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누군가는 쓸쓸히, 누군가는 따뜻하게
(192/199)
192화. 누군가는 쓸쓸히, 누군가는 따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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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누군가는 쓸쓸히, 누군가는 따뜻하게
2022.11.04.
이클리트의 검이 에드조프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에드조프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이클리트를 붙잡으며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너, 너…… 너!”
이클리트는 그런 에드조프를 향해 냉랭한 어조로 읊조렸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너 하나다.”
사라진다는 말보다, 너 하나라는 말에 에드조프는 무너지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야…….”
“너와 나는 악연도 아니다.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 혼자 복수의 도구라고 사로잡혀 있던 것뿐.”
이클리트의 목소리가 심장에 박힌 검보다 더 날카롭게 박혀왔다.
“나도 한때는 이용당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생을 끝내는 것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만이, 내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야.”
에드조프는 어느새 핏줄이 터져서 붉게 물든 눈동자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과거에, 어둠에 삼켜져 있는. 아니 야금야금 먹히다가 결국 무너지기 시작한 자신과 이클리트의 지금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은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는 자신과 달리 점점 더 빛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나와 같다고. 저놈과 나는 똑같이 가짜라고. 그래서 진짜가 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놈과 자신이 달라진 이유.
“나는, 그녀를 만났어.”
그 한마디가 에드조프의 머릿속으로 둔탁하게 떨어졌다.
“이미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았다.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나는 태어난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고, 사랑받으며, 나는 그렇게 나로서 살아갔어. 단 하나의 태양도, 솔라의 황제도, 그런 것이 날 진짜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클리트는 오롯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한껏 벅찬 숨을 내쉬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지켜주며.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날 진짜로 만들어주는 거다.”
이클리트와 에드조프 사이로 끼어들지 못한 채, 그저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아멜리아는 이클리트가 훤히 드러내는 진심 앞에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이따금, 걱정했던 모든 불안이 사그라졌으니까.
‘이제 대공 전하는,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셨어.’
더는 자기 자신을 놓지 않았다.
이미 자신에게 사랑이 충만하다는 걸 알고 계시니까.
‘맞아. 클로에 황후 폐하께서도 이분을 아끼고 사랑하고 계셔.’
마탄의 그 빛이 너무나도 뜨거웠고, 눈부셨던 이유는 그분이 대공 전하를 어머니로서 강하게 지켜주었으니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온전한 사랑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이클리트와 에드조프는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의 악연이자, 악연조차 아니었던 끈은 이제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대공 전하는 충분히 사랑받고, 사랑받으며 이곳에서 살아갈 거야.’
이클리트는 칼자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에드조프와의 마지막을 내뱉었다.
“그러니 이제 너 혼자 이용당하고, 이용당한 채. 부디 여기서 이만 끝내자.”
서슬 퍼렇게 떨어지는 이클리트의 말에 에드조프는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오한과 두려움이 그를 발밑까지 끌어당겼다.
정말로 온전히 혼자 남겨진 기분.
아무도, 정말 아무도 그의 곁에 없었다.
‘……아니야…….’
그의 곁에서 결국 끝까지 그를 지켰던 키르케도.
‘나 혼자 남겨졌을 리 없어…….’
이용당해도 좋으니, 사랑한다고 말했던 메사리나도.
‘말도, 안 돼…….’
그리고 어마마마조차.
내뱉으면 모든 것이 정말로 끝일까 봐, 꾹꾹 눌렀던 나약함이 끝내 하얗게 질린 그의 잇새 사이로 짓눌렸다.
“아니야. 싫어. 죽기 싫어…… 이렇게, 나 혼자. 나 혼자!”
속내를 토해내자마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리면서 에드조프의 이성이 끝내 바스러지고 말았다.
혼자라는 게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서.
에드조프는 이클리트가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심장을 꿰뚫은 칼날을 붙잡고서 그대로 뽑아버렸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칼날이 겨우 피를 막고 있었는데, 그조차 없어지니 피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며, 그의 두 눈동자에서도 피눈물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이미 어깨도 세인트에게 반쯤 물어 뜯겨서 제대로 된 몰골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완전히 엉망이 된 그를, 누구도 붙잡아주지 않았다.
철저히 그는 혼자가 된 채, 빈껍데기와 같은 모습으로 겨우 서 있을 뿐이었다.
이클리트도 더는 에드조프를 막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그는 끝이었으니까.
에드조프는 핏덩이를 토해내며, 아멜리아를 향해 바들거리는 손을 뻗었다.
“아, 아멜리아…… 제발, 날. 날 사랑하잖아…… 날 사랑하고 있잖아…….”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아멜리아를 향해 걸어갔으나, 아멜리아의 눈동자는 지나치게 덤덤했다.
한때는 감정이 담겼고, 또 한때는 증오와 분노가 있었으나, 지금 그녀의 차갑고도 고요한 시선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걸음을 좁히던 에드조프는 끝나 숨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를 보는데, 그녀가 눈앞에 없었다.
분명, 분명 그녀가 있었는데…….
점멸되던 시야가 한순간 까맣게 꺼지면서,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드조프는 아이처럼 악을 썼지만, 목소리마저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아, 아멜리아. 어디 갔어? 어디 간 거야? 왜, 왜 안 보이는 거야. 왜. 날 봐…… 항상 날 봤잖아. 나, 나, 날. 보, 보라고. 날, 혼자 두지 마……!”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다리에도 이젠 힘이 없어지면서, 에드조프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쓰러졌다는 감각도 없어지면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고, 또 긁으며 처절하게 꿈틀거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아무도 없는 어둠에 온전히 먹혀가고 있었다.
‘싫어. 무서워. 혼자 있기 싫어. 싫다고. 내가, 내가 진짜야. 내가 진짜라고…….’
더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은 채, 쇳소리만이 허무하게 날리면서, 마지막 말조차 끝내 닿지 못했다.
“아멜…… 그. 그대도, 날, 날 사랑. 사랑…….”
끝내 에드조프의 움직임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그의 생이 끝도 없는 차가운 나락으로 쓸쓸히 떨어졌다.
아멜리아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으나, 고개를 돌리고서 세인트를 바라보았다.
에드조프의 마지막 독에 삼켜진 줄 알았던 세인트가 아멜리아가 아닌 에드조프를 공격했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세인트가 다시 돌아왔다고 여겼지만, 에드조프를 공격한 이후 그는 여전히 거칠게 숨을 내쉬며, 괴롭게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크으으으윽!”
“세인트!”
어느새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그는 잔뜩 긴장한 시선으로 세인트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이클리트에게 말했다.
“세인트가 이상해요. 분명 날 도와줬는데. 에드조프도 죽었잖아요. 근데 왜 아직 독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요?”
이클리트는 바람결에 세인트의 체향을 맡았으나, 여전히 독 기운이 심했다.
아니, 이미 독 때문에 생명조차 위험한 상황이었다.
혼자 버텨내기엔 이미 한계인 셈.
사실 에드조프를 공격한 그 의지조차도 기적이었다.
‘벗어나지 못할 거다.’
이클리트는 미친 듯이 괴로워하는 세인트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 다시 독에 먹힐 테고 그땐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의지도 무엇도 없는, 살아있는 사령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클리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무겁게 열었다.
“아멜리아, 세인트는…….”
그때, 갑자기 대지가 불길한 진동과 함께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재빨리 아멜리아를 보호했고, 아멜리아는 눈앞에 보이는 끔찍한 광경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죽은 줄 알았던 모체가 다시 깨어났다.
그것도 에드조프의 시신을 흡수하면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어떻게…….”
“……페스티스. 사령초…… 사람의 욕망을 먹으면, 더, 더 강해져요…….”
아멜리아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인트!”
세인트가 제대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이클리트 역시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저렇게 말할 정도의 의식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세인트는 아멜리아가 아닌 이클리트를 보면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절, 경계하고 계시지요?”
아멜리아는 세인트의 말에 멈칫하면서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대공 전하께서 왜 세인트를…….”
이클리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고, 세인트는 그 모습에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잘, 하고 계십니다. 절대로. 절대로 가주님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 주세요.”
“도대체 무슨…….”
세인트는 온몸에 힘을 준 채, 위태로운 이성을 겨우 붙들었다.
“지금. 이렇게 마지막 말을 할 수 있는 게, 기적입니다. 그러니 가주님, 죽는 건, 제가 정하고 싶습니다. 더는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아요.”
아멜리아는 뭔가 무섭게 파고드는 세인트의 말에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제 다 끝났잖아. 내가 약속했잖아. 널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약속은, 이미 지키셨습니다. 저는 이미 자유로워요. 제가 지키고자 하는 이를, 마지막에 지켜줄 수 있으니까. 그러니 부디, 가주님의 뜻을 이어주세요. 수인도, 인간도 아닌 우리도 그저 살아가고, 또 살아갈 수 있게…… 그거면 돼요.”
세인트가 점점 모체를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세인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선 마구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붙잡고자 했다.
“안 돼…… 너도 살아야지. 너도 살아야 의미가 있는 거잖아!”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부디. 부디 행복해지세요. 가주님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세인트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대로 몸을 돌려서는 모체를 향해 달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모체와 함께 자폭하고자 했다.
“안 돼!”
아멜리아가 리볼버를 쥐고서 세인트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이클리트가 그런 아멜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안 돼요! 이거 놔주세요! 이대로는 세인트가, 세인트가!”
울음에 먹혀버린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그대로 흩어졌다.
이클리트는 그런 아멜리아를 그저 더 꽉 안아주면서 속삭였다.
“이 또한 세인트의 선택이고, 의지입니다. 그대는 이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 주면 돼.”
아멜리아는 눈물로 인해 시야가 엉망으로 망가졌지만, 어떻게든 세인트를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지막까지, 세인트가 외롭지 않게.
너무 슬프지만, 이클리트의 말처럼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세인트는 순식간에 모체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는 그대로 심장을 물어뜯었다.
모체의 심장은 마치 불덩이를 품고 있는 것처럼 뜨거워서, 입에 물자마자 엄청난 열기가 세인트를 휘감았다.
“크으으으윽!”
세인트는 참기 버거운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심장을 문 입에 힘을 빼지 않았다.
결국, 뜨겁게 헐떡이던 모체의 심장이 느려지면서 심장의 주변으로 불길이 일어나더니, 마지막 길동무로 세인트를 집어삼켰다.
“하아…….”
억지로 참고 참던 아멜리아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화염 속에 사라지는 세인트를 바라보았다.
이클리트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온몸으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두 다리에 끝까지 힘을 주었다.
그리고 충분히. 충분히 세인트의 죽음을 슬퍼했다.
‘세인트. 고마워. 정말 고마워…… 부디, 이번에야말로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자유롭게 가도록 해…….’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해야, 그렇게 기억해줘야, 세인트가 더없이 따뜻하게 마지막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불씨가 마치 꽃잎처럼 멀리멀리 퍼지고 있었다.
마치 세인트가 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처럼.
이클리트는 스켈레톤 플라워를 피워선, 세인트가 가는 길을 향해 날려 보내주었다.
루베르의 인사법대로.
저 꽃이 세인트의 수호자가 되어서,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환한 빛만 품고서 그렇게 가라고.
이클리트는 묵직한 숨을 삼키고서, 천천히 시선을 내려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눈동자가 습윤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인사는 하나였다.
가장 아프고 슬픈, 인사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