지 못했으니까.
“갑자기 나도 동료들과 헤어져서 여기로 쓸려온 겁니다. 그러다가 당신이 내 앞에 떨어진 거고. 살릴 운명이었던 건지.”
카마리가 마지막 말을 혼잣말처럼 읊조렸고, 이사나 역시 그 끝말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게. 왜 하필 이 앞일까. 아니면, 꼭 이 앞이어야 했던 걸까.’
“일단 여기서 좀 나가죠.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연락이 가능해요?”
이사나의 말에 카마리는 칼렌 경이나 다른 티어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보내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모습에 카마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다들 주변에 없는 것 같은데…….”
주변에 없는 건 상관없었지만, 부디 다들 무사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쪽도 가주님이랑 대공 전하를 봤습니까?”
카마리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고,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근방은 다 봤을 겁니다. 그 목소리도. 정령이 일부러 들려준 걸 테니까.”
“정령…….”
이사나는 카마리에게 사령초 페스티스에 대해서도 전부 말해주었다.
이 모든 건 정령의 마지막 경고라는 사실을.
하지만 카마리는 이사나의 말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그걸 막으려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다만 걱정되는 건.
“가주님은 괜찮으시겠죠?”
“대공 전하께서 어떻게든 혼자 두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 반드시 같이 계셔야 해요. 같이 있지 않아도 이쪽은 곤란하니까.”
사실 이사나는 폭주하는 이클리트가 더 무서웠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건 오직 아멜리아, 그녀뿐이었으니까.
그 순간, 또다시 땅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곧장 단검을 쥐고서 카마리의 가까이에 붙었다.
“어째 조용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페스티스가 땅에서 마구 치솟으면서, 바로 그들을 공격했다.
이사나는 단검으로 겨우 막았으나, 카마리는 페스티스를 타고 오르며 몸통을 찌르고, 베면서 아주 날아다니면서 제압했다.
“그 조그만 거로 뭘 막겠습니까?”
“하하하하. 저격수는 이럴 때 참 곤란하네.”
카마리는 페스티스의 머리를 과감하게 찌르고서 땅으로 내려왔다.
“이거 때문에 피해가 더 큽니다. 이걸 없앨 방법은 없는 겁니까?”
“글쎄요. 사람의 욕망을 먹고 자란다는데, 지금 주변에 욕망이 차고 넘치니.”
또다시 땅에서 좀비처럼 이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한두 개가 아닌 여럿이 나와서는 그대로 덩굴을 휘둘렀다.
카마리와 이사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이사나는 이번엔 제대로 장총을 잡고서, 카마리 뒤에 붙었다.
“이번에도 지켜줄까요?”
“이번엔 내가 꼭 카마리 경 지켜줘야지.”
“발목이나 잡지 마십시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맞대고서 페스티스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이사나도 최대한 빠르게 마탄을 장전하여 싸워봤지만, 끝도 없이 나타나는 이들을 감당하기엔 그의 마나도 점점 한계에 치달았다.
‘하, 진짜 곤란하긴 하네.’
그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이사나는 본능적으로 카마리를 확 끌어안았다.
카마리는 순식간에 파고든 그의 체향에 움찔했다.
이사나는 카마리를 안은 손에 힘을 꽉 주고서 고개를 들었다.
시야를 방해하는 빛이 사라지자, 그 많던 페스티스들도 전부 쓰러져 있었다.
“이것들이 어떻게…….”
카마리가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할 때, 이사나는 다른 의미로 온몸이 굳어졌다.
“……페르소?”
그답지 않게 잔뜩 떨리고 있는 목소리에 카마리가 고개를 들자, 저 멀리 신비롭게 생긴 새하얀 말 한 마리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뭐지?’
그때, 이사나가 카마리를 뒤로한 채, 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페르소 맞지? 그렇지?”
그제야 말이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선 이사나와 마주했다.
카마리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수인인 건가? 하지만 이사나 경은 수인에게 여전히 증오가…….’
하지만 카마리는 움찔했다.
사람으로 변한 말을 보자마자 이사나의 눈가로 주체하지 못할 굵은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사나 경…….’
“루비엔 왕자님. 너무 늦게 와서, 그때 끝까지 곁에 있어 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는 지난날, 이사나에게 처음으로 승마를 가르쳐주었던.
그의 오랜 친구이자, 이사나의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못한 채, 수인들과 함께 떠났었던 말의 일족 수인, 페르소였다.
“왕자님, 이제라도 왕자님을 제가 지킬 수 있게…….”
하지만 말을 맺기도 전에, 이사나가 그대로 페르소를 꽉 끌어안았다.
그는 마치 그날 그때로 돌아간 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페르소에게 읊조렸다.
“다행이야. 무사해서, 정말로 다행이야. 하아…… 페르소. 너무 보고 싶었어. 네가, 정말로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페르소는 자신을 꽉 안아주는 이사나의 모습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면서, 함께 안아주었다.
카마리는 그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인에게 분노하던 그가.
어쩐지 이젠 그런 복수심도, 증오도 사라진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카마리는 마음이 울컥하면서 묘한 안도가 생겼다.
‘지금 이사나 경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잘못 뒤틀린 감정 때문이 아니구나.’
정말로 루베르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