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모든 것이 제자리로
(198/199)
198화. 모든 것이 제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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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모든 것이 제자리로
2022.11.25.
이클리트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그는 시간의 숲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곳엔 마치 거울같이 무서우리만큼 투명하고 거대한 호수가 잔물결 하나 없이 멈춰 있었다.
느낌으로 거대한 문과 같았다.
이클리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에 잠기면, 시간의 숲이 열린다는 사실을.
그때, 귓가로 온갖 소리가 이명처럼 번졌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게 정령의 목소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클리트는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멜리아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해주십시오. 그녀의 제비꽃이 영원도 아니고 찰나도 아닌, 남들처럼 평범한 시간 속에 피었다가 지길 바랍니다.”
그때, 바람이 마구 흔들리면서 이클리트를 감싸 안았다.
이는 정령의 허락이었다.
그 안온한 바람 끝에 이클리트는 그제야 긴장했던 입꼬리를 풀었다.
돌아가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지만, 사실 그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미안해요, 거짓말해서. 그러니까 나를 너무 오래 기억하지 말아요.’
자신을 잊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부디 더없이 찬란하고 멋있게 살다가, 남들과 평범하게 그렇게 살다가.
가능하다면 한참 오래, 그리고 먼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클리트가 마지막 바람까지 간곡히 바라면서, 그렇게 호수를 향해 걸음을 내디딘 순간.
“이클리트!”
클로에의 목소리가 이클리트를 붙잡았다.
이클리트는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떻게…….”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더할 새도 없이, 클로에가 이클리트를 와락 끌어안았다.
분명 덩치가 배는 차이 나는데.
이상하게 클로에의 품에 와락 안긴 것처럼 되어버린 이클리트는 어찌할 바를 잃은 채, 손이 어색하게 허공에 떠 있었다.
마주 안아주지 않아도, 클로에는 상관없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뜻밖의 말에 이클리트의 심장이 쿵, 하며 진동했다.
그 찰나의 동요를 클로에는 느끼곤, 그 작은 변화에 감사하며 그녀는 붙잡고 있던 이클리트를 확 밀쳐냈다.
이클리트는 순간 몸을 휘청이면서,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클리트 대신 그녀가 호수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부서질 듯 마구 흔들렸다.
“왜. 대체 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가 달려갔으나, 이미 다른 열쇠를 품은 호수는 이클리트의 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클로에는 호수 속에 갇힌 채, 이클리트를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전히 텅 비어 있는 그릇이었기에, 네 열쇠의 힘을 내 안에 담았다. 내가 너 대신 열쇠가 될 거란다.”
“그러면 안 된다고…… 당신이 그러면 아멜리아를, 아멜리아를 살릴 수 없다고!”
“정령이 바라는 건 가장 크고 무거운 사랑, 그만큼 무거운 속죄다. 그때는 내 마음이 부족했지만, 이젠 아니란다. 널 대신해서 정령이 내 소원을 들어줄 거야.”
클로에의 말에 이클리트는 점점 그녀의 선택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든 걸 걸어서 아멜리아를 살리려고 한 것처럼.
지금 클로에는 이클리트, 자기 아들을 살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내 모든 걸 걸어서 이번에야말로 네가 행복해지게 해줄게. 우리 아가가 행복해질 수 있게.”
아가라는 말에 끊임없이 동요하던 이클리트의 심장 위로 뭐라 말할 수 없는 아릿한 통증이 간지럽게 꿈틀거렸다.
“……염치없지만, 나도 널 아주 많이 사랑한다.”
“…….”
“네가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더 많이, 널 사랑해. 아주 조금이라도, 네 어머니가 되고 싶어. 어머니로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걸 다 해주고 싶어.”
클로에의 진심이 터지고, 그 진심 앞에 이클리트 역시 꼭꼭 숨겨두었던.
아니, 자기 자신조차 몰랐던 감정이 점점 부풀었다.
사실 간절히 바랐으나, 제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누르고 외면했던 감정.
처음, 그녀가 어린 에드조프를 쓰다듬었을 때.
에드조프가 몇 번이고 마음껏 불러도, 그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안아주던 그 온기.
사실, 에드조프가 자신이길 바랐던 그 부럽기만 했던 마음.
그때, 호수에 갇혀 있던 그녀가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굳어진 표정으로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부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아…….”
그토록 잔잔했던 호수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날개가 뜯어지고 모습은 점점 불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클리트는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말을 툭 내뱉었다.
“……어머니…….”
그 짧은 한마디를 애타게 기다렸기에.
클로에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이 순간, 온전히 그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할 수 있는 소소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아프지 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아가.”
“어머니…… 어머니!”
자꾸만 낯설게 흐트러지던 그 한마디를, 이클리트는 제대로 힘주어 불러보았다.
그녀의 아들로서.
그도 이제 어머니가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는 아들로서.
그렇게 클로에가 완전히 호수 밑바닥으로 사라졌다.
이클리트는 한동안 그 호숫가에, 클로에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가 완전히 시간의 숲의 대지가 되고, 공기가 되고, 물이 되어 떠날 때까지.
아들로서 그렇게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기에.
***
“반년이나 걸렸네요. 미안해요, 너무 늦어져서…….”
이클리트의 긴 얘기를 다 들어준 아멜리아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와줬잖아요. 약속을 지켜줬잖아. 와준 거로 충분해. 오히려 다행인걸요.”
아멜리아는 이클리트의 손을 잡고서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대공 전하에게도 어머니가 계셨어요. 어머니의 사랑도, 대공 전하에게 충분히 닿았어요. 나는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고서 이클리트에게 보였다.
이클리트는 차마 이 손에 아이가 닿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너무 보고 싶어서.
아멜리아와 함께 아이를 안고서 홀린 것처럼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다.
아멜리아는 아이를 보고서 너무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기뻐하는 이클리트를 보며, 들뜬 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가 저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건 더는 과거의 상처에 붙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알았기에, 그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다.
“샬벳,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어로 눈꽃.”
그는 한 손가락으로 아이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제 내가 너를 지켜줄게.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널 지켜줄게. 그런 아버지가 될게.”
아이를 보던 이클리트가 고개를 들고서 아멜리아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다녀왔습니다.”
아멜리아 역시 엷은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와요.”
그녀는 이제 모든 소원을 이뤘다.
그가 함께 있었고, 평범하게 이 말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
이른 아침.
이클리트가 돌아왔고, 모두가 놀랐으나 또 모두가 당연하게 그를 반겼다.
카마리는 그녀답지 않게 표정을 드러내며 기뻐했다.
이사나 역시 몇 번이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벨반은 이클리트의 어깨를 다독였고, 마미는 어찌나 펑펑 울던지, 처음으로 이클리트가 당황해했다.
루시아 역시 아멜리아에게 허락을 받은 뒤, 이클리트를 꼭 안아주었다.
아멜리아는 이 많은 사람 속에 있는 이클리트가 신기했다.
모두가 그를 묵묵히 기다리며, 그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이제 그는 괴물 대공이 아닌, 이들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존재가 된 거니까.
그때, 하녀가 다급하게 달려와 아멜리아를 향해 말했다.
“피오레 공작 각하, 포르티셰 공작 각하와 카르티아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들이?”
“내가 불렀어요. 대공 전하도 돌아오셨으니, 제대로 정리해야 하니까.”
루시아의 의미심장한 말에 아멜리아의 눈빛이 나직이 떨렸다.
잠시 후, 알렉드라와 헤이츨이 이클리트를 향해 대공으로서 예를 갖추며 말했다.
“클리오 대공 전하,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장로회와 신성회가 대공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섯 공작가가 전부 모인 지금, 이제 이클리트가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이클리트는 자신도 모르게 밀려든 긴장감에 아멜리아의 손을 잡았다.
아멜리아도 그런 이클리트의 손을 마주 잡으며 무거운 숨을 삼켰다.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
여름 궁의 홀 안은 지난날, 대회의가 열렸을 때보다 더 무거운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그때보다 모여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로회와 신성회, 게다가 이름 있는 귀족들까지 전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지난날과 다른 점이라면 비어 있는 황좌였다.
“클리오 대공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클리오 대공 전하.”
이클리트가 안으로 들어서자, 귀족들이 앞다퉈 이클리트에게 눈도장 찍기 바빴다.
하지만 이클리트는 그저 침묵한 채, 장로회와 신성회를 응시했다.
신성회 대신관인 미야의 표정은 온화했으나, 장로회의 표정은 어쩐지 복잡해 보였다.
아멜리아 역시 신성회와 다른 귀족들은 몰라도 장로회가 쉽게 받아들일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았다.
마침내 전부 모인 자리에서 알렉드라가 다섯 공작가를 대표하여 먼저 입을 열었다.
“곧 프리메와의 평화 회담도 다가오는 지금, 계속 황위를 비워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다섯 공작가의 선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솔라의 황제는 심판장에서 다섯 공작가의 선택을 받은 대공이 황제가 내민 손을 잡으면 결정되는 자리였다.
알렉드라는 포르티셰 공작가를 상징하는 세이버를 들고서 무릎을 꿇은 채, 이클리트를 응시했다.
“포르티셰의 빛나는 검이 언제나 클리오 대공 전하와 함께할 것입니다.”
이어 헤이츨과 루시아 그리고 이사나까지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을 이클리트에게 받치며 그를 택했다.
마지막으로 아멜리아가 기쁘게 무릎을 꿇고서, 그에게 피오레의 장총을 보였다.
“피오레의 명예로운 총성이 언제나 클리오 대공 전하를 지켜드릴 것입니다.”
내내 굳어있던 이클리트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아가 내민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섯 공작가 모두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 전하 아니 황태자 전하를 차기 황제로 선택하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 황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없었기에, 마지막 결정은 장로회와 신성회에게 넘어갔다.
미야는 말없이 장로회 장로들을 응시했고, 장로들은 이클리트를 바라보았다.
이클리트는 장로들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했다.
찰나의 순간, 점점 침묵이 길어지자 아멜리아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역시 아직 장로회는 안 되는 건가?’
“솔라의 황제는 황자의 자질을 끊임없이 살피고 또 살펴서, 다섯 공작가와 황제 폐하의 선택으로 오르는 자리입니다.”
그때, 뜻밖의 목소리가 장로회에서 새어 나왔다.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솔라를 위한 황제인지. 우리가 존경하고 존중할 수 있는 주군인지 끊임없이 지켜보기 위해서이지요. 그렇기에 클리오 대공 전하, 대공 전하께서는 이미 그 자질이 차고 넘치십니다.”
장로회와 신성회 모두, 이클리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솔라에 새로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윽고, 미야가 이클리트에게 태양을 상징하는 보관을 보였다.
아멜리아는 보관의 모습에 떨리는 숨을 삼켰다.
‘애초에 이들은 망설이지 않았구나. 처음부터 이분을 황제로 인정했던 거야.’
이클리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미야 앞에 앉았고, 미야는 그에게 보관을 씌웠다.
그는 머리 위로 내려앉은 이 무게를 느끼며, 읊조렸다.
“그대들의 선택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솔라의 태양을 찬란히 이어받을 것이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위대하신 솔라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지켜보던 헤이츨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펜을 들고 솔라에 새롭게 떠오른 태양의 이름을 썼다.
마침내, 그가 이클리트 라이엇 클리오 대공이 아닌 이클리트 라이엇 솔라리스의 이름을 이어 솔라에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