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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꼭, 지켜줄게요 (190/199)


190화. 꼭, 지켜줄게요
2022.10.28.



 
이클리트는 피투성이가 된 아멜리아를 온몸에 힘을 준 채, 응시했다.

심장에서 뻗어 나온 가시 꽃이 그녀를 휘감고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 제비꽃이 그녀의 심장에 피어서 그 생을 빨아 먹는 게 싫었는데.

이젠 아예 가시가 되어 그녀를 다치게 하고 있으니…….

그는 치미는 분노를 한껏 움켜쥐고서, 제대로 칼자루를 붙들었다.


‘내가 당신을 꼭 지켜줄게요.’

이클리트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페스티스의 거대한 모체가 순식간에 장벽을 이루고서 그를 막아 세웠다.

이클리트는 모체를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모체는 사람의 팔보다 더 굵은 줄기를 끊임없이 뻗으며, 이클리트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비켜.”

그는 검으로 줄기를 마구잡이로 베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줄기는 베고 또 베어도 끝도 없이 자라선, 조금도 그녀와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이클리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허공에서 멈춰버린 이클리트가 다시금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로 오롯이 그녀의 생채기만이 아프게 그를 할퀴고 있었다.

정신을 잃어서 아프진 않을까.

아니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녀가 기다릴 텐데.

계속,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서로가 지켜주겠다는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데…….


‘더는, 당신에게 늦고 싶지 않아…….’

이클리트는 아멜리아가 아닌 그 속에 있는 정령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그녀에게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실망해서 벌을 내린다더니. 아무 죄 없는 인간의 생을 두고 벌을 내린다는 것은 모순이지 않은가.”

어떻게든 이성적으로 말을 하려고 해도, 점점 격앙된 감정이 그의 어조를 흐트러지게 했다.


“감정과 감정을 나눠 가지며 화합하는 마음이 열쇠라더니. 그런데 그 열쇠가 숲을 여는 방법은 어떻지? 그 감정에 가장 많이 상처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령, 그대들도 그럴싸한 말은 했어도 결국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경고라니. 자비를 내렸다니. 전부 헛소리지.”

이클리트의 목소리를 실은 바람이 점점 거세게 튀어 올랐다.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비참하게 갈라놓으려고 하면서. 이게 그대들의 자비라면, 나도 자비를 내려 보지.”

한 방향으로 제대로 불던 바람이, 갑자기 이클리트에게로 빨려 들어가면서 점차 주변의 공기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토록 아끼는 이 숲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없애겠다. 이 또한 나의 자비다. 그대들은 내게서 세상 전부를 빼앗으려고 하지만, 나는 고작 이 숲 하나만 없애려고 하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끝내, 이클리트는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을 완전히 놓아버린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안에서 금방이라도 그를 차지하고자 들끓던 수인의 광기가 삽시간에 제어점을 잃고서 이클리트를 삼켜버렸다.

“으으으윽! 악!”

그는 잇새 사이로 절규를 쏟아내며, 점차 모습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수왕의 피를 이은 반인반수.

아니, 오히려 수인에 더 가까웠다.

수왕의 피가 타락하게 되면, 악귀이자 마왕이 되었다.

주변의 모든 어둠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점점 길게 흘러내렸고 그 너머 피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살기를 긁어모으며 번뜩였다.

점차 피부를 뒤덮는 딱딱한 깃털이 그나마 남아 있던 그의 온기 서린 감정을 전부 앗아가고 있었다.

그에겐 그녀를 구하고자 움직이게 만드는 분노와 절망이 전부였다.

그가 뿜어내는 시커먼 감정에 숲이 요동치고 있었다.

공기가 겁에 질려 흔들리다 못해, 사방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니, 숨을 쉬는 모든 것들이 괴로워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어느새 숲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길 아래로 지옥 같은 불구덩이가 생겨나고 있었다.

뜨겁다는 말로도 부족한 열기가, 그의 말처럼 주변을 전부 무(無)로 만들고 있었다.

이클리트의 앞을 막고 있던 모체도 그의 섬뜩한 위압감에 짓눌려, 결국 앞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숲을 폐허로 만들기 시작한 이클리트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아멜리아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멜리아…….”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그 이름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그 순간, 정신을 잃었던 아멜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정신을 차린 아멜리아는 사방이 불바다에 그 불바다 한가운데에서 괴물로 변한 이클리트를 보며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그가 저런 모습으로 변한 것보다, 그의 표정이 더 선명하게 눈에 박혀서 그녀의 심장을 아리게 만들었다.

얼굴을 잘 감췄다고 여기지만, 그녀의 눈엔 보였으니까.

그가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파하며, 그 아픔을 어떻게든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만약, 예전 같았으면 이러한 괴로움을 그가 잘 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달라졌으니까.

예전처럼 감정을 숨기고, 아픈 것에 무뎠던 지난날의 모습과 달라졌으니까.


‘그분의 외로움이 내게 왔고, 나의 두려움이 그분에게 갔으니까.’

서로로 인해 이미 구원 받았으니까.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서, 점점 다른 의미의 분노가 그녀를 움직이게 했다.


‘아직도 내 몸 안에 있는 건가요? 직접 나서지 않고, 내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 말아 주세요.’

다른 무엇도 아닌, 그를 다치게 하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건 절대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신들이 얼마나 실망했는지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잘못했다면, 바로 잡는 것도 인간의 몫입니다. 부디 중립을 지켜주세요. 이번 일에 그를 휘말리게 해서, 그가 위험해진다면. 저는 절대로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감히 신이라 할 수 있는 정령에게 그녀는 겁도 없이 경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겁이 나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죽었다가 다시 깨어났고, 앞으로 살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가 겁먹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생,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끝까지 지킬 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면서, 제 안에 있는 정령에게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자 몸을 죄고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풀리면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서, 마구 몸을 비틀었다.

그 때문에 가시덤불이 그녀의 살결에 더 깊은 생채기를 냈지만, 이상하게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외치고 싶었다.

그가 아니라 자신이,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제발 움직여. 움직여 달라고. 내 몸이잖아. 심장에 제비꽃도 내 거잖아. 아직은 날 지켜줘야지. 날 지켜서, 아직은 남은 생. 제대로 살게 해줘야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게 해줘야지!’

처음엔 온몸이 떨리다가, 차츰차츰 손가락이 하나씩 움직이더니 이내 팔 정도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멜리아는 가쁜 숨을 삼키고서 조심스럽게 치마 춤을 들어 올려선, 홀스터까지 어떻게든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어머니의 은빛 총이 더듬더듬 만져졌다.


‘어머니…….’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에, 기억이 너무나도 흐릿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선명했다.

기억 속 어머니는 참 다정하고 강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에게 이 총을 남긴 것도, 스스로 강해져서 지킬 수 있는 건 전부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셨겠지.


‘어머니. 제게 힘을 주세요. 나, 저 사람. 꼭. 꼭 내 손으로 지켜주고 싶어요!’

아멜리아는 가까스로 총을 붙잡았다. 그리고 갖은 힘을 다하여 총에 마탄을 장전했다.

그런데 어쩐지 마탄으로 만들어지는 마나의 속성이 자신이 알고 있던 속성이 아니었다.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야. 뭐지? 뭐가 이렇게 따뜻하고 반짝이는 온기가 모이는 거지?’

그때, 귓가에 낯익은 속삭임이 들렸다.


-고마워요. 또 한 번, 버텨줘서…….-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에 힘을 주었다.

지금 그녀가 만든 마탄은,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힘이 아니었다.

탕-!

사방으로 넘칠 듯한 빛이 쏟아지면서, 불길이 사그라들고 잿더미가 된 폐허를 환하게 비췄다.

이 빛은 아멜리아 말고도 이클리트를 지키고 싶어 하는 이의 힘이었다.


‘황후 폐하…….’

어느새 아멜리아를 붙잡고 있던 정령들도 순순히 흩어졌다.


-이제는 하나.

-맞아. 하나만 남았어.

순간, 정령들의 알 수 없는 재잘거림이 스쳐지나갔다.


‘하나라니. 뭐가 하나만 남았다는 거지?’

그때, 그녀를 휘감던 가시 꽃도 다시 제비꽃이 되어 그녀의 심장에 내려앉았다.

아멜리아는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을 펼치고서 환하게 웃으며 그토록 외치고 싶었던 이름을, 온몸에서 소리가 나는 것처럼 힘껏 외쳤다.


“이클리트!”

너무나도 그리웠던 온기가 그대로 와락 그녀에게로 안겨들었다.

아멜리아는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를 꼭 안고서 이제야 겨우 숨을 들이켰다.

이클리트 역시 온몸이 들썩일 만큼, 호흡을 삼키며 서로의 시선을 바라보다 곧장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입술 사이로 안도와 간절함과 그리움이 뒤엉킨 채, 터질 것 같은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미안해요, 이렇게 아프게 만들어서…….”

“내가 더, 더 빨리 와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서로가 무사했고, 서로에게 다시 닿은 이 순간이 중요할 뿐.

이클리트와 아멜리아는 마주 잡은 손끝에 더욱 힘을 주고서 천천히 함께 지상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숲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숲의 또 다른 침입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세인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에드조프.

아멜리아는 완전히 변해버린 세인트의 모습에 숨이 턱 하니 막혔다.


‘키르케가 말했던 그 모습이, 바로 저런 건가…….’

“세인트…….”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세인트에 닿지 못한 채, 덧없이 흩어졌다.

에드조프와 이클리트는 어쩐지 지금, 이 순간을 아주 예전부터 예상한 듯, 덤덤한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에드조프는 입꼬리를 비릿하게 추켜올리며 읊조렸다.


“결국 우리가 이 숲에서 만나게 되는군. 하긴. 우리 악연의 모든 시작이 이 숲이었으니까.”

“…….”

“둘 중, 누군가의 무덤이 되어야 한다면. 시작도 이 숲이니, 끝도 이 숲이어야지.”

에드조프는 제대로 검을 쥐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서 이클리트의 움직임에도 점점 힘이 가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난 절대 포기할 수 없으니까.”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멜리아를 향했다.


“절대로.”

그 시선에 이클리트가 이를 악물고서,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단 한순간도 그 눈으로 그녀를 보지 마.”

 
쿵-!

두 사람은 오직 끝.

행복이든, 비극이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고 그저 이 질긴 운명의 끝을 내기 위해 서로의 검을 격렬하게 부딪쳤다.

피를 갈구하던 세인트는 서늘한 이를 드러내며, 이클리트를 같이 공격했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차마 세인트를 공격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방어하다가 에드조프의 공격에 번번이 빈틈이 생기고 있었다.

에드조프는 그 모습에 조소를 그리며, 더 맹렬하게 공격했다.


“뭐지? 여기까지 와서 정 때문에 죽겠다는 거냐? 아니면. 네놈도 괴물이라서, 같은 괴물한테 연민을 느끼나?”

“더는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을 뿐. 세인트는 이번 일에 아무 상관 없어. 그러니 우리 둘의 일에 저 녀석을 끌어들이지 마라. 더는 그녀를 괴롭게 하지 마.”

에드조프는 계속해서 검을 섞으면서,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세인트를 응시하는 아멜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해야, 그녀가 날 볼 테니까.”

그 한마디에 이클리트의 시선이 굳어졌다.


“나는 이제 아멜리아, 그녀의 증오라도 가져야겠으니까. 그렇게라도 가져서, 날 기억하게 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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