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하지 말았어야 할 고백 (189/199)


189화. 하지 말았어야 할 고백
2022.10.24.



“이제 왕자님 곁에 계속 있을 겁니다. 무슨 일이든, 도울 수 있게 해주세요.”

이사나는 너무 오랜만에 듣는 왕자라는 호칭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페르소, 이제 나 왕자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루비엔 아니 이사나라고 불러. 오히려 그 호칭, 조금 듣기 이상하니까.”

“왕자님…….”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아까 그 빛은 뭐였지?”

이사나가 애써 말을 돌렸고, 페르소는 굳이 깊게 묻지 않았다.

사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저것들은 이 광물로 물리칠 수 있지만, 완전한 해결은 아닙니다. 저것들의 모체가 있습니다.”

카마리도 어느새 페르소의 곁으로 다가왔다.


“모체를 없애야, 저것들을 완전히 해치울 수 있다는 거군.”

“모체가 어디 있는지 제가 압니다.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끝까지 도와드릴게요.”

이사나는 페르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카마리와 함께 페르소의 등에 올라탔다.

순간,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페르소가 달렸다.

카마리는 이토록 빠른 말은 처음이었기에 절로 몸이 움찔했고, 이사나는 그런 카마리의 손을 꽉 잡아주며 든든하게 지켜주었다.

카마리는 그런 이사나의 온기에 절로 떨리는 숨을 눌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페르소의 걸음이 멈췄고, 스산한 안개 너머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는 모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여러 시신을 얽혀놓은 것처럼 기괴한 모습을 띠고 있었는데,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결이 얼어붙을 것처럼 오한이 서리게 했다.


“저 모체를 죽이려면, 모체 깊숙이 자리한 보라색 심장을 파괴해야 합니다.”

페르소의 말에 이사나는 헛숨을 삼켰다.


“이야…… 우리가 심장 가까이 가도록 순순히 허락해줄 비주얼이 아닌데?”

카마리는 곧장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들어가서 해결해야죠.”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겁 없이 뛰어 들어갈 것 같은 카마리를 붙들었다.


“직접 들어가는 건 위험해요.”

“그럼 내가 저것들 주의를 끌어볼 테니까, 이사나 경이 심장을 저격하도록 해요.”

하지만 이사나는 이 방법도 마음에 안 들었다.


“카마리 경 혼자 가까이 가는 건 반대입니다.”

카마리는 그런 이사나의 손을 풀었다.


“내가 이사나 경보다 강한 거 잊은 겁니까? 게다가 전투 포지션이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근거리. 이사나 경은 원거리. 대신, 잘하십시오. 한 번에 명중.”

그가 더 말릴 새도 없이, 카마리가 순식간에 달려갔고, 걱정하는 이사나에게 페르소가 말했다.


“제가 저 기사분을 서포트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페르소가 카마리의 곁에 붙어서는 모체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몹시 마음이 불안했지만, 이성을 꽉 붙잡고서 재빨리 장총을 장전했다.


‘그래. 맡은 역할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

사실 지금 그가 만들 수 있는 마탄은 겨우 두 발.

이 이상은 한계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목표점을 정확히 보고, 실수 없이 심장을 저격해야 했다.


‘생각보다 너무 깊이 있는데?’

집중하고 또 집중했지만, 페르소가 말한 심장이 너무 깊숙한 곳에 있어서 자꾸만 조준점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흐읍!”

짧게 흩어지는 카마리의 비명에 이사나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한 가시 섞인 줄기가 정확히 카마리의 어깨를 꿰뚫은 것이었다.

칼자루를 놓쳐버린 카마리가 피로 흥건해진 어깨를 떨면서 신음을 삼켰다.

페르소가 카마리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그 역시 발목이 묶인 상태였다.

또 다른 줄기가 이번엔 카마리의 심장을 노리려는 순간.

탕-!

이사나의 한 발이 분노를 싣고서, 주변을 불살라버렸다.

그는 곧장 카마리에게 달려와서는 떨리는 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어깨를 더듬었다.

카마리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 정도는 괜찮…….”

“괜찮긴 뭐가 괜찮아!”

순간, 머릿속까지 울리는 이사나의 격한 감정 앞에 카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이사나 경…….”

그는 그제야 어쩌지 못하는 숨을 누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이게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 어깨. 어깨가…… 당신 기사잖아. 이러다가 다시 검을 못 잡게 되면…….”

좀처럼 진정하지 못한 채, 이사나는 그녀의 어깨를 손대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카마리는 그 모습에 자꾸만 심장이 다른 쪽으로 철렁였다.


‘지금 이 모습이 단지 그냥 걱정, 이라고?’

결국, 카마리가 이사나의 손을 붙잡고서 눈을 마주했다.


“다친 건 납니다. 왜 당신이 패닉이 되는 거야.”

“…….”

“이 걱정, 너무 과한 걱정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잘못 보는 겁니까? 내가 너무 간절하게 바라서 그냥 걱정이 아니길 바라서, 그렇게 느끼는 거냐고.”

역시나 둘러 가지 않고 돌직구로 부딪히는 카마리를 보면서, 이사나는 대답 대신 장총을 더 깊이 움켜쥔 채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포지션, 바꿔요. 카마리 경이 원거리 하십시오. 내가 근거리 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기다렸던 차례인 것 같거든요.”

뭔가 의미심장한 말에 카마리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하는 겁니까? 이사나 경이 가주님도 아니고 어떻게 근거리 공격을 한다는 거야!”

이사나는 멀리서 시선을 끌고 있는 페르소와 눈빛을 주고받으며 녀석의 심장을 응시했다.


“녀석의 심장, 칼로는 벨 수 없을 겁니다. 마탄 정도의 마나가 필요하겠죠. 정확하게 꿰뚫어서, 심장과 함께 모체를 완전히 태워버릴 겁니다. 나의 주 속성 마탄이 불이니까, 가능할 거예요. 문제는.”

이사나는 가장 큰 문제를 너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마탄이 마지막 한 발이라는 겁니다. 물론 원거리에 강한 저격수지만, 그래도 확실히 가까운 거리에서 저격하는 게 실패 확률이 낮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때, 페르소가 이사나에게로 달려와서는 등을 내주었다.

이사나는 마지막으로 카마리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내가 목표지점 가까이 가도록 하겠습니다. 뒤에서 날 서포트해줘요.”

하지만 카마리가 곧장 그를 붙잡았다.


“지금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그래서 성공하면. 어떻게 나올 겁니까? 불의 마탄이라며. 죄다 태워버릴 거라며. 마탄의 위력을 내가 아는데. 같이 죽을 작정입니까? 당신이야말로 뭐가 괜찮다는 거야!”

순간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카마리의 눈앞에 까맣게 일그러지면서 곧장 내뱉었다.


“하지 마.”

“카마리 경.”

“내가 다시 시선 끌 테니까.”

“그 어깨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카마리 경이 더 위험해진다고!”

“내 걱정 하지 마.”

카마리는 냉랭한 시선으로 이사나를 밀쳤다.


“우린 적이라며. 이렇게 걱정하고 지킬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럼 카마리 경은 나 왜 지켜주는 거예요? 지금 왜 이렇게 걱정해요?”

“나는 그냥 내가 미쳐서 그런 겁니다.”

뜻밖의 말에 이사나의 동공이 점점 부풀어졌다.


“아무리 접으려고 해도 잘 안 접어져서. 이 마음이, 내 멋대로 움직이는 거지만 이사나 경은 아니잖아. 아니니까…….”

“나도 그래요.”

순간, 터지듯 내뱉어지는 진심에 카마리의 눈동자가 크게 동요했다.


“나도 미쳤나 보네.”

계속해서 숨기고만 있었던 마음을, 이사나는 무서우리만큼 차분하게 속삭였다.


“처음엔 복수였습니다. 그거마저 하지 않으면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결국, 복수의 상대가 잘못된 거고. 이젠 복수가 아니라 지켜야 할 것, 해결해야 할 것이 명확해졌어요. 내가. 틀렸던 겁니다.”

뭔가 무섭게 다가오는 진심에 카마리의 호흡이 점점 더 떨려왔다.


“사실은 피오레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면 너무 미안해서.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어서.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를 자꾸 흔들었던 건 아멜리아였다.

자신이 할 수 없었던 걸, 아멜리아는 제대로 해내는 모습이 대단하면서도, 보기가 힘들었으니까.


‘형님이 바라던 이상을, 가주님은 해내셨지.’

루베르와 솔라 제국민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것.

거기에 수인과 반인반수까지 하나가 되는 것.

희생 위에 쓰이는 평화가 아닌 화합에 의한 평화 말이다.

한때는 그녀에 대한 경외가 사랑과 헷갈렸지만, 이젠 아니었다.


“루베르에서 도망친 이후, 행복해지지 말아야지. 나는 그럴 자격 없으니까. 철저히 이사나라는 이름으로 감추고 살아야지. 절대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안 된다고. 더 웃음으로 감추고, 좋은 사람으로 숨겼는데.”

카마리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단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말을 이어가는 이사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와는 달리 너무 솔직하게 달려오는 당신이 싫었습니다. 자꾸 끊임없이 거슬렸고, 신경 쓰이게 하고. 감춰둔 내 모습이 자꾸만 나와 버려서…… 맞아요. 나도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이사나 경…….”

“나도 카마리 경과 같아요. 당신이 다치는 게 싫고, 지켜주고 싶습니다. 매번 놀라울 정도로 내게 부딪혀오는 당신을. 지금도 이렇게 제일 솔직한 당신을. 좋아합니다.”

“…….”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이제 말한 것도 미안하고. 그리고 용서해줘요. 말하지 말았어야 했거든, 끝까지.”

이제야 고백했으면서.

이사나는 이 행복한 순간에 더 무거운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잘못에 대해 속죄를 해야 합니다. 이사나에서 루비엔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루베르의 피의 희생을 내가 끝내겠다고 각오했어요. 아버지와 형님의 희생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또 다른 희생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까. 이제라도 루베르가, 평범하게 살길 바랍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계속 함께 하고 싶어질 테니까.

하지만 이사나는 카마리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등을 돌리고서 페르소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흔들리던 카마리의 눈빛이 싸늘해지면서 선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개소리.”

카마리는 순식간에 이사나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었다.


“카, 카마리 경?”

“개수작 하지 마.”

생각지도 못한 험한 말에 이사나와 페르소 역시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카마리는 분노하며 외쳤다.


“고백을 유언으로 하는 놈이 어디 있어. 이제야 겨우 좋아한다는 말 들었는데. 내가 죽게 내버려둘 것 같아? 그건 내가 절대 허락 못 한다고!”

카마리는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였다.

그래서 언제나 사랑이 고팠기에, 누가 칭찬하거나 조금만 도와주고 친절해도 그 감정의 온도에 취해서 기뻐하고 사랑하고 말았다.

사람에게 버려졌으나, 그래도 사람이 좋아서.

어떻게 보면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것이, 그녀에겐 가여운 병이었다.

이사나에게도 처음엔 그랬다.

평소처럼 금방 빠졌으니, 금방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이 남자는 자신과 비슷했다.


‘너도 나처럼 사랑이 그립구나. 사람이, 그립구나…….’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항상 한 발자국 물러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보고 또 보다가, 보고 싶어졌고 정말로, 좋아하게 됐다.


“카마리 경…….”

어깨를 꽉 붙들던 카마리가 그대로 이사나를 꽉 끌어안았다.


“죄책감 가지지 마. 당신도 그땐 어렸어. 감당하기 어렸다고. 그냥 그 상황이 무섭고 겁이 났던 건데…….”

처음으로 카마리가 그의 과거에 대해서 슬쩍 말을 얹었다.

이사나는 그런 카마리의 속삭임에 왠지 모를 감정이 치솟으며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루베르를 저버리고, 비겁하게 도망친 건 변하지 않으니까…….”

“당신의 아버지도, 형도. 당신이 희생해서 그 죄책감을 덜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 어떻게든 살길 바라겠지. 살아서 루베르를 끝까지 지켜주길 바라겠지.”

카마리는 조금이라도 그를 놓칠세라, 어깨가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날 좋아한다면서. 지켜주고 싶다면서. 그럼 살아서 내 옆에 있어.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옆에서 날 지켜주라고!”

 

 
또다시, 그녀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런데 이사나는 이번엔 제대로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카마리 경이 울면 내가 너무 신경 쓰이는데. 항상 당당한 카마리 경이 좋으니까.”

“자꾸 그렇게 대책 없이 좋다는 말 하지 마십시오. 자꾸 심장이 멋대로 움직이니까.”

“그러라고 그러는 거죠. 매번 나한테 설레고, 나한테 반하라고.”

“하…… 이래 놓고 죽겠다고?”

“안 죽을게요.”

그 한마디에 카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카마리 경한테 청혼받았는데, 갑자기 죽기 아쉬워지네. 정말로 제대로 살아보고 싶어졌어요.”

방금까지 분명 필요하다면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곁에 있어 달라는 그녀의 말에.

내일, 그리고 또 내일.

그녀의 옆에 간절히 있고 싶어졌다.

그런 욕심이, 결국 미어져 나오고 말았다.


“처, 청혼이라니 내가 언제!”

카마리는 화르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횡설수설했고, 이사나는 그 모습에 진심으로 환하게 웃어버렸다.


“자, 그렇게 됐으니까. 이제 진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마지막 단 한 발.

어떻게든 심장을 노려봐야…….

쿵-!


-끼이이이익!

그 순간, 갑자기 땅이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모체에게서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카마리와 이사나는 곧장 서로를 보호하면서 갑자기 땅 밑으로 꺼지는 모체의 모습을 경악스럽게 지켜보았다.


“지금, 저게…….”

“어디로 가는 거지?”

페르소는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간의 숲에 균열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열리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억지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공기마저 겁먹고 있어요.”

이사나는 페르소의 말에 이클리트를 떠올렸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하지만 페르소가 거슬리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침입자는, 둘입니다.”

 

***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은 숲을 억지로 헤집고서 들어선 이클리트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투성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불안하게 뒤틀린 시선으로 정신을 잃고, 허공에 묶여 있는 아멜리아.

오직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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