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일주일 뒤.
<유별난 친구들> 촬영장.
장시간의 촬영으로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중이다.
그런데.
유독 인파가 몰려있는 곳이 있으니.
스태프, 배우들이 둥그런 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역배우 박유진을 둘러싸고 말이다.
누가 보면 퍽 험악해보일 모습.
하지만 실상은.
“유진아. 너 주려고 쿠키 구워왔어!”
“제주도 다녀온 친구가 감귤초콜릿을 잔뜩 사왔더라고. 너 먹어라.”
“나는 무설탕캔디! 목 안 좋을 때 한 번 먹어봐.”
유진이 그들에게 군것질거리를 받는 중이다.
덕분에 유진이 입고 있는 옷.
그 주머니가 모두 빵빵해졌다.
품에도 과자를 한아름 안고 있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아!”
유진은 받을 때마다 웃으며 꾸벅 인사했고.
그 모습을 스태프들이 흐뭇해하며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들.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보답을 바라고 먹이를 주는 게 아니듯.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잘 해주려는 건 본능적인 것이다.
“대체 저게 뭔 일이냐?”
그 인파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
정CP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자 고PD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조명팀 애들이 과자 뜯다가 유진이한테 하나 줬나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귀엽다고 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주기 시작했다는데요.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는 것 같다나?”
“아니 무슨 동물원도 아니고. 애한테 뭐하는 거야?”
“스태프들 표정 좀 보세요. 오히려 공물을 바치는 것 같지 않아요? 아기동자 모시는 것처럼요.”
잠시 후.
한 남자가 두 사람의 옆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어후! 과자 하나 주는 것도 힘드네.”
주연 배우 중 한 명인 이석구.
<유별난 친구들>에서 기러기 아빠 역할을 맡고 있다.
주로 연극판에서 활동하던 배우.
캐릭터를 위해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석구 씨도 아기동자한테 공물을 바치고 오신 겁니까?”
정CP의 말에 이석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기동자? 아. 유진이요? 하하. 그럼요. 우리 작품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왔죠.”
“뭘 주고 온 거예요?”
“그 마트 가면 파는 어린이 종합선물세트요. 그거 찾느라 혼났다니까요? 평소엔 살 일도 없는데, 꼭 찾으려고 하면 없더라고요. 그런 거는.”
여전히 왁자지껄한 유진의 주위.
그를 보며 정CP가 중얼거렸다.
“촬영장에 하나 뿐인 아역배우라 그런가. 다들 못 예뻐해서 안달인 것 같아.”
“음, 그것도 있긴 한데. 그냥 애가 연기를 잘 하잖아요?”
생수로 목을 축인 뒤 말하는 이석구.
“경력도 없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8살짜리가 저런 연기가 가능하구나 싶더라니까요? 그러니까 배우들도 다 쫄았죠.”
“배우들이?”
“네. 애가 연기를 저렇게 잘하는데, 우리가 실수하면 어떡해? 이런 거 있잖아요. 게다가 유진이는 여태 NG 한 번 안 냈으니까요.”
“게다가 쉬는 시간에도 대본만 쳐다봐요. 애가 벌써 프로페셔널함이 있어.”
고PD가 거들었다.
<유별난 친구들>도 어느새 중후반부를 달려가고 있는 상황.
이제 익숙해졌다는 생각에 배우들도 조금 느슨해질 수 있는 시기.
그때 유진의 등장으로 기분 좋은 긴장감이 조성된 것이다.
아역이 저러는데, 성인인 자신들이 나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 때문에 대본이라도 한 번 더 보고, 대사를 한 번 더 맞춰보기 시작한 것.
“진짜 일주일 전만 해도 어떻게 되나 걱정했는데. 유진이가 이렇게 잘해줄 줄은 몰랐어요.”
“그니까. 경력 없다고 걱정했는데.”
이런 긍정적 변화는 스태프 측도 마찬가지.
유진이 합류한 이후 촬영이 그 어느 때보다 순조롭다.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등 싫은 소리를 하지도 않고.
어른보다도 의젓해서 크게 신경써 줄 부분이 없다.
“유진이만 보면 집에 있는 애들이 생각나. 집가봤자 애들이고 마누라고 다 자고 있어서 얼굴 보기도 힘든데.”
“솔직히 유진이 보러 오는 거지. 내가 힘들다고 하니까 막 파이팅하라면서 응원해주는데. 진짜 와. 비타600보다 낫더라. 엔돌핀이 막 솟구치는 느낌이랄까.”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도 복덩이가 굴러온 것 같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스태프들도 있을 정도.
쪽대본으로 돌아가는 드라마판 특성상.
휴일 없이 빡세게 돌아가는 상황 아닌가.
그 누구라도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
“감독님! 스태프 형, 누나들! 오늘도 고맙씁니다아!”
거기서 유진이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중이다.
촬영장 분위기가 좋으니 일의 능률도 오를 수밖에 없다.
배우들에겐 긴장감을.
스태프들에겐 웃음을 주는 존재, 분위기 메이커.
이런 아이를 누가 싫어할 수 있을까.
“진짜. 크면 대배우가 될 겁니다”
이석구가 단언했다.
그것은 배우, 스태프 모두 공통된 견해였다.
이 사랑스러운 꼬마는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라고 말이다.
*
승용차에 시동을 건 차동석.
그는 창문을 내리고 한 곳을 응시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
그리고 잠시 뒤.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줬다냐. 물론 감사하긴 한데.”
“아빠! 나 줘요! 내가 더 들게요!”
“아냐. 괜찮다. 아빠가 더 들어줘야하는데, 뭐가 이리 많은지······.”
멀리서 한 부자父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당연히 박태종과 유진.
어른인 박태종도 낑낑대며 걸어오고 있는데.
제 덩치만한 짐을 들고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유진.
그 모습이 꼭 자그마한 펭귄같은 모양새다.
그 모습을 본 차동석은 차에서 내려, 짐을 받아주었다.
그러자 유진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흐아! 팔 빠지는 줄 알았다아.”
박태종도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와 동시에.
“······흐윽.”
땀보다도 더 크게 흐르는 눈물을 함께 닦았다.
“으흐흑······우리, 우리 아들이.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니······.”
“아빠, 뚝 그쳐요!”
촬영장에서 사랑받는 유진.
그를 지켜본 박태종은 크게 안심한 눈치였다.
박태종은 처음으로 유진의 촬영현장을 지켜보았다.
혹여 낯선 환경에서 유진이 위축되진 않을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다.
물론 제 아들이 그럴 리는 없지만.
부모 마음이라는 게 항상 자식 걱정이 우선 아닌가.
그런 우려가 기우라는 걸 증명하듯.
유진은 넘치는 사랑을 받아오는 길이였다.
“과자 장사해도 되게따!”
양이 너무 많아 결국 트렁크를 열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을 보며 차동석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받은 과자들은 다 어쨌냐? 여태까지 받은 거 다 합치면 양이 엄청 날텐데.”
“이미 다 먹었어요!”
그 말에 차동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꼬맹이. 과자 너무 많이 먹지 마라. 너 그러다 이빨 다 썩는다. 살도 막 뒤룩뒤룩 찌고.”
주는 족족 다 먹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리라.
“저 잘 안 먹어요! 아빠가 다 먹어요!”
달달한 과자는 싫어하는 유진.
덕분에 과자 처리는 거의 박태종의 몫이다.
그래서인지 급격히 살이 찌는 중이었고.
“아, 그. 그러냐?”
저도 모르게 탈룰라를 시전해버린 차동석.
박태종과 함께 눈치를 보며 서로 허허 웃을 따름이었다.
“뭐야, 꼬맹이. 또 영화 대본 보려고?”
황급히 화제를 바꾼 차동석.
“넵!”
유진이 손에 들고 있는 것.
바로 영화 <리플레이>의 대본이다.
오디션 대본이 아닌, 최희숙에게 받아온 전체 분량 대본이다.
대본을 받은 이후 대체 얼마나 읽었는지.
종이 끝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때. 준비는 잘 되는 것 같아?”
“음,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응?”
박태종은 물론 차동석까지 당황한 모습.
시종 어떤 일에도 당당하던 유진 아닌가.
설마 유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
“제대로. 제대로 준비해야해요.”
하지만 유진이 말하는 준비.
그것은 연기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 유일한 실수가 그거예요.’
유진은 회귀 전.
잔뜩 만취해 울먹이던 최희숙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감독님, 이제 그만 마시는 게 어떠세요? 몸 생각하셔야죠.’
‘내가, 내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필 첫 작품에서.’
‘첫작품? <리플레이> 찍을 때요?’
‘그래요. 그 아역을 쓰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비겁한 짓을 했어요.’
아직도 선하다.
가슴을 퍽퍽치며 후회하던 최희숙의 모습이.
‘투자금을 받고, 아역을 꽂아주다니······.’
연기력만 좋으면 어디든 캐스팅 될 수 있다?
다 개소리다.
때론 연기력 이외의 요소들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친다.
배우이던 시절엔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번엔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드려야지.”
그러나 회귀 전 배우를 그만둔 뒤.
차동석 밑에서 연예계 업계에 대해 집중교육을 받았다.
그로 인해 기른 능력 하나.
‘판을 읽고 흐름을 바꾸는 것.’
*
서울 시내의 카페.
영화감독 최희숙이 퀭한 눈빛으로 앉아있다.
곧 카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고.
“여기야.”
최희숙이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바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
“밖에서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하셨네, 감독님.”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신수가 훤한 영화감독이 어디 있겠어?”
바로 최희숙의 친구인 배준석.
최희숙이 세운 독립영화 회사, ‘다님길필름’에서 각종 일처리를 도맡고 있다.
“뭐야, 벌써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거야?”
“좀 일찍 나왔거든. 시나리오랑 콘티 짠 거 마지막으로 검토 좀 하느라.”
“그러다 쓰러지겠어.”
“걱정 마. 크랭크업 전까진 안 쓰러져.”
퀭한 눈으로 대답하는 최희숙.
그를 보며 배준석이 피식 웃었다.
"그런 몰골로 말해봤자 설득력이 전혀 없다, 야."
“그래서. 갑자기 할 얘기가 있다는 게 뭐야? 좋은 얘기면 좋겠는데.”
최희숙은 그리 말한 뒤.
커피잔의 침전물까지 탈탈 털어마셨다.
“좋은 얘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배준석은 최희숙의 눈치를 슬쩍 봤다.
“음, 투자사가 나타났어.”
“뭐, 정말? 진짜?!”
“그래. 네가 빚낸 거 메꾸고도 남을 거야.”
명백히 좋은 소식이다.
최희숙이 대출까지 끌어다 제작비로 쓰고 있으니.
“그런데 투자사의 조건이 있어.”
“조건? 뭔데?”
“아역을 한 명 꽂아달라는 요청이야.”
그 말에 눈썹을 찌푸리는 최희숙.
좋은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인 모양.
“아니, 투자사가 어딘데 독립영화에다 아역을 꽂아 넣어달라는 거야?”
“듣기로는 꽂으려는 애가 사장의 아들이래.”
“그래서 아예 돈으로 꽂아버리겠다는 건가? 대단한 부성애시구만.”
최희숙이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나 배준석은 차분했다.
“어차피 독립영화 예산이 억 단위도 아니고. 잘 엮으면 어떻게 회사 이미지에도 도움 된다고 생각하겠지.”
문화 발전을 위해 훌륭한 독립영화를 지원한다.
그런 식의 이미지 메이킹으로 홍보효과를 볼 수 있다.
즉, 기업입장에서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닌 모양.
“그래서, 그 아역이 대체 누군데? 자료는 있어?”
“그쪽에서 보내준 게 있어. 여기. 그래도 <아이키움> 출신이라니까, 연기를 어느 정도는 할 거야.”
배준석이 가방에서 프로필을 건넸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최희숙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얘는.”
“뭐야. 아는 얼굴이야?”
“······신애랑 같은 반 친구야.”
양진우.
최희숙도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설마 아역배우를 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얘 꿈이 프로게이머라고 했었는데. 아역배우를 하고 있었어?”
“뭐, 이 나이대 애들 꿈이야 하루마다 바뀌는데 뭐. 그리고 그게 중요해? 잘하면 쓸만한 인맥이 될 수 있지 않아?”
자식들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사소해보이지만, 인맥은 이런 식으로 생겨난다.
심지어 영화에 투자해주겠다는 기업 사장님과의 인맥이다
결코 손해볼 것 없는 일.
“난 싫어.”
하지만 최희숙은 곧 프로필을 치워버렸다.
“이미 아역배우들한테 다 공지했어. 오디션 보겠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낙하산을 꽂아넣으라고? 그게 말이 돼? 게다가 단역도 아니고,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해줄 아역이라고!”
<리플레이>의 아역은 무게감이 퍽 다르다.
분량이 그리 많진 않지만.
영화 초반부를 이끌어줄 중요한 역할임은 분명하다.
“네 마음은 알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배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독립영화 찍으려고 했어? 우리한테 투자해줄 곳이 없었잖아. 그래서 강제로 독립영화로 가는 거고.”
<리플레이>는 살인마의 내면묘사가 중점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액션, 신파, 통쾌함.
그런 게 배제된 시나리오라는 뜻.
때문에 투자자를 찾지 못했고.
결국 최희숙의 사비를 쓰게 된 것.
“너 전에 살던 집 전세금까지 빼서 영화에 투자했잖아. 지금 신애도 한참 클 때인데, 언제까지 고집할 거야? 최소한 보험장치는 있어야지.”
유신애.
그 이름이 등장하자 최희숙도 뜨끔한 모양.
최희숙은 딸 유신애에게 미안한 감정 뿐이었다.
영화 만들겠답시고 제대로 신경도 못 써주고.
심지어 영화 만들겠답시고 전세금을 빼서 월세 빌라로 이사했다.
괜히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나선 탓에 제 딸에게 피해만 주는 것 같다.
유신애가 소심한 성격인 게 제 탓처럼 느껴질 정도.
“언제까지 독립만 찍을 생각 없잖아. 이거 이후엔 상업 찍을 거라며? 그럼 최대한 손해 덜 봐야지. 그리고 솔직히 나도 월급은 따박따박 받고 싶다.”
“내가 돈 안 준 적 있어? 없잖아.”
“그래도, 혹시나 영화 망하면? 그때도 빚내서 나 월급 주려고? 나도 요즘 돈이 없어서 좀 힘들어.”
최희숙은 고개를 숙였다.
여러 현실적 요건들이 자신을 압박해오는 기분.
그런 와중.
그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
그건 바로 박유진이었다.
‘내 딸 친구까지 참여하는 오디션이야. 그런데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해야한다고?’
비주얼은 잘 매치되지 않지만.
속독 능력과 핵심을 짚어내는 그 통찰력.
내심 오디션 때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던 차다.
“······일단 오디션은 예정대로 보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는 최희숙.
“갑자기 취소하고 누가 캐스팅 됐습니다. 이렇게 말할 순 없으니까. 그리고 감독으로서 연기하는 모습은 직접 봐야겠어.”
“그래. 구체적 얘기는 나중에 하자.”
최희숙의 안색을 확인한 배준석.
가볍게 최희숙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최희숙은 한숨을 내쉰 뒤 가방을 뒤적였다.
거기서 나온 건 며칠 전, 주역 매니지먼트 쪽에서 보내온 프로필.
정장을 입고 있는 유진의 사진이었다.
“그래. 뭐가 됐든 내 눈으로 확인해야지.”